마땅히 적을 곳이 없어서(짧은 끄적임)

병子의 지인열전(3)ㅡ 의정부 아인슈타인! 곽선생

by Aner병문

지금은 연락이 끊긴 잘생긴 요요쟁이 동창이 한 명을 덜컥 소개시켜줬더랬다. 훗날 격투기 취미를 가지리라곤 생각도 못하던 배불뚝이 고3 시절이었다. 한 살 아래 곽군은 그때나 지금이나 훤칠한 키에 억센 몸을 갖고 있었다. 당시 듣기로 태권도 4단이라고 했다. 그 커다란 몸이 반대돌려차기를 할 때는 붕붕 날았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나와 달리 아주 확고한 꿈을 가지고 우직하게 살았다. 내가 허세스럽게 온갖 술과 책과 무공을 다 들여다보며 기초없이 소일할 때 그는 오래 해오던 태권도를 권투로 바꾼 것 이외에는 늘 똑같았다. 요리와 보드게임을 즐겼고, 술은 입술만 적시는 정도였으며 꿈꾸던 과학 교사가 되기 위해 석사까지 땄다. 그는 오랜 고행 같은 고시 공부를 기어이 이겨내고 마침내 공립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 그는 나와 닮은듯 다르며, 내 주위 사람 중 문무를 겸비한 몇 안 되는 이 중 하나다.



나는 그와 오래 교류했다. 사실 군대 얘기, 격투기 얘기 빼면 시커먼 남정네들과 썩 할 말이 없던 청춘이었다. 이십대의 나는 머스마들과 늘 정치나 철학, 문학 얘기를 지껄이다 혼자 화를 팩 내곤 했다. 쓸데없이 정의로우려던 시절이었다. 곽군은 그런 나와 유일하게 잔을 나누는 사내였다. 그와 나는 가치관도 신앙관도 학문의 길도 달랐지만, 서로가 보는 세상에 흥미가 있었다. 나는 유일신도 믿지 아니하는 놈이 절대적 진리를 탐구한다는 사실에 놀랐고, 늘 이론 편향적인 그의 천체물리학이나 상대성이론을 일부러 비웃곤 했다. 그는 씩씩대며, 거 서학 천주쟁이, 서양도깨비 드립 치려거든 안경 벗고 서마터폰이나 버리고 말하쇼. 아마 그가 보기에 철학은 난삽스러운 요설이며, 특히 유학은 고리타분, 아니 골이따분 하고 뒤떨어진 기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늘 유교와 유학도 구분하지 못하면서 유학의 계급적 위계ㅡ정명 사상의 변용에 대해 물어왔지만, 나 역시 김영식 선생의 논문으로 과학과 기술을 구분한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사실 장난 빼고 말하자면 동양 철학과 종교가 오랜 시간 동안 자연에 순응하여 시공간에 대해 파악하지 않았을때, 서양 과학은 이미 시간의 기준을 세우고 공간을 재는 단위를 마련하여 세계를 재단할 준비를 갖추었다. 이러니 흥선대원군 백을 모아도 당해내기 어려운 시대였던 셈이다.



흥선대원군은 둘째치고라도, 그는 나와 달리 술을 즐기긴 해도 과하지 않고 타고나길 또한 무골이라 어느 틈에 몇 년간 열심히 고련한 권투가 이제 프로 지명까지 받을 정도가 되었다. 당시 나는 갖가지 익혔던 타격기와 관절기를 모두 동원하여 뼈가 닳도록 몇 년에 한 번씩 각오하고 덤비지만, 늘 끝내 그를 이기지 못했다. 내가 뒤늦게 ITF 에 입문해 2단을 땄을 때도 그는 늘 무엇으로든 나보다 앞서 있었다. 술자리에서 그의 외곬수적인 물리학을 놀리는건 흥겹고, 링에서 마주치면 무섭기 짝이 없는 거한이지만, 나는 너와 더불어 그를 보는 것이 늘 즐겁다. 그는 오래 전 내가 병원에 있을 때 서울의 모든 정형외과에 전화하여 끝내 나를 찾았고, 지금도 항상 의정부에서 안양까지 세 시간이 걸려 놀다가 돌아간다. 아내 없는 밤에 처음으로 너와 심야버스를 타던 밤, 그 놈은 늘 이 버스를 타며 오고 갔겠구나 생각에 괜히 목이 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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