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적을 곳이 없어서(짧은 끄적임)

눈 오던 밤 집 앞 거리에서

by Aner병문

늦게 출근한만큼 늦게 퇴근하는 밤, 저녁 무렵부터 바람 섞여 날린 눈발은 제법 소복히 쌓여 발자국마다 사박이는 속삭임이 들렸다. 아홉 시 이후면 세상은 약간이나마 멈춘 듯 흥청이는 술 추렴 소리도, 담배 피우며 몰려다니는 젊은이들도 조금은 덜 보여 한적하고 어두웠다. 달빛을 받는 눈더미만이 물끄러미 하늘을 올려다오고 있었다. 나는 괜시리 뒷발서기하듯 뒷꿈치를 들고 앞발로만 조심조심 디뎠다. 경공의 극의에 다다르면 답설무흔ㅡ눈밭을 걸어도 흔적 하나 남지 않는다 했다. 백범 선생께서는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수 있으니 앞선 사람은 섣불리 발자국을 남기지 말라시었다. 전쟁 같은 하루가 다 지나고 그렇게 생각많아 하릴없는 밤이었다.



몇몇 사내들이 나와 눈밭을 쓸고 치우는 밤거리에서 김밥 같은 검은 파카 길게 둘러입은 여자가 보였다. 제 손에 든 빗자루만큼이나 껀정하게 키가 크고 얼굴이 동그란 젊은 여자였다. 추위가 낯선지 속장갑을 끼고 빨간 고무장갑까지 덧낀 채 눈을 쓸고 치웠다. 빗자루와 넉가래를 쓰는 솜씨가 그럴듯하여 보다가 비로소 아내인 것을 알았다. 멀리 볼때부터 긴가민가했지만 설마 이 늦은 밤에 아이 재우고 쉬지 않을까 설마 아내일까 싶었는데 아내였다. 함민복 시인의 말씀처럼 어느 우주를 돌다 내 곁에 누워 나와 한 이불을 덮어, 내가 누구라고 부를지 알 수 없는 내 아내였다. 소은엄마, 어쩐 일여, 애 혼자 뒀는가? 아내는 김밥 파카 주머니를 툭툭 치며 웃었다. 카메라 켜두고, 휴대전화 앱이랑 연결해가 놨다 아입니까, 아 소리 나믄 바로 뛰올라갈라고. 이 사람아, 그래도 나 오믄사나 허지 혼자 힘들게 이게 뭐여, 참말로. 여보야 일하고 오는데, 게다가 눈이 많이 와가 지금 치워야 고생 안한다 아입니까, 다들 도와주셔가 내 한나도 안 힘들었어예. 산에서 일하는 아내는 눈을 쓸고 치우고 쌓는 품이 나보다 나았다. 그래도 나는 아내의 손에서 빗자루와 넉가래를 빼앗아 남은 눈을 긁고 치웠다. 주변의 몇몇 아저씨들이 손사래를 쳤다. 눈이 신랑을 치우겠네, 힘은 좋다만은, 마나님 데리고 얼른 올라가봐. 연극 무대 같은 밤에 달빛이 조명처럼 눈부셨다. 이 사람이 내 아내구나, 이 사람이 나와 평생을 함께 할 사람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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