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적을 곳이 없어서(짧은 끄적임)

요즘은 솔직히

by Aner병문

제일 많이 읽는 글이라고 하면 설명서다. 원래 기계 다룰 줄 모르는 치 癡 들이 물건 사면 제일 먼저 읽어보지도 아니한 설명서부터 버린다던가. 오랫동안 문학병(!)을 앓아온 나 역시 운전도 서툰 주제에 설명서는 던져버리기 일쑤였다. 설명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얄궂게도 역시 목구멍이 포도청이었기 때문인데, 새로운 부서에서 나조차도 모르는 내용을 타인에게 알려줄 수는 없었고, 자기 일로도 바쁜 선임들을 붙잡고 물어보기도 하루이틀이었는지라, 결국 숱하게 쌓여 있는 설명서를 들여다볼수밖에 없다. 생각해보면 소설이고 인문학 교양서고 간에, 글이 문장의 집합체를 벗어나 비로소 글로 읽히기 위해서는, 저 두껍기 짝이 없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마냥, 새로운 미지의 세상을 열어주지 않으면 안된다. 이를테면 여지껏 써본 적이 없는 전자기기의 용도는 무엇이며, 왜 만들었으며,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ㅡ를 단순히 내용만 나열하는데 그치지 않고 남녀노소 누구나 편히 읽고 이해시키기 위해서, 더군다나 전세계인들이 모두 사용하기 위해서는 기술과 언어와 각 국의 문화에 능통한 이들이 모두 모여 문장을 닦고 조이고 기름치지 않으면 안되었을 터이다. 그러므로 새 일을 시작한지 오늘로 이백일, 나는 이제서야 겨우 생소한 일이 흘러가는 끄트머리를 붙잡고 설명서를 읽어내려가고 있으며, 어째서 저 젊은 전석순이 철수사용설명서 로 이 청춘을 조망하여 주목을 받았는지, 저 유명한 배명훈이 설명서를 차용하여 세상을 지키는 방법에 대해 썼는지 이제서야 알겠다. 최선을 다했다는 가정 하에, 문자가 만들어진 이래로, 읽을 필요 없이 버려지는 글 따위는 역시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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