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적을 곳이 없어서(짧은 끄적임)
대체 예술이란 무엇인가.
오래 전 사범님께서, 저 유명한 김용옥 선생의 따님 김미루 씨가 행위 예술로써 돼지우리에서 뒹구셨을 때, 대체 왜 현대 예술은 이토록 난해하고 파격적인지 물으신 적이 있다. 그 질문은, 내가 어려서 철이 없던 시절, 소설가를 꿈꿨을 때 어머니께서 글쓴다는 놈이 이쁘고 좋은 것만 볼 생각은 안허고 세상천지 난잡하고 어지런 것만 봐쌍게 대체 뭔 글을 쓸라는지 모르겄다며 타박하신 일과 맞닿아 있을 터이다. 태권도를 너에게 맞추지 말고 네가 태권도에게 맞춰야한다고 가르쳐오신 사범님과. 원래 처녀 적에 시인의 문하생이셨던 어머니는, 결국 개념과 형식이 고정되어 잡혀 계신다는 공통점이 있다. 사실 마루야마 마사오의 지적처럼 철학이 그러하듯 예술도 반드시 어떤 고정된 형태와 의미를 담아야한다는 선입견이 널리 퍼져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나 솔거 시절의 고전예술에서 현대예술로 흘러오며, 예술은 단순히 모방과 모사에서 창작, 의미 파괴, 심지어 아도르노의 표현처럼 탈주하기에 이르렀다. 저 유명한 마르셀 뒤샹이나 앤디 워홀처럼 자본의 위력을 겸허히 받아들이거나 희롱하여 일부 타협하기도 하지만, 누구에게나 불쾌하거나 난해한 방식으로 사회구성원들에게 되려 파문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므로 해석되지 않는 예술이란 오히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처럼 그 뜻을 맞히지 못하면 괜시리 내가 싫은 기분을 느끼기도 한다. 인간이 원래 그렇다. 미지의 무엇을 이해하기보다는 제 방식대로 뜯어맞추어 이해하려는 일, 우리는 그러한 행동 양식을 지배, 혹은 정복이라 부른다.
그러므로 5억짜리 벽화 앞에 오브제object 로 기능한 물감통과 붓을 보고, 참여식 예술로 착각하여 덧칠한 20대 남녀를 비웃을 필요는 없다. 에릭 가다머 식으로 말하자면 예술이란 본디, 작가가 만든 작품의 빈 곳을 관객이 채워주는 것이다. 예술의 개념이 고정되어 있지 않듯이, 작품의 의미 또한 작가의 의도만을 고집할 수는 없다. 내가 코끼리를 그렸어도 상대가 기린을 잘 그렸다고 칭찬한다면 사실은 내가 기린을 그린게 아니라고 고집할 이가 몇이나 있을까. (지..지록위마??) 그러므로 예술은 원래 작품을 매개로 작가와 관객이 유쾌하고 기발하게 주고받는 무언의 담론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훈련해온 기술의 성과를 상대의 몸에 퍼부어 비로소 증명하듯이, 예술의 해석도 그렇다. 5억이니 10억이니 해봐야 예술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예술에 일어난 일이니 예술적으로 잘 풀어지길 기대할 뿐이다. 안 그래도 세상...팍팍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