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적을 곳이 없어서(사는 이야기)
영호충의 독고구검처럼.
이번 달 회사의 급여가 삭감되었다. 회사라고 해도 다른 큰 회사의 외주업을 주로 맡는 하청(?!)업체다 보니 사실상 큰 고객 회사를 따르지 않으면 안되는 '큰 노비' 신세다. 그러므로 큰 노비를 따라 먹고 사는 나 같은 필부는 끽해야 대갓집의 행랑아범 집에서 눈치보고 일 거들어주는 작은 노비에 지나지 않는다. 무엇이 되었건 꿍꿍 벌어서 처자식 갖다주면 그만인 삶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회사 자체의 평가가 하락하여 이번 달 급여가 삭감되었다는 얘길 듣고보니 다소 난감하였다. 실제로 받은 돈은 평소 급여보다 3~40만원 정도가 적다. 선배님들 중에는 100만원까지 못 받은 이도 있다고 하여 말할 계제가 아니었다. 명분도 명분인지라 결혼 앞둔 맹 서방 붙잡아놓고 오랫동안 술을 펐다. 교회 집사인데다가 결혼을 앞두고 정말로 '집'을 '사' 야하는 맹 서방은 때때로 걸려오는 예비 제수씨며 장모님 전화를 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무리 선약이래도 나 역시 연차 끌어다 쓰며 석 달만에 결혼 준비하느라 정신없었던 시절이 떠올라, 아이고 오빠, 싸게 집에 가셔, 그냥~ 권해도 맹 서방 역시 술 한 잔 못 마시는 처지에 총각 시절을 놓치고 싶지 않은지, 에이 형님, 그래도 여기 좀 더 있어야죠, 하며 엉덩이를 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졸업 작품을 준비한다는 음대 출신의 예비 제수씨는 어디 SNS에 나오는 유명한 모델마냥 고운 분이었다. 맹 서방이 이래저래 결혼 준비의 어려운 점을 토로하기에 나는 그저 말해주었다. 삶이 원래 번잡스러운 것 아니겠냐고, 그 번잡스러운 삶을 둘이 맞추려니 원래 더 어려운 것 아니겠냐고, 준비부터 힘을 빼면 실제 결혼 생활은 더 힘들 수도 있으니까, 항상 힘을 빼고 무엇이든 그럴 수 있다고, 무슨 일이든 다 있을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사는 것이 제일 좋다고 말해주고 말았다. 소주잔을 비울수록 몸은 아프지 않아서 신기했다. 당장이라도 태권도 한두 시간도 문제 없을 것 같았다.
돌아오는 길에 맹 서방이 형님 혼자 다 돈 내서 미안하다며, 부득불 형수 먹이라고 회를 싸서 손에 들려보내주었다. 바다 내음 폴폴 나는 검은 봉지를 휘두르며 기분 좋게 버스를 탔다. 술을 마시면 언제나 기분이 즐겁다. 나는 기분 나쁜 술은 일부러 마시지 않는다. 당나라의 어느 벼슬아치는 생선을 무척 좋아하여 온갖 청탁과 뇌물로 생선이 많이 들어왔지만 전부 거절하며 말했다. 벼슬살이 잘 하고 있으면 내 돈으로 얼마든지 생선을 사 먹을 수 있는데, 무엇 하러 위험한 뇌물을 받는단 말인가? 그러므로 나는 기분이 나쁠 때 술을 마시지 않는다. 사람을 상대로 맞서기도 하지 않는다. 대신 헤비백을 치거나 틀 연습을 하며 땀과 열을 뺀다. 그러니까 사실 알고 보면 이번 달의 적은 급여도 나에게는 '있을 수도 있는 일' 이었고, 그렇게 기분 나쁜 일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내 역시 조금 서운해하긴 했지만, 열심히 일했는데 어쩌겠냐며, 여보뿐만 아니라 회사 전체가 그런 일인데 신경쓰지 말자고, 이번 달은 지출이 많긴 하지만 우리가 좀 더 아끼자며 위안하였다.
그러므로 강호를 웃으며 주유했던, 화산파의 대제자 영호충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내공이 뛰어나 숨 한 번 들이켜 한 독의 술을 비우고, 정파와 사파를 가리지 않고 천하영웅 호걸협사를 두루 사귀던 그는, 절세의 검법 독고구검을 깨우쳐 당대의 절정고수가 된다. 독고구검은 세밀하게 정해진 초식이 없고, 오로지 검이 다가오면 검을, 창이 다가오면 창을, 권이 다가오면 권을 깨는 다섯 개의 방식으로만 구성되어 있는데, 상대의 초식에 따라 천변만화하여 그 자유로운 변화를 누구도 좇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나 역시 독고구검처럼 무엇이 다가오든 그렇게 마음을 비우고 준비하고 있어야할 모양이다. 맹 서방에게 결혼 생활에 대해 자랑스레 떠벌렸듯, 내 스스로의 삶도 그렇게. 어제도 그렇게 술을 오래 많이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