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적을 곳이 없어서(짧은 끄적임)

ITF 번외편 ㅡ 감정의 여운이 남는 날에는

by Aner병문

군대 시절부터 이미 사회생활하리라 생각도 못했고 어울리지도 않았던 나는 본디 학교에서 철학을 오래 공부했다. 한창 청운의 꿈을 품고 공부하던 시절에도, 예나 지금이나 말만 많았을 뿐, 타인을 헤아리기보다는 책 읽는 내 스스로에게 집중했으며, 그런 나를 타인에게 우겨넣기 바빴다. 태권도의 틀이나 권투의 섀도우가 상대와의 공방을 상상하며 훈련하지만, 늘 실제와는 다르듯, 학교를 벗어나 늦된 나이에 사회로 뛰어들어 스치는 모든 이들 또한 책과는 달라 나는 작은 상처를 받고 큰 상처를 주곤 했다. 여전히 사람을 상대하는 일을 하며 불혹을 앞두고 있으나 어리고 젊은 날의 업보인지 생각지도 못한 감정의 여운을 집까지 끌고들어오는 날이 많다. 이런 날에는 술을 마시면 나를 놓칠까 위험하고, 훈련을 하려니 손끝까지 닳는 기분이라 그냥 멍하니 아내 어깨에 기대어 앉아있다 누웠다. 새벽 내내 헝클어진 마음이 부산스러워 새벽 서너 시에 기어이 자다깨다 일어나 앉았다.



해가 뜰 무렵부터 틀과 발차기, 맞서기 연습, 시범단 모범 맞서기 연습, 근력 훈련, 유연성 마무리 운동까지 꼼꼼하게 몸을 썼다. 틀 연무를 하면 책을 읽듯 다른 세상으로 가는 기분이라 좋다. 오늘은 백신 2차 접종인지라 또 한이틀 앓아누울테니 허벅지 근육이 굳어 쥐가 날 정도로 땀을 뺐다. 내시경 후 백신을 맞을 예정이라 했더니 내과 병원의 간호사 선생님은 기함을 하며 말리고, 일정을 옮겨주셨다. 백신이 아니라면 나는 오늘 저녁에도 술을 마셨을 터이다. 세상에 병원 예약 옮기듯 쉽사리 조절되는 일이 그리 많지 않아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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