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백, 좌백무협단편집, 새파란상상, 2012.
대륙과 반도, 바다를 통해 유불도儒不道 를 비롯한 갖가지 사상과 문화를 독자적으로 갖춘 일본에 비해 전통의 뿌리가 깊던 한국과 중국에는 무협지가 비교적 강하게 정착했다고 들었다. 신필 김용 선생의 작품을 제외하면, 무협지를 출간하는 곳은 중국 본토의 작가들이 공산당의 압제를 피해 찾아온 홍콩이나 대만 정도일 터이다. 판협지(Fantasy+무협지?! 아아, 묵향..그립읍니다..?!)를 거쳐 웹무협 이라는 이름으로 변화해가는 한국이나 선협(仙俠 : 도술과 무협을 접목시킨 서사물)소설이 인기를 얻는 중국처럼, 이제는 '말랑말랑하고 읽기 가벼운' 무협지들이 주를 이루게 되었다. 그나마 최근에 읽은 무협소설은, 국내 만화계의 애국자, 4남매 출산에 달하시는(애 낳고 살아보니 육아고수가 천하제일고수다) 김인호 선생이 만화로 다시 그리신 장씨세가 호위무사 정도다. 이제 김용 선생처럼 동서고금을 아우르는 웅혼한 서사와 필력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라고 넋두리를 한다면, 그조차도 요즘엔 무武틀딱, 그러니까 무협지 틀딱이라고 욕먹는다나 어쩐다나.
일제강점기 이후 조금씩 유입되기 시작한 중국 무협지의 번역판으로 국내 무협시장에도 생기가 돌기 시작했지만, 이른바 대본소 만화들처럼 당시의 무협 작가들 역시 '사무실에서 짜주는' 서사를 가지고 글을 쓰는 이들이었다. 하나의 직업을 대물림하는 일본에 비해 과거 제도를 오랫동안 운용했음에도 여러 가지 사회적 장애에 막혀 출세하기 힘든 이들의 꿈을 대변했던 문학이 바로 무협지라는 이론이 있는데, 얄궂게도 1980년대까지의 무협소설가들 또한 그러했다고 들었다. 대작을 써내어 안정적인 수입을 얻는 무협작가들도 적지 않았고, 심지어 명문대에 다니면서 글을 쓰는 이들도 적지 않았지만, 대부분은 일당직처럼 하루 벌어먹고 살기 위해 사무실에 틀어박혀 노골적인 성애와 폭력이 점철되는 무협을 써내었고, 그들 중 또 일부는 이미 이른바 '순수문학' 의 벽을 넘지 못하고 그래도 글을 쓰고 싶어 무협지로 방향을 바꾼 이들인지라 또 한번 참담한 심정을 느껴야했을 터이다.
90년대 들어서야 PC통신을 통하여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는 시대' 가 개막했고, 그 유명한 이영도 선생의 드래곤 라자, 가 개막했듯이 용대운 선생- 통칭 용 노사의 태극문이 뫼 출판사에서 출간되며 역시 인기를 끌었다. 무협의 기치를 한 단계 높여보자는, 이른바 신무협의 바람은 마침내 왼쪽으로 삐뚜르게 자라는 잣나무를 자처하던 작가, 또다른 무협작가 진산 선생의 배우자이시기도 한 좌백左栢 선생을 발굴하게 된다. 한국 신무협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좌백 선생은 (비록 그 경력에 논란은 있으나) 팔괘장의 한국 전인이자 다양한 무공을 섭렵한, '고수를 찾아서' 의 저자 한병철 박사와도 막역한 지우로 알려져 있다. 나는 그의 글을 몇 편 읽긴 했으나 문체가 썩 내 취향은 아니라서 다소 실망하기도 했었다. 전지적 작가 시점(쇼 프로그램 말고)에서 작가는 서사와 독자 사이를 적극적으로 중개하며 설명하지만, 결코 스스로를 잘 드러내지 않는 균형미가 있어야 하는데, 좌백 선생의 글은 때때로 화자로서의 작가가 지나치게 독자에게 다가오는 듯한 느낌이라 낯설었다. 마초적인 감성이 그득한 무협지에는, 김용이나 용대운 선생처럼 다소 메마르고 건조한 문체가 맛이 난다.
다만 오래 전 네이버 문학에서 읽었던 '협객행' 의 향수 때문에 나는 어렵게 이 책을 사다가 구해 읽었다. 소설의 처음을 열고 끝을 장식하는 시선詩仙 이백의 싯구도 그렇지만, 대형 이라 불리는 한 중년 고수의 숨겨진 젊은 시절, 그 비감함과 안타까움이 참을 수 없이 좋아서 오로지 그 단편 하나 때문이라도 사서 읽었다. 내가 기억하는 네이버 문학본의 내용과 출판본의 결말이 많이 달랐는데, 알고보니 따로 수정과 첨삭을 하시었다. 개인적으로는 네이버 문학본이 그 쓸쓸함이 더하여 좋다. 이막수가 없다면 양과와 소용녀의 사랑이 덜 할 것이고, 내공이 전부 소설되어 모멸감을 겪지 않았더라면 영호충의 입신양명이 그토록 극적이지 않았을 터이다.
좌백 선생은 네이버 문학본에 한 번 더 실었던 '호랑이들의 밤' 또한 단편본에 함께 출간했다. 이 내용은 내 기억으로 수정되지 않은 원본이다. 누구 말마따나 총을 들고 단추만 누르면 미사일을 쏠 수 있는 세상, 거리에 시비가 붙어 누군가를 때리면 내가 돈을 물어주어야 하는 세상, 의협義俠을 말하기보다 금전과 이득을 우선시하는 세상에서 태권도를 훈련하고, 옛 사상을 말하는 일은 지나치게 고리타분한 일일지도 모른다. 소설 속 기자며 도검장刀劍匠이며 사범 역시 '깊은 산 속 낚시질은 불법이다' 라는 소소한 세상의 규칙조차 모르면서, 12년마다 한번씩 찾아오는 호랑이 해, 달, 날, 시 를 맞춰 사인검四寅劍을 만들고자 운때를 손꼽아 기다리고, 기술을 연마하고, 하룻밤을 꼬박 샌다. 멸종된 한국 호랑이들에게 이제는 시대에 퇴락해보여도 지켜야할 무언가를 위해 몰두하는 사내들을 빗대면서 좌백 선생도 그렇게 산다. 나 역시도 그렇다. 다른 재주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