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적을 곳이 없어서(사는 이야기)

천재 유교수.. 아니 그냥 가정주부의 생활..ㅋㅋ

by Aner병문

갑작스레 아내가 광교로 오라고 하시어, 뭔 광교인가 했다. 광교라고 하면 가본 적도 없으려니와 생각나는 거라곤 황석영 선생의 강남몽에서 '을집니다!' '여기가 광굔데 씨발 무슨 을지로라고 그래?' 이 대사밖에 기억나지 아니한다. 갑자기 웬 광교인가 싶어 퇴근하자마자 지하철을 세 번씩 갈아타가면서 생면부지의 도시로 향했다. 신도시가 원래 그렇듯, 사람이 살기 좋게 깍뚝깍뚝 정돈한 구획과 쭉 뻗은 도로하며 곳곳마다 보이는 외제차가 낯설었다. 아내는 뒷좌석에 어머니와 아이를 태우고 오시었다. 아니, 근데 뭔 갑자기 말도 없이 광교여? 안전벨트를 매면서 물으니 아내가 웃는다. 어머이가 유모차 사주신다 안합니까, 그래가가 드라이브할 겸 쉬잉 나왔지요, 요즘 애도 않고, 웬만한 건 다 인터넷으로 사고 하이까네, 유모차 매장 이런게 마이 없습니데이, 젤 가까운데가 광교라서 그래도 함 보고 살라꼬 겸사겸사 나와봤으요. 어머니는 우리 부부가 얘기하거나 말거나 아이를 안고 어르시면서 노느라 정신이 없으시었다.



광교의 아울렛으로 도착해 2층 매장으로 가니, 과연 입구부터 어머니 연배의 노부인들이 다들 아이를 안고 벙긋벙긋 웃으시고 계신다. 애를 안 낳는다곤 해도 매장이 많지 않은 탓인지 다양한 연령층의 부부들이 아이와 함께 하고 있었다. 유모차는 물론이고, 욕조, 장난감, 침대, 기타 다양한 도구들이 즐비한 곳이었다. 어머니는 벌써 아이를 안고, 동년배의 부인들과 벌써 한담을 나누며, 아이고, 그 집 아이는 몇 살이어요, 젖은 뗐는가? 이러고 계시었다. 나느 아내의 손을 잡고 유모차 매장으로 들어갔는데, 가격도 가격이지만 젊은 남자 직원들이 역시 젊은 부모들을 붙잡고 경쟁적으로 유모차를 파는 모습이 그야말로 외제차 매장을 방불케 했다. 적당한 선에서 하나 보여줘요, 하자마자 잘생긴 남자 직원이 내 손을 잡아 끌었다. 자, 아버님, 이 쪽으로 오세요. 그 가격에는 보통 이 두 종류가 무난한데요, 아시다시피 유모차에는 휴대형, 절충형, 디럭스 이렇게 세 가지가 있거든요, 디럭스는 튼튼하긴 하지만 너무 무겁고, 휴대형은 가볍고 편하긴 하지만 솔직히 몇 번 접다보면 좀 불안해하는 분들도 계세요, 절충형이 말 그대로 그 중간쯤 있는 제품인데, 이 제품이 굉장히 잘 나갑니다. 무슨 토니 스타크 아이언맨 되기 전 무기 팔아먹듯 유려하게 설명을 마치더니 힘줄이 울퉁불퉁한 손으로 유모차를 착착 빼고 접어서 시연까지 해주었다. 오죽하면 아이 한 번 태워봐야 한다며 까다롭게 하시는 우리 어머니조차 유모차 전문가인 그의 입담에는 스르륵 녹아내릴 정도였다. 아니, 그래서 이게 좋은 거여, 아닌거여? 미심쩍어하시는 우리 어머니께 손을 활짝 펼치며, 어머니 그냥 이게 1등이에요, 1등, 이게 어느 정도 잘 나가냐면요, 지금 주문하셔도 공장에 요청 넣어야 되는거거든요, 솔직히 이 가격에서 그렇게 잘 나가는 건 이 제품밖에 없어요. 아들딸 자부사위에게는 몰라도 손자손녀에게만큼은 '1등을 주고 싶은' 어머님의 핫트 직격~! 겟또다제~~ (너무 나갔나? 요즘 인싸 화법 연습 중이라..ㅋㅋ) 1등 유모차라는 말에 주저없이 어머니가 가격 흥정도 않으시고 유모차를 사신 것 또한 유머. 그래서 유머ㅊ...읍읍.



운전이 서툰 탓에 돌아오는 길에도 당연히 아내가 운전했다. 아내의 얼굴에는 그때 이미 짙은 피로가 깔려 있었다. 일전에도 말했듯 아내는 내가 오기 전까지는 간단한 주전부리로 버틸 뿐, 밥을 잘 챙겨먹지 못한다. 그런 상태에서 왕복 2시간 운전을 했으니 지칠법도 할 터이다. 일단 서둘러 어머니를 배웅하고, 아이를 받아들어 재웠다. 늘 똑같은 하루와 달리, 차에 실려 멀리까지 다녀온 여파 때문인지 아이는 웬일로 꽤 늦게까지 자지 않고 엉엉 울며 버티었다. 아이가 빠르게 잠들 수 있도록 불을 꺼놓고 헤어 드라이어 소리를 틀어놓은 어두컴컴한 집에서 아내는 늦은 저녁을 먹고 그대로 올라가 잠들어버리었다. 아이를 재운 다음에야 나도 비로소 집안 쓰레기를 정리하고, 유아 물품들을 삶고, 설거지하고, 밥을 새로 안치고, 클래식을 틀어놓은 채 빨래를 정리하고 나니 벌써 시간은 10시가 가까웠다. 그새 술을 제법 많이 마신 도장 사매들이 전화를 해왔다. 뭘하고 있냐고 해서 선풍기 틀어놓고 빨래 정리한다 했더니 애 아버지 다 됐네~ 한다. 아직 젊은 처녀들이야 비도 부슬부슬 내리겠다 즐거운 밤일 터이다. 나도 총각 시절에는 원없이 땀 빼고 술 퍼마시며 밤을 새우던 시절이 있었다.




어서 빨리 도장도 나가고 진득하게 책도 읽고 싶고, 벗들이랑 술도 한 잔 꼴깍 기울이고 싶은데, 비 오는 밤도 그렇게 시간이 지나가버리었다. 3차는 안양 우리 집 앞에서 하라고 도장 사매들을 넌지시 꾀어보았지만 언니한테 무슨 소릴 들으려고! 하며 오지 않겠다 하여 몇 잔 더 하라고 용돈 조금 보내고 말았다. 돈 씀씀이가 커진 것은 오히려 결혼하고 나서다. 총각 시절 나는 빚을 갚고 사느라 너에게도 늘 얻어먹었고, 도장 후배님들에게 제대로 된 사형 노릇 한 번 하지 못했다. 사범님은 늘 내가 입만 달고 회식에 오는 것을 눈감아주셨고, 너는 오래 전 친구들과의 밥 자리에서, 자신이 밥을 사도 상관없지만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오해할 거라며 너가 계산하라고 지갑에 돈을 넣어준 적이 있다. 한신은 출세하기 이전 시장 할머니에게 밥을 빌어먹었고, 무뢰배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갔다. 소진과 장의는 합종연횡으로 중국 대륙을 호령하는 외교관이 되기 이전, 모두 집에서 무시받던 취업준비생들이었다. 세자리아 에보라는 오십이 넘어 데뷔하기까지 술과 마약에 찌들어 하루 노래 불러 하루 먹고 사는 비참한 삶을 살았다. 허경영은 고교 시절 호떡 2개로 하루를 버티며, 아 잠깐, 이 사람은 아닌가. 좌우지간 나는 겨우 결혼으로 삶의 틀을 잡고, 이렇게 몇 푼으로 옛 빚을 갚고 있다. 밥 잘하는 유진이는 그럴 바에야 어서 빨리 도장에 나오라고 성화이고, 너는 이제 다 갚았다며 늘 만류한다.





마음과 관계없이 세상은 흘러간다. 가정주부도 군인처럼 집에 매여 바깥 세상을 동경만 할뿐이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할 것도 많은데, 해야할 일들을 먼저 하고 나면, 밤은 이미 져서, 내 삶의 끝에 훨씬 가까워진 기분만 든다. 빅 올때마다 온 몸이 참을 수 없이 쑤셨다. 그러나 마음이 더 쑤셔서 너에게 전화했다. 정말이지 이웃집 애 엄마랑 통화하듯 너와 백 분 동안이나 오래오래 수다를 떨었다. 정말이지 이시국에 가장 건전한 외간남녀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하루의 허망함을 가끔은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내는 일찍 일어나시어 달걀을 삶아주고, 찐 호박과 브로콜리를 건네주시었다. 가끔은 아내에게 내가 큰 버팀목이 못 되는 듯한 늘 미안하고 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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