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편 - 술과 백신은 3차까지면 족한 듯하다.
2차 백신까지면 어데든 다니는데 크게 불편하지 않을 줄 알았더니, 3차까지 기어이 맞으라 한다. 하기사 길어야 동양은 갑을병정, 서양은 알파 베타 델타 감마, 하나 추가하여 오메가만 알면 될 줄 알았더니, 오미크론이라는 듣도보도 못한 글자도 있다 한다. 그러므로 아는게 힘인가. 한 가지 분명한 건, 열 개의 천간과 열두개의 십이간지를 넘어서, 그리스 문자 스물넉자까지 덤으로 다 외운다 한들, 백신의 아픔은 누구도 예상치 못하리라는 점이다. 감히 안타깝게 돌아가신 분들을 농담삼아 입에 올릴수는 없으려니와, 또 한 가지 확실한건 1차보다는 2차가 더 아팠고, 2차보다는 3차가 더 아팠다. 그러므로 술과 백신은 그 후유증마저 비슷한가 하여 끙끙 앓는 와중에도 웃고 말았다.
여간해서는 회사를 쉬는 성격이 아닌데, 그예 연차까지 쓰고 쉬고 말았다. 이래서야 연차 굳이 쓰지 않으려고 일하는 당일에 백신을 맞은 보람이 없다. 워낙 부서에 사람이 없어 팀장님 허락 받고 점심 시간에 잠시 나가 백신 맞고 돌아왔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금방 맞고 돌아올 줄 알았더니, 웬걸, 질병관리청 홈페이지가 말썽이라며 간호사 선생님은, 조금 오래 기다리셔야할 거 같다며 난처한 표정이었고, 그마저도 일반병원이라 무조건 밀려드는 백신 접종자만 돌볼 수 없으니, 백신 접종자 하나에 일반 환자 셋- 이런 비율로 진료를 보시는 모양이었다. 간호사 선생님 한 명에 의사 선생님 한 명이 서로 왔다갔다 쉴새없이 종이 뽑고 주사 준비하고 전화받고 짬짬이 손 소독하느라 몸이 백개라도 모자랄 듯 했다. 내 이럴 성 싶어 연차 쓰고 맘 편히 주사 맞으려 했건만, 업무 보는 도중에 나왔으니 좌불안석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팀장님은 그럴 수도 있다며 너털웃음이셔서 다행이었지만, 좌우간 당일은 백신 맞고 돌아와 연말정산 마무리 하느라 거의 반나절을 날렸고, 그 다음날은 휴무였으며, 휴무 다음날 아침 역시 끝내 몸이 무거워 나는 몸보다 더 무거운 마음으로 팀장님께 어렵사리 전화를 드렸다. 다행히도 평소 근태가 좋아서 무사히 연차 쓰는 것으로 넘어갔으나, 동료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이었다. 부서가 부서인만큼, 안 그래도 사람이 적은데 한 사람 빠지면 태가 날 수 밖에 없는 곳이라 더욱 그러했다.
몸은 오늘, 그러니까 백신을 맞은지 4일째 되어서야 겨우 가눌만하였다. 백신 맞은 첫 날은 몸살기가 서서히 오더니, 둘째날은 관절통이며 근육통이 뻐근하게 온 몸을 뒤흔들었고, 셋째 날은 내가 제일 싫어해마지 않는 메스꺼움과 두통이 동시에 왔다. 총각 시절에는 하도 예민하고 걱정이 많아 편두통을 달고 살았는데, 편두통이 몰아치면 아픈 것보다도, 이 편두통이 가라앉을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이 더욱 싫었다. 비슷한 맥락으로 그래서 나는 숙취도 싫다. (그럼 술을 안 마시면 될거 아니냐...;;) 여하튼 넷째 날이 되어서야 겨우 나는 살만하였다. 물론 3일 동안 주로 침대에 누워 있긴 했으나 그렇다고 하루 종일 누워만 있진 못하였다. 간호과를 전공하고, 간호사로도 일했었던 아내는 나보다 의료에 훨씬 전문이었으므로, 누워만 있으면 더욱 진이 빠지고 아프다며, 때 되면 밥을 챙겨 먹였고, 또한 육아를 조금이라도 돕게 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아내 혼자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들이었으므로, 나는 아내의 처방에 따라 시간맞춰 타이레놀을 먹어가며 겨우겨우 몸을 가눴다. 솔직히 아내가 훨씬 힘들었을 테지만, 나는 그 때 아비로서의 내 자신도 무척 깊이 실감하였다. 자식을 사랑하기에, 부모는 기꺼이 제 몸과 시간을 바치며, 또한 그렇기에 부모는 때때로 자식에게 기대를 넘어선 '대가' 를 바라기도 한다. 나는 내 벗들이 나를 걱정하듯, 내가 그러지 않기를 늘 스스로에게 바랐다.
그래도 아내는 이럴때라도 쉬어줘야 한다며, 평소 일할때를 제외하면, 술 마시고 책 읽고 도장 다니는 나에게 많은 잠을 허락해주셨는데, 잠도 하루 이틀이지, 결국 나는 많은 망상을 했다. 책을 읽으려고 눈을 치뜨면 골이 쑤시고 아파서, 나는 눈을 감은 채로 많은 생각을 했다. 일단 정말이지, 이번 술자리 끝에서 날아간 기억이 부끄러워서, 나는 좀 술을 줄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연말연초가 제법 고되었어서, 많지 않은만큼 깊은 벗들과 늘 예정했던 자리가 밀린 탓이었는지, 나는 그 날 빈 속에 사십도 짜리 독주 세 종류를 과음했고, 덕분에 기억이 좀 날아갔다. 아내는 내가 멀쩡해보였는데, 아내가 부탁한 일을 제대로 못하는 것을 보고는, 이 사람도 주량이 있긴 있구나 하고 놀랐다고 했다. 큰 일은 아니었지만, 나는 내가 팥빙수를 사왔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고(술 마시고 나면 늘 냉면 아니면 팥빙수를 먹는 버릇이 있음), 털보 형님에게 9분짜리 통화를 한 사실을 기억 못해서 나는 아직까지도 부끄럽다. 화개반 주미취- 다산 약용 선생의 말씀처럼, 딱 그 정도가 좋은 것이다. 나는 은근히 울화도 있는 사람이라, 내 스스로를 취기에 지나치게 놓아두고 싶지 않다. 그래서 아내와 나는 사십도 이상의 술은 최대 2병까지만 마시자고 다짐해두었다. 아내 입장에서는 솔직히 이 정도도 엄청 양보해준 터이라 고마웠다.
또한 회사에서 혼난 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회사에서 고객들을 대할 떄 나는 늘 내 말이 빠르다고 핀잔을 들었다. 한편으로는 '화이팅' 이 넘치고 신이 나서 좋아보이지만, '부탁드립니다' 라는 말을 끝맺자마자 곧바로 내가 원하는 질문을 하거나, 무언가를 물어보는 버릇에 대해 나는 여러 번 지적을 들었다. 팀장님은 '병문 씨가 부탁한담서요, 근데 그 부탁을 들어줄 시간을 안 주면 어쯔지요?' 하고 웃고 마셨다. 짱뚱어가 맛있기로 유명한 지역 태생인 팀장님의 억양은, 때때로 어머니를 생각나게 했었다. 그 때 나는, 내가 생각하는 '부탁' 에 대해 되짚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부탁을 하면서 과연 그 것을 부탁이라고 생각했던가? 나의 화법은, 늘 자상하고 부드러워보이긴 하지만, 여전히 내 스스로의 고집과 울뚝밸이 있지는 않던가? 공자께서는 유학의 가르침은 '서(恕)' 한 글자에 있으므로, 결국 상대와 나의 마음(心)이 같음(如)을 헤아리는 것이라 하셨는데, 나는 늘 타인을 헤아리고 있었는가, 부끄러웠다. 나는 이불 속에서 이틀 밤 사흘 낮을 오랫동안 꼼지락거렸다.
나흘째 낮이 되어서야 어느 정도 정신이 돌아와서, 아내의 때꾼한 얼굴이 참으로 가슴아팠다. 내가 최선을 다해도 아내는 혼자만의 시간이 길므로 늘 힘들 터이다. 아내가 은근히 '여보야 오늘도 몸 좀 쉬게 잘 낍니꺼, 아이모 내캉 같이 나가 소은이 노는것도 좀 보고 커피도 한잔 하고 할랍니꺼?' 하기에, '아따, 당연히 나가야제, 나도 좀이 쑤시고, 울 딸랑구 노는 것도 좀 보게잉.' 했더니 그렇게 좋아할 수 없었다. 아내는 내가 골골거릴 동안 낮에 푹 자라고, 백신을 2차까지 미리 맞아두고, 아이를 데리고 늘 2시간씩 놀이방에서 놀다 왔었다. 어느 틈에 쑥 커서, 제법 아비와 어미의 손을 잡고 타박타박 걸을 줄도 알게 된 딸을 데리고, 근처의 건축박물관과 또 도시의 향토박물관을 다녀왔다. 한국 건축의 아버지라 불릴만한 큰 인물에 관한 이야기를 알았고, 또 내가 사는 도시가 다시 한 번 어떤 역사를 지녔는지도 대략적으로 알게 되었다. 나는 유기농업 시절부터, 외딴 도시를 가면, 늘 그 곳의 특산물을 먹어보고, 관광지를 가보고, 박물관도 꼭 들른다. 박물관은 그 도시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알게 되는 귀중한 곳이다. 아내는 늘 나더러 가끔 별스럽다 한다. 껄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