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 철학VS철학. 신/구판 - 대선을 앞두고 철학과 정치를 중심으로
강신주, 철학VS철학, 그린비, 한국, 2010, 구판
동 저, 동 제, 오월의봄, 한국, 2016, 개정완전판
도장의 명감독 꿈나무 십대 소년 이 감독도 그렇고, 가끔 나에게 '철학이 궁금하긴 한데 너무 방대하고 어려워서 어떻게 흐름을 짚어야 할지 알 수 없어요. 좀 쉽게 전체적으로 설명해주는 책이 없나요?' 물어보시는 사형제 사자매들이 있다. 좌우간 '서울의 비교적 이름난 학교' 에서 오랫동안 철학을 공부해왔고, 늘 수다 떨다가도 가끔 뭔가 '그럴듯해뵈는' 말을 하기 때문일게다. 나 역시 그랬고, 철학뿐 아니라, 과학, 문학, 미술, 음악, 무엇이든 인간의 역사- 즉 시대적 흐름에 따른 변화를 대략적으로나마 훑어보고 싶은 열망은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다. 사실 역사 그 자체가 영원한 미완의 학문이며,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 (어느 소설가는 '것' 이라는 대명사를 쓰는 행동 자체가 스스로가 알고 있는 어휘의 빈곤함을 드러내는 꼴이라며, 자신의 저작에 한번도 '것' 을 쓴 적이 없다 자랑하시기도 하지만...) 아닌가.
그 방대한 양만 아니라면, 또 아무래도 입문서로 채택하기엔 비교적 까다로운 철학의 고유한 단어를 많이 사용하긴 하셨지만, 늘 날선 말로 대중들에게 인기를 끄는 '거리의 철학자' 강신주 선생의 철학vs철학 은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그러한 열망에 가장 꼭 들어맞는다. 헤겔의 표현대로 '시대정신' 을 표현할 수 있는 동서양 철학자들을 엄선했고, 그 주제에 입각하여 서로 대별되는 철학자들의 핵심 주장을 잘 실어넣었다. 연구자로서 그 주 전공인 노자와 장자 해석은, 차라리 독특하다 할망정 지나치게 협소하여 합리적이라 보기는 어렵고(물론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다.), 노숙자는 자존심을 버린 인간이라느니, 혼밥은 인간의 식사가 아니라느니, 다소 과장된 언어를 쓰시긴 하지만, 철학적 시 쓰기 시리즈를 차치하고서라도, 이 책만으로도, 강의자로서의 그의 열망과 노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싶을 정도다.
나는 구판 책을 젊었을때 어렵게 사서, 매해 조금씩 읽어왔고, 결혼하고 나서는 장모님께서 사주셔서 신판까지 갖추어 읽었다. 늘 술 사 마시고, 길거리에서 시비붙고, 각종 무관이며 체육관에서 거칠게 배웠던 기술을 보여주고 싶어 안달이던 젊은 시절, 내 옆구리에 늘 끼어있던 책들도 결국엔 삶에 질박하게 투영한다기보다 그저 책 읽는 내 스스로에게 도취되었거나, 취한 와중에도 책을 읽는 내 스스로를 자랑하고 싶은 맥락과 같았었다. 하물며 처자식을 건사하는 와중에는, 이 두꺼운 2권의 책을, 총각 시절처럼 진득히 읽을 수 있는 틈을 내기 쉽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이택후의 중국철학사상사론 3권을 읽었을 때처럼, 네루의 세계사편력을 읽었을 때처럼, 매일매일 아주 조금씩, 하루에 한두 장이라도 읽는 방식으로 바꾸어 한 해를 할애해나갔다. 대학을 들어가서야, 그토록 싫었던 수학이 철학과 맥이 통함을 알고, 뒤늦게 수학의 정석을 다시 들여다보았지만, 역시 늘 집합 부분만 새까맣던 기억이 나서, 어느 해는 중간부분부터 시작하기도 했고, 어느 해는 마지막 장부터 시작하기도 했다. 그래서 사실 몇 해를 반복해서 읽어 지저분해지긴 했어도, 내가 원하는만큼 '이 책은 적어도 이런 내용이다' 라고 파악되는 내용이 없어 약간 초조하기도 한 터였다.
올해는 아내가 비교적 일찍 처가로 쉬러 갔고, 그 기간도 길어서, 비교적 긴 시간을 잡고 마음껏 읽을 수 있었다. 회사는 늘 그렇듯 빡빡한 삶의 현장이었고, 도장은 오로지 몸으로부터 출발하고 사유하는 공간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늦은 밤에 물 한 잔 떠놓고(진짜 아내와의 약속도 있고 해서 혼자 술 마시면서 책 읽는 버릇을 그만두었다), 사과 한 알 먹으면서 강신주 선생의 책을 읽었을 때, 나는 강팍하고 엄밀한 성격의 강의자가 보여주는 너른 동서양 세계에 흠뻑 빠졌다. 비로소 나는 강신주 선생이 이 너른 철학사의 흐름에서 보여주고 싶은 커다란 맥락 두 가지를 겨우 읽어내었다. 철학이란, 하나는 전체(사회)와 개체(개인)의 싸움이었고, 또 하나는 시대적 흐름의 축적(고전적 역사관) 을 신뢰하는 축과 혹은 그 단절을 주장하는(패러다임 내지는 유물론적 역사관) 축의 대립의 역사였다. 그러므로 강신주 선생이 그 제목을 '철학vs철학' 으로 도발적으로 지었듯, 결국 모든 철학자들은 본인이 생각하고 파악하는 세상이 있으며, 그 세상을 구현해내기 위해 끊임없이 충돌하고 논쟁했던 것이다.
일전에 곽 선생과 '과학시대에서의 철학' 에 대해 잠깐 논쟁한 적이 있으며, 그 논쟁은 서울 북쪽에서 너의 집에서 만나 더욱 길게 이어졌다. 오후 2시부터 시작해야 다음날 새벽 1시까지 이어지고도 아쉬웠던 그 자리에서, 나는 오랫동안 '철학에서 개념짓는 시간' 에 대해 적잖이 취해 떠들었는데, 그 때 너는 '진짜 몇 년 동안 그 소리 하는거야, 그 때 한 마디도 못했던게 분하긴 분했나봐.' 하고 웃었다. 아닌게 아니라, 신혼 초에 너와 곽선생과 엄 군이 우리 집에 놀러왔을때, 아직은 코로나의 ㅋ 도 모르던 시절, 우리는 오뎅 바에서 늦은 3차를 갔다가 시간에 관해 논쟁했는데, 깊은 사고실험과 각종 도구로 외연을 확장하여 '시간' 에 대해 깊이 탐구한 물리학에 비해 내가 알고 있는 한 철학은 시간에 대해 깊이 사유한 내용이 없었다. 그 여름밤, 나는 한 마디도 제대로 못하고 '찌그러졌었고' 솔직히 그게 너무 분해서 정말로 서재에 있는 모든 책 뿐 아니라 다른 책들도 다 찾아봤었다. 하기사 그때부터 나는, 석사 학위 먼저 받고 현직 교사로서 끊임없이 공부해야 하는 곽선생과, 더이상 학교에 적을 두지 못하고, 단지 철학적 언어 형태로만 고객들을 대하며, 속세에서 책만 읽는 나와의 격차가 어마어마하게 벌어졌음을, 실감했었던 듯 하다. 여하튼 내가 아는대로 동양철학은, 시간은 자연의 흐름이자 주관이므로 탐구할 것 없이 받아들여야 '윤리적인 태도' 였고, 서양철학 역시 현상학을 통해 겨우 조금 고민의 태동이 움트다가 베르그송이 겨우 '지속' 이라는 형태도 인간 기준의 시간 판단을 달리 해온 것이 대부분이었다. 아마 이 때부터의 기억인지, 나 역시도 강력한 도구와 기술을 가지고 무엇이든 파헤쳐서 법칙을 정립해버리는 과학의 위력 앞에서, 철학은 정말로 뒷그늘로 밀려나 '응, 이 기술은 써야 되고, 이 기술은 안되고' 하는, 복덕방 노인마냥 윤리적 판관이나 하고 말아야 하는가 하는 불안감도 들었던 게다. (아니, 내가 근데 현직 철학자도 아니면서 이걸 왜 고민하는거지?ㅋㅋ)
김영식 선생의 저작을 읽으면서, 나는 과학과 기술이 전혀 다른 개념이라는 사실을 그때서야 알았다. 과학연구가 토대가 되어 기술은, 그 결과를 산업구조가 발전시켜 현대에 적용시키는 도구였다. 그렇다면 과학을 연구하는 과학자의 토대는 무엇인가? 무엇이 과학자라는 인간에게, 물질의 원리를 궁금케 하고, 우리가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미시와 거시의 세계를 상상하게 하고, 실험의 전제를 정해주며, 그 결과가 추동력을 선사하는가? 그게 바로 철학이었다. 철학이 결국 과학자를 만들고, 그의 상상력을 짜준다. 그렇다면 그 인간은 누가 다시 키우는가? 인간을 키우는 건 사회고, 또한 교육이다. 그러므로 철학이 과학처럼 학문의 개념이라면, 철학을 생산하는 구조는, 사회여야 한다. 그래서 철학은 사회와 떨어질 수 없었고, 조선의 정치가들은 모두 유학에 몰두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대선을 앞두고, 공교롭게도 신/구판의 서양편 마지막 장인 '정치' 에 관한 이야기는 흥미롭다. 강신주 선생은 슈미트와 아감벤을 대치시키면서, 적과 동지로서 구분되는 정치, 또한 정치에 참여하는 이와 배제된 이를 구분하는 정치- 즉, 경계와 배제로서 공포감을 심어주는 정치에 대해 논했다. 지난 정부와 이번 선거에서 유독 다들 느끼겠지만, 대의민주주의는 우리의 뜻을 대변하는 민주주의라고 결코 할 수 없다. 민주주의의 꽃이라던 선거는 인기영합주의 사생활 논란거리로 전락했으며, 랑씨에르의 지적처럼 대의민주주의는 그저 우리가 마음에 들지도 않는 대표자에게 다수의 논리로 우리의 권력을 일정 기간 임대해주는 또다른 형태의 지배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의 대통령 후보들이 생각하는 언어와 사상과 정책이 유권자들에게 심히 동떨어지게 느껴지는 것처럼, 혹은 어느 한 정당에 속하거나 정치에 참여해야만 비로소 사회를 살아갈 자격이 있는듯이 호도하는 것처럼, 현대의 정치는 강압적인 방식으로 스스로를 이해하도록 국민을 몰아넣고 있다.
다시 말해 한국 현대의 정치는,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국민들과 유리되었다. 그렇다면 이 사회의 출발점은 어디에서 오는가? 나는 과학과 기술의 관계처럼 철학과 사회-정치의 밀접한 관계에 대해 말했다. 그래서 강신주 선생 역시 동양편 마지막 장을 다시 '한국에서 철학하기' 라는 내용으로 할애하며 국민교육헌장으로도 유명한 '민족주의' 박종홍 선생과 박동환 선생을 대별한다. 근대 한국사회가 해방공간에서부터 출발하였듯, 우리는 우리의 광복을 스스로 쟁취하지 못했고, 마찬가지로 '갑자기 주어진 서양식 사회' 에 대해 많은 학자들은 서양 사상과 그 사상을 안착시킬 수 있는 사회 경제적 구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강신주 선생이 이른바 '학문적 수입상' 들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던 그 역사가 지금의 한국 사회를 만들어오며 우리는 진정 우리가 원하는 정치와 사회의 형태를 만들지 못했다고 말한다면 너무 과한 해석일까? 며칠 남지 않은 대선에, 아직도 나는 어느 후보가 어떤 세상을 만들어나갈지 전혀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누구 하나 마음에 드는 후보가 없다.
모처럼 길게 적었으나 나 역시 남는게 없다. 이 두꺼운 책을 모처럼 '이어지는 기억으로' 오래토록 매일 조금씩 읽어서 기분이 좋은 건지도 모른다. 어차피 몇 달 지나면 또 잊을 터이다. 올해 말이나 다음 해 초에 나는 다시 이 책의 더러움을 조금 더 더할 터이다. 같은 이야기를 또다시 반복해서 읽고, 또 기억하고 애쓰다, 또 잊어버릴 것이다. 공부는 원래 그런 것이다. 아니, 사는게 원래 그런 건지도 모른다. 내 나이 서른 여덟. 지금부터 한 사십 년 더욱 태권도를 정진한다고 해도, 결국 삶의 끝에서 내가 찌르기 하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결국 다 잃고, 잊고 말 모든 것을 위해 우리가 유지하고자 애쓰고 노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자체가 삶을 채우는 행위이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