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나는 영어를 좋아했지만, 그리 잘하지는 못하는 그런 학생이었다.
토익 시험을 보면 700 중반정도 나왔던, 그런 수준이었다.
2006년 대학교 3학년 때 유럽 여행을 갔을 때도,
내가 할 줄 알았던 영어는 가기 전에 외워갔던 문장 몇 개와, I'm sorry 그리고 Thank you 가 전부였다.
국문과 단일 전공이었던 나는 영어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씩 취업에 필요한 스펙을 쌓아야겠다고 생각해 가던 2007년 봄.
나는 환경영화제 그린페스티벌의 기획팀 자원봉사자에 합격해서, 상암 월드컵 경기장에서 다른 학교 학생들과 함께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때 내 인생을 조금은 예상치 못했던 방향으로 비틀었던 두 가지 사건이 생긴다.
그린페스티벌은 해외의 환경 운동가들까지 초빙해서 진행했던 행사로, 자원활동가중에는 통역을 담당했던 친구들도 있었다. 이 친구들은 영어, 중국어, 일본어 등을 잘했기 때문에, 한 명씩 외국 방문객을 전담해서 도와주는 것이 업무였다.
하루는 혼자서 무거운 짐을 옮기는 게 힘이 들어서, 옆에 있던 통역팀 친구들에게 말했다.
"이것 좀 도와줄 수 있어요?"
"아, 저희는 고급인력이라... 그런 거 안 해요."
대답하던 친구는 농담조로 한 말이었겠지만, 그 순간 내가 느꼈던 당황스러움은 생각보다 컸다.
내가 할 수 있던 반응은 그저 웃으며 기획팀 친구들과 함께 하던 일을 계속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한 외국인이 내가 있던 곳으로 다가와 옆에 붙어있던 포스터를 가리키며 물었다.
"What does it mean?"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얼굴이 빨개졌고, 스스로를 고급인력이라고 했던 통역팀 친구들을 불러서, 그 외국인을 돕도록 해야만 했다.
이 두 가지 사건.
어떻게 보면 굉장히 작은 일이지만, 당시의 나에게는 충격이었고, 상처였으며, 그리고 무엇보다 커다란 부끄러움이었다.
그린페스티벌이 끝나고 얼마 뒤, 친한 친구 중 한 명이 캐나다로 어학연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친구는 대부분의 준비는 끝냈고 마지막 몇 가지만 체크하기 위해 유학원에 방문했었고, 같이 가자는 친구의 제의에 흔쾌히 따라나섰다.
의자에 앉아서 친구의 상담을 보는 와중에, 나도 한 번 상담이라도 받아볼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짧은 상담으로 순식간에 내 마음은 호주 시드니 어학연수, 기간은 4개월로 정해졌다.
1년이나 머무를 여유는 없었고, 6개월도 길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도움을 구하고 최종 허락을 받은 나는 본격적인 연수 준비에 들어갔다.
주변 친구들은, 졸업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 (두 학기만 더 다니면 졸업으로 3학년을 마친 상태였다)에서 휴학한다고 하는 나를 보며,
지금은 어학연수를 갈 때가 아니라 인턴이나 자격증을 준비할 때라고 조언을 했다.
하지만 그린페스티벌에서 느꼈던 당혹스러움과 부끄러움을 두 번 다시 겪지 않기 위해서는,
이번 기회에 반드시 영어를 해결해야만 했다.
그린페스티벌이 2007년 6월 초에 끝났고,
내가 호주 시드니로 떠난 건 2007년 9월 말이었다.
약 4개월의 시간.
이 기간 동안 내가 했던 건 3가지였다.
1. 영어 회화 학원 : 기본 회화 반에서 수업을 들었다.
2. Grammar in Use : 영문판으로 공부를 했다.
3. 네덜란드에서 한국을 방문한 네덜란드 학생들 대상 서울 투어 가이드
1~2번은 어학연수를 준비한다면 누구나 준비하는 과정이다.
3번은 조금 다르다.
친구의 어머니가 여행사를 하고 있었고, 그 여행사를 통해 네덜란드 명문대학 학생들이 서울에 방문했다.
서울 투어 겸, 한국의 몇몇 은행들을 방문하는 그런 과정이었는데, 친구가 혹시 나보고 서울 투어 가이드 같이 할 생각이 있느냐는 제의를 했다. (네덜란드는 네덜란드어가 있지만, 대학생들은 영어는 기본적으로 잘하고, 추가로 독일어/프랑스어/중국어/일본어 중 1~2가지 정도의 언어를 추가로 구사하는 경우가 많다.)
영어를 본격적으로 공부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연수 가기 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참여했다.
경복궁, 남산타워, 명동, 인사동 등을 함께 돌아다니며 간단하게나마 의사소통을 했었고, 이 경험은 나에게 많은 자신감을 주었다.
<서울 투어 가이드 당시 사진>
(이때 만났던 친구들은 페이스북을 통해 지속적으로 연락을 취해오다가, 6년이 지난 2013년에 내가 여름휴가로 네덜란드를 방문했을 때, 몇몇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특히 한 친구는 나에게 자신의 방을 내어주며 지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2007년에 대학생/대학원생들이었던 그 친구들은, 다시 만났을 때는 모두 대형 회계 법인, 투자은행, 금융 관련 정부 기관, 글로벌 기업의 재무 관련 부서에서 근무하거나, 아니면 자신이 회사를 창업하여 CEO 가 되어 있었다. 또한 네덜란드와의 이러한 인연은, 이후 내 커리어에서 네덜란드 대사관 투자진흥청 인턴 근무 등으로 확장된다.)
<2013년 여름 네덜란드 로테르담. 왼쪽은 네덜란드 대사관에서 만났던 친구, 오른쪽은 서울 투어 가이드 당시 만났던 친구>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고, 어느덧 2007년 9월 말이 되어, 호주로 떠날 시간이 되었다.
2007년 9월 말. 호주 시드니 도착.
유학원을 통해 알아본 홈스테이에서 한 달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공항에 픽업 나온 사람과 함께 바로 홈스테이 집으로 들어갔다.
시드니 외곽에 위치한, 백인 노부부가 살고 있는 그 집에는, 한국인 남자친구와 사귀고 있는 30대로 보이는 딸 하나와 커다란 개 두 마리가 같이 살고 있었다.
내가 머무를 방은 조금 춥긴 했지만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책상, 침대, 장롱 등 필요한 건 다 갖추어져 있었다.
한 달간의 홈스테이는 나름의 장점과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장점이라면, 영어만 쓸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는 것.
내가 들어온 후 며칠 뒤에 또 한 명의 홈스테이 식구가 생겼는데, 그 친구는 스위스 국적을 가진 달리기 선수였다.
(한국에 들어와서도 페이스북을 통해 종종 연락을 했었는데, 운동선수로는 끝내 성공하지 못했는지, 현재는 스위스 은행에서 근무 중이다.)
저녁에 집에 일찍 들어올 때면, 이 친구와 각자의 나라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도 해보고,
가족들과 함께 저녁을 먹으며 어학원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도 함께 나누는 사이, 내 영어는 조금씩 조금씩 성장해 가고 있었다.
한 달이라는 기간 동안 가장 불편했던 것은 바로 씻는 일이었다.
호주가 물 부족 국가이다 보니, 이 집에서는 샤워할 때 물 사용에 대해서 굉장히 엄격하게 규제하고 있었고,
물을 아껴야 한다는 인식이 부족했던 나로서는 은근히 불편함을 느껴야 했다.
그렇다 보니, 홈스테이가 끝나고 새로운 집을 구할 때는, 집주인에게 가장 먼저 샤워할 때 물 제한이 있느냐고 물어야만 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새로 들어간 집은 어학원 벽에 붙어있던 광고를 보고 들어간 아파트였다.
같은 어학원에 다니는 여자 학생 3명이 살고 있던 집으로, 한 명이 나가면서 새롭게 들어올 사람을 구하고 있었고 프랑스에서 온 친구 한 명과 브라질에서 온 두 명의 친구가 같이 살고 있었다.
방이 2개였기 때문에, 브라질 여자아이 중 한 명이 나와 같은 방을 써야만 했고,
그 아인 1인용 침대에서, 나는 침대 옆에서 침대 매트리스만 깔고 자는 조건이었지만,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조합은 매우 빠르게 바뀌게 되는데,
내가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아이 두 명이 크게 다투고, 결국 브라질 친구 한 명이 집을 나가면서
새롭게 터키 남자아이가 함께 살게 되었다.
여자 3명, 남자 1명이 살던 아파트가, 여자 2명, 남자 2명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국적도 다양하여, 프랑스/터키/브라질 그리고 한국이었다.
그리고 이 시점부터,
내 영어가 느는 것과 비례하여, 문화적인 충격도 점점 커져갔다.
한 아파트에 사는 4명의 남녀.
프랑스에서 매우 유력한 가문의 딸로, 현대미술을 공부하는 친구.
브라질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하다가 어학연수를 온 친구.
터키에서 전기 관련 일을 하다가 온 친구.
그리고, 국어국문학과 단일전공이었던 나.
직접 가보면 알겠지만, 이런 조합은 흔하지 않다. (대부분 같은 지역 사람들끼리 뭉친다.)
유럽, 중동(사람에 따라 유럽, 혹은 아시아로도 구분하는 터키), 남미, 아시아.
모국어가 다르고, 문화가 전혀 다르던 우리 4명은 조금씩 서로를, 그리고 상대방의 문화를 알아가고 있었다.
물론, 전혀 다른 4명이 모여 살다 보니, 다툼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개인 공간과 공용 공간 간의 불명확한 구분 및 사용으로 인한 큰 다툼도 있었고,
(나에게는 정말 큰 문화 충격이었던) 각자의 Sex Life로 인한 다툼도 있었다.
결국, 또 한 명의 브라질 친구가 아파트를 떠나며, 새로이 페루 친구 (의도한 것은 아닌데, 또 다른 남미 국가에서 온 친구)가 함께 살게 되었고, 이 조합은 오래도록 유지되었다. (물론, 자주 다퉜다.)
같이 살던 룸메이트, 그리고 학원에서 친해졌던 몇몇 친구들 가운데, 나와 가장 가까웠던 친구는 바로 프랑스에서 온 친구였다.
프랑스의 유력 가문의 딸인 친구는 나이는 나보다 한 살 많았지만 서로의 부모님, 연애, 친구, 꿈, 문학 등에 대해서 폭넓게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던 좋은 친구였다.
(당시 은행원이 꿈이었던 나에게, 이 친구는 내 관심사 및 성격과 일치하지 않는다며, 은행원이 되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녀의 충고는 정확했다.)
시간이 지나며, 나는 그녀의 아버지가 MIT를 졸업하고,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컴퓨터 전문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조만간 시드니에 방문할 예정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싶었던 나는 그녀에게 부탁하여 그녀의 아버지를 따로 만나서 조언을 받을 수 있겠느냐고 부탁했고, 흔쾌히 승낙을 받았다. 그렇게 만들어진 인터뷰 날짜는 친구의 가족 + 같은 아파트 사는 친구들 + 친구의 친한 친구 2명이 다 같이 저녁식사를 한 바로 다음날이었다.
<시드니타워에서의 저녁. 컴퓨터 전문가인 아버지와는 다르게, 내 친구의 어머니는 자신의 이름으로 재단을 운영하고 있던 분이었다>
난 이 분을 만나기 위해 많은 질문들을 준비했고, 한 시간 동안 호텔 1층 커피숍에서 이루어진 만남은 이후의 내 커리어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때 받았던 조언들은, 아파트로 돌아와 바로 정리해서 아직까지도 그 내용을 간직하고 있다. 몇몇 부분만 추려보자면 다음과 같다.
"세계 어느 곳이든지, 성공한 사람들은 부지런히 일한다. 잠을 거의 가지 않고, 아침 8시부터 새벽 2시까지 쉴 새 없이 일한다."
"세계를 여행하며 배울 수 있는 것은, 어떠한 상황에 처했을 때 대처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한 예로, 특정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네가 보일 수 있는 행동은 한국에서 네가 배웠던 교육, 혹은 너의 종교가 반영되는 반응이 될 것이다. 다른 나라를 여행하는 것은 그러한 선택의 수가 많아지는 것이다. 오직 한 가지 방법만이 아닌 여러 나라의 행동 방식을 습득하고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어느 상황에서든지, 여행 중이라도 손에서 책을 놓아서는 안된다. 내 딸처럼, 항상 무엇인가 배우고, 읽고, 생각해야 한다"
"확실한 목표가 있어야 하고, 확실한 모티브가 있어야 한다."
"출신 대학은 중요하다. 시작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누구도 자신의 삶에 100% 만족할 순 없다."
"정상에 올랐다고 경치가 좋다면서 만족해선 안된다. 정상에 올랐다 하더라도 너는 공부해야 한다."
"일에서도 배운다. 어느 순간에라도 공부를 그만두지 마라."
"사고방식은 각각의 언어에서 온다. 네가 또 하나의 언어를 배운다면 너는 또 하나의 사고방식을 옵션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네가 Top에 올랐다고 행복할까? 단순히 위치로 높은 곳에 오를 것이 아니라, 너의 분야에서 모르는 것이 없는 Top 이 되도록 하자. 그때서야 비로소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언제 내 분야에 더 이상의 비밀은 없다고 느꼈냐고? 처음에는 공부를 하다가 모르는 것이 생기고, 난 그것을 물어보기 위해 누군가를 찾아갔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난 더 이상 무엇인가를 물어보러 다른 사람을 찾아가지 않아도 되었고, 반대로 다른 사람들이 내게 무엇인가를 물어보기 위해 찾아오기 시작했다. 바로 그 순간이다."
"높은 곳에 올라갈수록 다른 사람들의 질투가 따르는 것은 필연적이다. 질투에 어떻게 대처하느냐고? 엄밀히 말해 방법이 없다. 다만 너는 그들을 화나게 하거나 약 올리지 마라. 그들이 정직한 사람이라면 그들은 질투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느낄 것이다. 이럴 경우 어느 순간 질투는 저절로 사라지게 된다."
"가족과 일 중에, 언제나 일이 내 최우선 순위였다."
아파트로 돌아와 친구에게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자신의 아버지를 존경하지만 사랑하지는 않는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가족보다 일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던 아버지에 대한 딸의, 지극히 자연스러운 대답이다.
(한국에 돌아온 뒤에도 종종 친구의 아버지와는 메일로 안부를 주고받았다. 당시 취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내 이야기를 듣고서는, 자신의 대학시절 친구라며 찾아가 보라며 명함 한 장을 스캔해서 보내주었다. 러키금성 (LG의 예전 이름)에 다니는 분의 영문 명함이었는데, 수소문 끝에 알아낸 이 분은 LG히타치의 한국 사장님이셨다. 인사팀으로 메일을 보내 확인을 요청하자, 이미 돌아가셨다는 답변을 받아서 안타까워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시드니에서의 시간이 흘러가며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어학원에서의 수업은 이미 흥미를 잃어버려 거의 참여하지 않고 있었고,
그 대신 혼자 실내 수영장으로 수영을 하러 가거나, 집에서 책을 보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몇몇 친구들과 해변으로 놀러 가는 게 전부였다.
즐거웠냐고?
즐겁긴 했지만 외로웠다.
4개월간 머물면서, 나는 한국인 친구를 극히 소수만 만들었다.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어학연수를, 그것도 4개월 단기로 왔기 때문에 영어를 익혀가는 것이 내 최대의 관심사였다.
그렇다 보니, 한국어를 쓰는 상황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런 나를 보며, 몇몇 유럽 친구들은 다른 아시아인 학생들과 다르다며 신기해했다.)
그 결과, 언제부터인지 무척이나 외로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아무리 룸메이트들과 친해졌다고 하더라도,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는 부분이 있고, 한국어로만 전달할 수 있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
그러면서 조금 더 마음을 열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한국인 친구가 있었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자주 하기 시작했다.
그런 외로움에 어떠한 해결책을 찾을 겨를도 없이, 출국일은 다가왔고, 나는 그동안 만났던 많은 사람들과 함께 송별회를 했다.
<홈스테이를 함께 했던, 달리기 선수였던 스위스 친구>
<나와 가장 깊고, 다양한 대화를 나눴던 룸메이트>
<해변에서의 송별회>
4개월간의 시드니 생활을 마치고, 브리즈번과 일본을 거쳐서 한국에 돌아온 건 2008년 1월이었다.
시드니에서 난 영어를 조금 더 잘해보기 위해서 어떤 일들을 했을까?
홈스테이? 분명 도움이 되었다. 처음 간 나라의 생활 방식을 조금이나마 익힐 수 있었고, 외곽 지역에 위치해 있었기에 저녁에 클럽에서 술을 마시는 게 아니라 책상에 앉아서 영어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환경이 조성되었었다. 물론 친절한 호주 아저씨, 아주머니의 도움도.
어학원? 어느 정도의 도움이 되었지만, 영어 교육 자체라기보다는, 영어를 할 수 있는 친구들을 만나게 해 준 것이 주된 장점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도움이 되었던 건 다른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한국인 친구를 거의 만들지 않았던 것.
두 번째가 더 중요한 이유인데, 집중도와 목표의식이었다.
취업을 하나의 레이스라고 보자면, 난 이미 모든 부분에서 뒤처져 있었다.
이 부분을 조금이라도 따라잡기 위해서 선택한 어학연수는, 나에게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배수진이었다.
내가 어떤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지 (그린페스티벌에서 벌어졌던 사건은 내게 큰 부끄러움이었다),
내가 무엇을 위해 이곳에 왔는지,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갔을 때, 나는 과연 떳떳하게, 내 선택이 올바른 선택이었다고 증명할 수 있을지.
이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하기 위해 나는 집중력을 가지고 목표에 집중할 수가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과연 영어가 얼마나 늘었을까?
그리 믿을만한 시험은 아니지만, 가장 많이 이용하는 토익을 비교 대상으로 본다면,
어학연수를 가기 전 점수였던 700 중반에서 800 후반으로 상승했다.
(토익 점수는 몇 달 뒤, 945점으로 오르게 된다)
한국에 돌아온 뒤에도, 영어 원서를 계속해서 읽고, 영어 방송을 지속적으로 들으며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3년간 만났던 일본인 여자친구와의 관계도 영어의 감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였다.
짧은 4개월이었지만,
이 4개월은 내 인생의 하나의 터닝 포인트였다.
만약, 말리는 친구들의 말을 듣고 너무 늦었다고 생각해 한국에 계속 머물며 인턴이나 자격증 준비를 했다면 어땠을까?
더 나은 결과를 얻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리고 더 나은 배움을 경험할 수도 있었겠지만,
영어는 계속해서 콤플렉스로 가져가야 했을 것은 분명하다.
또한 나에게 큰 가르침을 주었던 친구의 아버지도 만나지 못했을 테고.
짧은 시간에 대한 소중함, 목표를 놓지 말아야만 했던 경험도 해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며,
이 경험에 대해서 감사한다.
앞으로 또 다른 선택의 순간이 오더라도,
적어도 '늦었다'라는 생각에 선택을 하지 않는 경우는 없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러한 선택에 후회하는 일 또한 없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