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다. 촉촉히 가을비가 내리는 밤 보라빛 제비꽃도 지고 향기롭던 라일락 향기도 추억이 되었다. 빗줄기에 지지 않으려 애쓰던 나뭇잎도 낙엽이 되어 쌓인다. 귀뚜르르 하며 가을을 알리던 귀뚜라미도 어디서 비를 맞고 있는 것인지 소리가 없다. 아마도 낙엽 사이에 숨어 있는 건 아닐까. 20여년전 직장생활을 하면서 나는 몸이 많이 아팠다. 원인 모를 통증에 시달려서 결혼 후 회사를 그만 두었다. 그야말로 내 인생에 찬비가 내리는 순간이었다. 힘든 시간을 보낸 후 아이를 낳고 아이가 걷기 시작하자마자 자연학교라는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일주일에 한두번 북한산 둘레길 같은 곳에서 놀다가 도시락을 먹고 집으로 돌아오는 프로그램이었다. 봄이면 진달래 화전에 목련차를 마시며 봄꽃의 아름다움에 취하고 여름이면 근처 계곡에서 물놀이를 했다. 수중생물들을 관찰하며 차가운 물속에서 오래도록 걸어 다녔다. 겨울에도 추위는 우리를 막지 못했다. 자그마한 언덕을 오르며 눈과 하나가 되고 추운 줄 모르고 산행을 즐겼다. 비가 오는 날이면 우비와 장화를 신고 비오는 숲을 거닐었다. 피톤치드와 나무냄새가 진하게 퍼지고 나뭇잎마다 송알송알 맺히던 빗방울이 반짝 빛났다. 보석처럼 달려잇던 그것을 톡하고 치면 우수수 빗방울이 쏟아져 내린다. 비를 맞아도 웃는 아이들. 찰박찰박 웅덩이에 고인 물을 밟으며 신나하던 그때가 생각난다. 아이들은 그 찬비에서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자유롭게 춤추는 법을 배웠다. 이제는 아이도 크고 그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와서 더이상 숲활동을 할 수 없지만 시간이 나면 대공원 둘레길이나 안양천, 수목원 등지를 다지며 자연과 가까이 하려고 노력한다. 나에게 있어 숲에서 보내 시간은 치유의 시간이었고 마음이 힘들면 귀향을 하듯 그렇게 숲을 찾는다. 숲은 언제나 팔 벌려 나를 환영해 주고 풀과 나무는 나를 살린다. 꽃들은 어쩌면 저렇게 아름다운지. 어디 비할데가 없이 아름답다. 숲 속에서 비를 맞을 때 나는 깨달았다. 나무처럼 인생에서 비가 올때 피할 곳이 없다면 비를 맞아도 괜찮다는 것을. 흔들리지 않으려 흔들리는 것처럼 조금 흔들려도 된다는 것을. 앞으로 나는 몇번의 봄을 맞이할 수 있을까. 부디 시간이 다하기 전에 자연의 지혜를 배우고 싶다. 이제는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를 즐기며 내 나름의 싹과 꽃을 피워내야 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