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스텔라>와 <인셉션>을 만든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최근 영화인 <TENET(테넷)>에서는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일어나야 할 일은 반드시 일어난다'
주인공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 만든 조직인 테넷에서 과거의 주인공을 돕기 위해 과거로 한 남자를 보냅니다. 테넷은 시간을 거슬러가는 방법을 알고 세계평화를 위해 이를 이용하는 비밀 조직입니다. 미래에서 보낸 그 남자는 과거 속 주인공과 동료가 되고 그와 함께 많은 고초를 겪습니다. 그리고 주인공을 살리기 위해 대신 죽습니다. 이 남자는 이미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과거로 거슬러 갑니다. 일어나야 할 일은 반드시 일어나기 때문이지요.
'일어나야 할 일은 반드시 일어난다'는 대사에는 운명론이 깊게 담겨 있습니다. 물리학에 전문가 이상으로 지식을 가지고 있는 놀란 감독이 시간을 거슬러 문제를 해결하는 영화에서 운명론을 설파한다는 사실이 꽤 흥미롭습니다. 어찌 됐든 감독이 과학자가 아닌 예술가이기 때문에 과학보다는 낭만적인 운명론을 믿는 것일까요?
운명론(fatalism)이란? 이 세상만사가 미리 정해진 필연적 법칙에 따라 일어난다고 하는 사상(네이버 두산백과)
과학은 사실 운명론에 기반합니다. 고전물리학의 문을 연 뉴턴은 물리학 첫 번째 원칙으로 '관성의 법칙'을 만들었습니다. 관성의 법칙이란 물체에 가해진 힘이 0(제로)이면 그 물체는 본래의 상태 그대로를 유지한다는 것으로 반대로 말하면 힘을 가하면 물체의 상태가 변한다는 것입니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생기는 것이지요. 뉴턴이 세상을 보니 모든 것은 원인에 따라 결과가 반드시 발생하더라는 것입니다. 뉴턴의 제1법칙은 실은 운명론인 것입니다.
거창하게 과학으로 증명하지 않더라도 운명론의 징후는 도처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가장 확실한 운명은 바로 '태어나면 죽는다'입니다. 이것만큼 확실한 원인과 결과는 없습니다. 인간은 지구라는 공간에서 동물이라는 생명체로 태어납니다. 생명체이기 때문에 공기와 물, 불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러한 환경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 즉, 운명을 결정해 버립니다.
여기에 더해 인간의 운명을 좀 더 복잡하게 만드는 요소가 있습니다. 바로 지능입니다. 지능은 인간을 감정과 지식을 가진 존재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로 인해 인간의비극도 함께 태어나게 되었지만요. 인간은 자기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인지하고 물리적 한계를 경험하는 순간, 결핍을 깨닫게 됩니다. 결핍은 인간으로 하여금 불만족이라는 감정을 알게 합니다. 불만족이라는 씨앗과 결핍이라는 토양이 만났으니 이제 불행이라는 꽃이 필 일만 남은 것이죠. 인간은 태어난 이상 불행이라는 생의 요소를 그저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 난 겁니다.
이러한 운명은 차별 없이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에 그나마 위안을 가져 봅니다.
브람스가 그린 '운명'의 노래
근원적이면서 폭력적인 인간의 운명에 대해 수많은 예술가들이 그림으로, 글로, 또 음악으로 표현하였지만 클래식 분야에도 이 운명이라는 주제를 진지하게 다룬 작곡가들이 꽤 있습니다. 리하르트 바그너는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이나 <트리스탄과 이졸데>와 같이 인간의 비극적 운명을 주제로 철학적이고 묵직한 오페라 작품들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구스타프 말러 또한 비극적 운명이 연상되는 성악곡과 교향곡을 많이 만들었지요. 베토벤 최고의 작품 가운데 하나인 교향곡 5번은 아예 <운명>이라는 제목을 얻기도 하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세 작곡가 모두 독일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네요.
하지만 제가 가장 좋아하는 운명을 주제로 한 작품과 그 작품을 만든 독일인 작곡가는 따로 있습니다. 북독일 함부르크 출신의 고독한 사내, 요하네스 브람스(1833~1897)와 그의 합창곡 <운명의 노래(Schicksalied, Op.54)>입니다.
운명의 노래
저 넘어 밝은 곳에 있는
축복받은 영혼들이여
엘리시안 들판에서
방황하고 있구나
희미한 천상의 산들바람이
너의 영혼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니
마치 연주자의 손가락이
신성한 현을 튕기는 것 같구나
운명으로부터 자유로이,
잠자는 아기처럼,
천상의 종족들은 호흡을 한다
가녀린 새싹에
순결함을 간직하고
그들의 영혼은 피어나는구나
영원히 그 속에서,
그리고 그들의 기쁨에 찬 눈은
고요한 평온 속에서
영원히 빛난다
그러나 우리에겐
쉴만한 그 어떤 곳도 받지 못했으니
인간이라는 사실에 고통스러워하며
아무렇게나 한 시대에서
또 다른 시대를 살면서
멸망하고 몰락하는구나
마치 물방울이 바위에 부딪쳐
해가 지나 바위를 뚫고
미지의 세계로 떨어지는 것처럼
<운명의 노래>는 독일의 시인 프리드리히 횔덜린(Friedrich Holderlin, 1770-1843)의 서간체 소설 <히페리온>에 있는 시 '히페리온 운명의 노래'에 감명받은 브람스가 1871년 완성한 합창곡입니다. 위의 가사처럼 천상의 사는 존재들은 운명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원한 평화와 행복을 누립니다. 그에 반해 인간은 쉴만한 장소조차 없습니다. 바위에 부딪치는 물방울처럼 파멸하고 소멸합니다. 비록 그 물방울들이 어쩌다 바위를 뚫는다 해도 떨어지는 곳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천상과 대비하여 인간의 세계는 고통스러우며 그것이 곧 인간의 운명입니다. 휠덜린의 시에는 인간의 비극적 운명을 동정하지만 그 어떤 희망도 제시하지 않습니다.
비극적인 운명론을 설파하는 시의 내용 그대로 곡을 만들었다면 브람스의 작품을 이토록 사랑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운명의 노래>는 단일곡으로 17분 정도 되는 긴 노래입니다. 합창이 시작되기 전 약 2분 40여 초간 관현악으로만 연주되는 서주를 듣노라면 성스러운 존재들이 운명에서 자유로운 자신들의 안녕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비극적 운명을 타고난 인간들을 어쩐지 애잔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윽고 합창이 시작되고 신들의 세계가 그려집니다.
브람스가 그리는 이상적 세계는 눈물이 날 만큼 아름답습니다. 성스럽고 우아합니다. 그러나 단순하게 행복만 존재하는 세계는 아닙니다. 인간의 모든 희로애락을 천상의 존재들도 알고 있다는 듯 모든 고통과 고뇌가 녹여지고 승화된 환희이며 신성입니다. 곡의 중반부까지 이어지는 합창과 관현악의 하모니는 귀로 들어온 후 뇌로 가지 않고 곧장 심장으로 파고듭니다. 가슴이 저릿합니다. 브람스가 그린 이상향에는 신성함과 애절함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중반부가 되면 분위기가 반전됩니다. 고통과 파멸, 소멸을 겪는 인간 세상은 천상에서 바라보면 폭풍우가 몰아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브람스는 이 비극을 1인칭 시점에서 그리지 않습니다. 브람스의 시점은 천상계도 인간계도 아닌 객관자의 입장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가 그리는 비극은 인간이 느끼는 참담함이나 참혹함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가 보는 인간의 운명은 지표면에서 솟아오른 에베레스트처럼 하나의 자연일 뿐입니다. 그 운명을 맞이하고 파괴당하고 소멸될지언정 그랜드 캐니언의 깊은 협곡처럼 장엄하다 이야기합니다.
곡의 후반부가 되면 서주의 멜로디가 재소환됩니다. 시와 달리 비극으로 끝내지 않고 이상향의 멜로디로 끝을 낸 브람스의 의도는 과연 무엇일까요. 제가 생각하기에 브람스는 천상의 존재들에게 오히려 반문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고통을 한 번도 겪지 않는 천상의 존재와 수많은 고통을 겪는 인류 중 참된 존재는 과연 누구인가라고 말이지요.
운명을 피해 갈 수 없는 존재의 비극을 없앨 수는 없지만 그 운명을 받아들이고 하루하루 헤쳐 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에 대하여 브람스는 애정과 존경을 표합니다. 함부르크의 거센 바닷바람처럼 무뚝뚝하지만 속에는 그 누구보다 다정함을 가졌던 브람스의 심성이 음악에 고스란히 녹아 있는 것이 참 신기하기만 합니다.
<운명의 노래>를 여러 버전으로 많이 들어 본 것은 아니지만 이탈리아 출신의 지휘자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이끄는 베를린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 에른스트 젠프 합창단의 연주를 가장 좋아합니다. 아바도의 해석은 다른 지휘자들의 해석이 전혀 궁금하지 않게 하는, 완벽한 기쁨을 줍니다. 현의 질감, 순한 양처럼 연주되는 관악기들, 곡의 속도,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합창단의 음성 등 이 모든 구성 요소들 덕분에 지나치게 감정적이지도 또 지나치게 객관적이지도 않습니다. 서정적이지 않은데 이상하게 따듯합니다. 아바도는 브람스 음악의 숨은 내면을 사려깊게 드러내는 섬세한 지휘자입니다.
브람스는 1833년 북독일의 항구 도시 함부르크에서 더블베이시스트이자 호르니스트였던 가난한 야코프 브람스와 그가 묵던 하숙집에서 만난 열입곱살 연상인 아내 요하나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인 브람스는 7세에 음악가 코셀에게 3년간 피아노를 배우고 10살에 코셀의 스승인 마르크스젠으로부터 작곡을 배웁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지자 10대 중반부터 허름한 여인숙에서 연주를 하거나 교습을 하며 생계를 꾸려 나갑니다.
스무 살 무렵 브람스는 헝가리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아힘을 만나게 되고 그의 재능을 알아본 요아힘은 브람스를 슈만에게 소개합니다. 1853년, 요아힘의 추천장을 들고 자신을 찾아온 브람스의 재능을 슈만은 즉각 알아봅니다. 브람스는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인 슈만의 아내 클라라와 역시 최고의 작곡가인 슈만의 환대에 가슴이 설렙니다. 게다가 슈만은 그의 음악 평론지에 브람스와 그의 작품을 극찬하게 되고 이를 계기로 스무살의 햇병아리 음악가 브람스가 드디어 대중과 음악계에 이름을 알리게 됩니다.
슈만은 극찬 뿐 아니라 브람스의 작품이 출판되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슈만과 브람스의 인연은 얼마 가지 못하고 맙니다. 브람스를 만난 이듬해 슈만이 라인강에 몸을 던지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평소 정신질환을 앓고 있던 자신을 비관한 것이지요. 다행히 지나가던 어부에 의해 목숨을 건진 슈만은 자발적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합니다. 슈만의 투신 이후 클라라는 여섯 명의 자녀와 뱃속의 자녀까지 홀로 생계를 꾸려나가며 고군분투하게 되고 이런 클라라와 아이들을 위로하던 브람스의 마음 속에 어느덧 연정이 솟아 오르게 되지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사랑이란 단어가 가질 수 있는 모든 수식어를 사용해 당신을 불러보고 싶습니다"
14세 연상인 클라라를 브람스가 이토록 사랑하게 된 것은 정해진 운명 같습니다. 브람스의 아버지 또한 17세의 연상의 여인에게 반해 결혼하고 브람스를 낳았습니다. 슈만의 누나는 정신병으로 자살하고 슈만의 아들 역시 정신병동에서 생을 마감한 것을 보면 슈만의 불행은 예고된 운명이지요. 슈만으로 비롯된 클라라의 고난과 불행은 브람스로 하여금 그녀를 깊이 사랑하게 만들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두 사람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1856년 슈만이 정신병동에서 생을 마감한 후 40년간 클라라는 슈만이라는 성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녀는 브람스의 사랑을 거절하고 가계를 책임지는 가장으로 또 아이들의 엄마로, 연주가로 열심히 살아갑니다. 대신에 브람스와 클라라는 평생 아름다운 우정을 이어 나갔습니다. 일각에서는 플라토닉 한 사랑을 나눴다고도 이야기합니다. 비록 두 사람의 사랑이 연인이나 부부의 연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으나 브람스는 자신의 운명의 상대로 클라라만을 허락한 것 같습니다.
클라라에게 러브레터를 보내고 2년 후 브람스는 대학교수의 딸인 아가테 폰 지볼테와 약혼하였지만 결혼을 앞두고 파혼을 선언해 버립니다. 이 충격 때문이었는지 아가테는 10년간 다른 사람과 결혼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브람스는 클라라의 딸 율리와 사랑에 빠지기도 하였지만 율리를 사랑한 것인지 클라라의 딸을 사랑한 것인지는 좀 애매합니다. 율리는 결국 다른 사람과 결혼했습니다.
1896년 5월 클라라가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뜬 후 브람스도 눈에 띄게 쇠약해지더니 이듬해 4월 간암으로 세상을 뜹니다. 클라라가 세상을 뜬 지 1년만에 그녀를 따라 간 것이지요.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브람스는 죽기 직전 클라라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내가 평생 사랑한 유일한 사람'이었노라고...
우주가 나에게 바라는 것
2023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해가 되면 마음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있습니다. 올 한 해 과연 내 운명은 어떻게 될까? 2023년의 끝에 과연 내가 원하는 목표나 꿈이 이루어져 있을까? 혹시 갑작스러운 어려움이 발생하는 것은 아닐까? 등등 말이죠.
나의 '타고난 팔자'가 무척 궁금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저는 차마 철학관이나 점집에 가 볼 생각은 못했습니다. 대신 신년운세 등을 알려주는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 생년월일과 태어난 시간을 입력하고 팔자를 검색한 적은 있습니다. 신기하게도 월별로 운의 기운이 달라 어떤 월에는 건강을 조심하고 어떤 월에는 재물 문제가 발생하며 또 어떤 월에는 직장이든 이사든 크게 이동하게 될 것이라고 자세하게 알려주더군요. 초년 뿐 아니라 중년, 노년의 운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어 놀랐습니다. 하지만 놀라움과 재미는 잠시 뿐, 내 운명이 미리 정해져 있다는 사실에 좀 맥이 빠졌습니다.
그래 두어 번 검색해보고 그만두었습니다. 이 팔자 정보에 연연하여 살아가면 인생이 피곤하겠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미래를 알면 그에 따라 현재에 대처하고 조심해야 하는 일이 늘어나 버립니다. 당장 발생하는 일도 일일이 대처하며 살기 고단한데 앞으로의 일까지 미리 알아서 조심해야 한다니 보통 피곤한 일이 아닐 수 없지요.
빅뱅 이론에 따르면 우주는 지금도 팽창하고 있다고 합니다. 대폭발(빅뱅)이라는 사건으로 무한 팽창이라는 운명을 우주도 가지게 된 셈입니다. 인류는 그런 우주에서 살아가고 또 살아내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문득 의문이 듭니다. 자기 자신의 운명을 향해 무한히 확장하고 있는 우주가 과연 양자 세계의 입자만큼이나 작고 하찮은 인간의 운명에 관심이 있을까? 명리학이나 점성학이 말하는 것처럼 세상은, 우주는, 세세하게 인간의 운명을 정해 놨을까?라고 말이죠.
우주는 우리에게 운명의 골격은 만들어 주었지만 자신의 일로도 너무 바빠 내용까지 자세히 정해준 것 같진 않아요. 만일 그렇다면, 먼지보다 작고 하찮은 인류에게 지능을 주었을 리 만무합니다. 지능을 가진 지금의 인류로 진화한 데에는 자신이 미처 다 채우지 못한 운명의 내용을 스스로 채워가라는 우주의 배려 같은 것이 아닐까요.
우주의 뜻에 따라 올 한 해 내 운명의 내용을 어떻게 써 내려갈지 새해의 첫 날, 잠시 고민해 보아야 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이해를 돕고자 앞으로는 글 안에 소제목을 붙여 보려고 합니다. 이런저런 시도랄까... 지능의 이용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