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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ye May 03. 2023

나의 소중한 어린이 친구들

우리 가족이 살고 있는 집은 놀이터를 한가운데에 두고 어린 자녀들이 있는 가족들에게 우선적으로 배정되는 타운하우스들이 놀이터를 빙 둘러싸고 있는 구조이다. 놀이터를 둘러싸고 모두가 창문을 통해 아이들을 바라보게 되는 이 구조는 이웃들을 연결하는 강력한 고리가 된다. 문을 열고 나오면 바로 푸른 잔디가 갈린 공동의 공간이니 서로가 가깝게 느껴진다. 아이들을 지켜보기 위해 혹은 밥 먹으러 들어오라고 부르러 나온 부모들도 서로 한 마디씩 나누지 않을 수 없는 구조이다. 놀이터를 타운하우스들이 둘러싸고 있으므로 놀이터 쪽을 바라보고 있는 큰 유리창을 통해 어른들은 집 안에서도 아이들을 지켜볼 수 있다. 가끔 거실에서 바깥을 바라보다 가까이서 놀고 있던 꼬맹이가 나와 눈이 마주쳐 다가와 인사를 하면 나는 창문을 통해 과자 하나를 건네준다. 과자 하나에 꼬맹이는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이곳에서의 삶이 마냥 그리 순탄하지 만은 않다. 한국에서 혼을 불살라 쌓아 온 경력과 네트워크를 등지고 온 이곳에서는 나의 과거의 성과들을, 간절히 바랐던 만큼 더 자랑하고 싶었던 빛나는 트로피들을 허무하게도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것은 그만큼 그 대단한 줄 알았던 메달들이 허상임을 증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경쟁에 지쳐 나가떨어져 제 발로 여기까지 온 주제에, 때때로 나는 왜 아무도 그 빛나는 결과물들을 알아주지 않냐며 서운해한다. 사회의 경쟁주의는 경멸하면서도 정작 그 경쟁의 승리의 결과물에 대한 집착을 떨쳐내지 못한 나 자신을 알아챌 때 나는 나 자신이 참 우습다. 한국어로 말할 때처럼 어려운 한자어를 적절히 섞어 상대방의 기를 눌러가며 빠른 말솜씨로 회의를 주도하고 싶은데 영어로는 버벅대다 내 말이 상대에게 전달되지 않음을 느끼는 날 나는 열등과 희의와 후회를 한가득 안고 터덜터덜 퇴근을 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놀이터에서 신나게 놀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 경고등이 들어왔던 에너지 배터리가 급속 충전되고 일터에서의 좌절들과 나를 지배하는 만성적 불안이 신기하리만큼 순간에 눈 녹듯 사라진다. 캐나다로 이사를 온 후 나를 행복하게 하는 요소들이 여럿 있지만 그중 예상하지 못했던 가장 강력한 것은 바로 우리 동네 아이들이다. 동네 아이들이 발랄하게 안녕하세요 혹은 Hi라고 인사해 주면 그 한마디에 경고등이 들어왔던 에너지 배터리가 급속 충전된다. 불안과 후회가 그 한마디에 그렇게 쉽게 녹아버린다는 것이 신기하고 허무한 지경이다. 나 자신을 진작에 어린이를 좋아하고 잘 놀아주는 어른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었는데, 이 동네에 오고 난 이후로 나는 아이들이 놀고 있으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오늘 하루는 어땠는지 그리도 궁금하고 말을 걸고 싶어 진다.



얘들아 너희들이 그렇게 유모차 끌어주면 아줌마는... 개꿀?

게다가 동네에서 가장 어린 축에 속하는 우리 아들을 형누나들은 내 기대 이상으로 이사 온 첫날부터 귀여워해 주었다. 처음 왔을 때는 다소 서먹해하며 다가오지 않던 아이들도 요새는 어느새 아이를 보면 'OO이다! 귀여워!'를 외치며 뛰어온다. 유모차를 끌고 나가면 아이들은 너도나도 달려와 '한 번만 밀어봐도 돼요?' 물으며 서로 밀어 보고 싶다고 난리 법석이다. 때로는 엄마로서 끌고 가야 할 책임감의 무게의 상징물처럼 느껴지던 유모차가 아이들에게는 즐거운 놀이가 된다. 그것이 내가 나에게 스스로 지운 가상의 부담이었음을 깨닫는 또 하나의 순간이다. 남편이 합류하기 전 아이와 단 둘이 생면부지의 타지에서 새로운 일과 생활을 시작하던 시절에는 동네 어린이들이 아이와 노는 잠시 동안 분리수거도 하고 빨래도 돌릴 수 있었다. 동네 아이들이 그 당시에는 정말 감사한 은인이었다. 이 세상에 나 혼자만 남겨진 것 같은 그 기분을 아이들이 지워주었다. 답례로 시시한 사탕 하나만 쥐어 주어도 뛸 듯이 기뻐하고 그냥 먹어도 괜찮을 텐데 엄마한테 허락받고 먹어야 한다고 집에 허락을 받으러 뛰어간다. 그 투명함에 마음이 몽글해진다. 한 명의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그 말은 아이뿐 아니라 엄마를 위한 것이기도 하며 그 마을의 또 다른 어린이들이 가진 힘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강력하다. 


놀이터는 대체 무슨 재미일까? 우리 동네에서는 희한하게 유치원도 안 간 꼬맹이들부터 중학교 2학년 아이까지 놀이터에서 같이 술래잡기를 비롯한 여러 놀이를 하면서 논다. 저녁 9시가 되어 들어가서 자야 된다고 데리러 나오면 아이들은 조금이라도 더 놀고 싶어서 난리이다. 엄마 아빠가 잡으러 나오면 '조금만 더 놀면 안 돼요?'를 외치며 놀이터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시무룩이 끌려 들어간다. 문득 논다는 게 대체 뭔길래 그렇게 아쉬운가 궁금해진다. 경쟁 사회에 온몸을 던져 남들이 세운 기준에 따라 남들을 이기기 위해 살다 혼자 제풀에 나가떨어지기까지 20년 넘는 시간 동안 나는 노는 법을 잊어버린 듯 하다. 성과주의적 시점에서 보면 놀이터에서 노는 것만큼 비생산적인 일도 없다. 떨어진 잎사귀들을 모아서 마법 포션이라며 아이들은 하루 종일 그것을 빻고 있다. 이름 모를 먹지도 못할 열매를 따서 모으는데 하루 종일 시간을 쓴다. 결과적으로는 흙 속으로 돌아갈 것들을 만들고 세는 데에 시간을 쓰고 있으니 염세에 푹 절여져 묵은지가 되어버린 이 아줌마의 눈에는 처음에 그 행위가 참으로 비경제적으로 보였던 것이다. 


이 놀이터에는 1년째 버려진 플라스틱 자전거 안장이 있는데, 나의 눈에는 명백한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 이 물건이 아이들의 놀이에는 매일매일 빠지지 않는 자산이다. 아이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옹기종기 모여 있다 뛰어가기를 몇 시간째 하고 있길래 가서 물어보았더니, 이름 모를 빨간 열매를 따와 이것은 토마토이고, 비가 와서 온통 엉망인 진흙을 퍼와 이것은 수프이고, 무엇은 또 고기이고, 플라스틱 자전거 안장 그것은 냄비가 된다. 어떤 날에는 그것은 드럼이 된다. 어떤 날에는 그것은 모자가 된다.  어느 날에는 한국에서 온 어린이가 놀이터에서 하도 부산히 놀고 있길래 다가가 보았더니 놀이터 바닥에 늘 굴러다니는 마른 지푸라기들이 정체 모를 형체로 여러 개가 묶여 있다. 이것이 무엇이냐 물어보았더니, 그것들은 사람이었다. 제일 큰 것은 아빠, 그다음 것은 엄마, 그리고 아이들이 여럿이며, 누구와 누구는 싸움을 해서 누구는 구석에 미끄럼틀 옆 구석에 들어가 있는 것이고, 그 집에서도 역시 그 플라스틱 자전거 안장은 냄비가 되어 엄마가 요리를 하고 있다.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고백건대 나는 처음부터 순수한 그녀의 마음에 감동이 벅차오르지만은 않았다. 첫 순간에는 '왜 그렇게 아무 성과도 없는 일에 몰두할까?'  '사람이라고 보기에는 지푸라기 묶임이 허접하잖아'.라는 생각이 먼저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 생각을 눈치챈 두 번째 순간에는 나의 썩어버린 동심에 기가 찼다. 

놀이 가성비 끝판왕의 바로 그 플라스틱 안장과 그녀의 지푸라기 작품 세계


내 눈에는 허허벌판과도 같던 이 놀이터에서 한 가정의 복잡한 가정사를 창조하는 그녀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며 놀고 있었다. 지금의 나는 미끄럼틀이 있으면 위에서 아래로 미끄러질 생각 밖에 할 수 없고, 지푸라기가 굴러다니면 치울 생각 만을 하고, 굴러다니는 플라스틱 자전거 안장이 있으면 분리수거함에 갖다 버릴 생각 밖에 하지 못한다. '이번 주말에는 놀 거야'라고 선언한 주말에 나는 뭘 했더라? 나는 나름 논다고 생각했던 취미 생활의 시간에도 이 행위를 통해서 더 남들에게 가치 있고 인정받기 위해 발전해야 한다는 목적과 강박을 가지고 임했다. 운동을 하더라도 남들에게 보기 좋은 몸이 되기 위해 혹은 좀 더 건강한 몸을 가져야 한다는 목적으로, 춤을 추더라도 더 멋지게 잘 추어야 한다는 목적으로, 책을 읽더라도 이 글에서 얻어진 정보를 머릿속에 저장해야 한다는 강박으로,  글을 쓰더라도 남들에게 더 유려하게 보여야 한다는 강박으로 임했다. 다른 사람의 기준으로 다른 사람의 것과 비교하다 보니 좀처럼 그 과정이 순수히 즐겁지가 못하다. 독자를 의식하니 독자가 나뿐인 일기는 비효율적이라는 생각으로 자꾸만 미뤄진다. 그 행위 자체의 순간을 즐기기가 좀처럼 어렵다. 마음챙김의 관점에서 어린이들에 비하면 나는 완전한 하수이다. 얘들아 이모가 너희한테 정말 많이 배운단다, 너희들은 참 예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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