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진 것에 감사하라는 말
나를 지탱해주는 작지만 가장 큰 힘
늘 스스로에게 속고 또 속이며 산다. 이만하면 행복하고 감사한 삶이라 생각한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렇게 삶의 밑 낯을 행복과 감사라 부르는 크고 작은 빛으로 가리고 덮으며 산다. 이유는 간단하다. 힘들고 싶지 않으니까.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하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금세 우울감이 온다. 마음이 힘들면 몸이 힘들고, 그게 쌓이면 결국 살아가는 일에 힘을 낼 수 없다.
엄마는 늘 말씀하셨다. 가진 것에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고.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가지라고 말이다. 어릴 적 나는 그 말이 참 듣기 싫었다. 가진 것에 감사하는 마음... 가진 게 쥐뿔도 없음이 뻔히 보이는 판국에 뭘 감사하라는 건지, 우리 집 사정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 같았다. 그런 엄마가 너무 고지식해 보이고 답답하기도 해서 꾹 참다 한마디 했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지금 있는 것에 감사만 하고 사니까 발전이 없는 거라고, 못 가진 걸 가지려는 마음이 있어야 발전하는 것 아니냐고 말이다. 겨우 엄마한테 어쭙잖은 잘난 척을 했던 내가 너무 미안하고 부끄럽다. 혹시 기억하는지 엄마에게 감히 묻지도 못하겠지만, 철없고 속 좁은 딸년이 지껄였던 얄팍한 공격은 분명 엄마 마음에 가시로 박혔을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가진 것에 감사하라는 말은 지극히 서민적인 말이다. 조금 꼬아서 보면 가진 것에 감사하고 더 많은 것은 바라지도 말라는 말 같다. 내가 본 정작 많이 가진 사람들은 그토록 가진 것에 감사하지 않는 듯 보였다. 감사하는 마음이 있을지 모르나, 당연하게 있는 것들에 애써 감사한 마음을 가지려 노력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들은 가진 것과 못 가진 것에 대해 합리적으로 따져보고 더 가질 수 있다면 더 취하려고 하지, 가진 것에만 안주하는 삶을 추구하지 않는다.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은 기회를, 더 많은 가능성을 볼 수 있는 위치에 있으니 취하는 삶이 쉬울 터였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그릇될 게 없는 일이다.
엄마는 왜 그렇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았을까. 왜 나에게 지금도 항상 감사하라는 말을 해주는 것일까. 죽을 둥 말 둥 열심히 살아도 일생일대 대박을 만나지 않는 한, 앞으로의 삶은 어느 정도 그려지는 수준이었다. 나의 부모님은 도장깨기 하듯 부도로 인한 빚을 꾸역꾸역 갚아나가고, 다시 아이들 학비를 대고, 반지하 집에서 벗어나고, 일용직에서 벗어나는.... 앞서 나가며 가질 수 있는 것을 취하는 게 아니라, 지금에서 한발 두발 벗어나는데 급급한 삶을 살아야 했다. 가진 것들에 감사하는 것이 엄마 마음에 겹겹이 방패가 되어주었을 것이라 짐작한다. 수시로 날아드는 우울감과 비참함으로부터 상처를 덜 받게 해 주었을 것이다. 한발 벗어날 때마다 이전보다 가진 게 늘었을 테니 그만큼 감사하는 마음도 날로 커졌으리라.
그렇게 나는 가진 것에 감사해야 한다고 배웠다. 듣기 싫은 말이라며 짜증 내고 원망도 하고, 그러면서도 자주 들었던 그 말대로 나 역시 감사하며 살고 있다. 부모품을 떠나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아 나도 부모가 되면서 더 많이 체득하게 되었다. 홀로 살던 삶과 달리 여러 역할에서 오는 다양한 고민과 문제들이 잽을 날리고 태클을 걸며 날 흔들 때,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것이자 큰 것이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이었다.
감사하면 마음이 편해졌다. 부족한 것에 안달복달하지 않을 수 있었다. 닥친 상황에서 감사함을 찾으니 부정적인 생각을 밀어낼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이만하니 다행이야'라고 생각했고, 어떤 일로 속이 뒤집어져도 더 나쁜 상황을 그려보며 '그래도 그보단 낫지' 했다. 누군가로 인해 화가 나고 힘들어져도 그의 단점보다 좋은 점을 떠올리며, 입장 바꿔 다시 생각해보며 마음을 다스렸다. 내 상황을 스스로 더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게끔 해주었다. 어렵지 않았다. 집, 회사, 아이들 혹은 남편과 생기는 여러 일들에 감사함을 먼저 생각하니 마음속 불안이 걷히고 한결 편안해짐을 느꼈다.
가진 것에 감사하라는 말이 서민적이든 아니든 중요하지 않아 졌다. 결국 지금의 나를 지탱해주고 있으니까. 내 출발선이었던 곳에서 좀 더 살아온 지금, 앞으로 아무리 더 뛰어 올라가도 넘지 못할 벽이 있음을 느낀다. 물론 더 도약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믿음이 있지만 한편으론 앞으로 내 인생에 반전 드라마가 있을까 싶다. 점점 나아지겠지만 전혀 딴판이 될 것 같지 않다. 그런 내 삶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주어지는 날들을 충실히 사는 가장 쉬운 방법이 바로 '가진 것에 감사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힘든 일들이 찾아왔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면,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함을 찾는 가장 쉬운 일을 먼저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