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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썹달 Jun 15. 2024

동전과 빨간 돼지저금통의 추억

책꽂이를 정리하다 동전을 모아둔 수납칸을 발견했다. 왜 여기다 모아둔 거지 하며 맥주병 모양의 큰 저금통에 옮겨 넣었다. 여기 모인 동전들을 언제 바꿔야 할까. 동전 교환해 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서 검색해 보니 지금은 은행마다 요일을 정해 동전을 교환해 주는 모양이다.


동전은 이제 퇴물이 되었다. 최근에 다녀온 태국 방콕도 웬만한 가게는 QR코드를 생성해 내 계좌에 있는 돈으로 바로 지불이 가능했고, 거리 동냥을 받는 이들도 QR 코드가 있었다. 그러니까 비상용 최소한을 제외하고 현금을 꼭 쥐고 다닐 필요가 없었다. 해외여행마저 이렇게 지폐가 오가는 일이 줄어드는 판이니 동전이 천대받는 것은 피할 길이 없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동전 하나도 소중히 여길 수밖에 없었던 어린 시절이 기억에 선명한데, 이제는 지폐로 교환하는 것조차 손이 많이 간다고 환영받지 못하는 일이 된 것이다. 그래도 아직 화폐 가치가 있으니 한 번은 넘어야 할 산이다. 집에 있는 동전을 모아 모아 조만간 교환을 해야겠다.



동전을 생각하면 어릴 적 늘 집 한편에 있던 빨간색 웃는 돼지저금통이 생각난다. 문구점마다 망에 담겨 문 앞에 걸려있던 크고 작은 빨간 돼지저금통. 배를 가르지 않는 한, 한번 넣으면 꺼낼 수 없어 돈 모으기와 기다리기 훈련을 같이 할 수 있는 가정 아이템이었다.  

 

잔돈 한 푼도 귀하던 시절, 엄마는 늘 말랑말랑한 플라스틱 돼지저금통에 동전과 천 원 자리 지폐를 모았고, 어린 우리에게도 뭐 사 먹고 남은 잔돈은 저금통에 넣도록 가르치셨다.


돼지는 오랜 시간 야금야금 동전과 지폐를 먹고 살 오르듯 속이 까맣게 찬다. 무심하다 한 번씩 보면 절반이 차 있기도 했고, 기다림이 길 때면 돼지를 들어 형광등 아래서 얼마나 찼나 비춰보기도 했다. 그러다 엄마가 천 원짜리를 접어 넣는데 돼지가 더 이상 받아들이지 못하는 날이 온다. 돈을 튕겨낼 만큼 가득 차면 그날이 된 것이다.

 


돼지를 잡을 때면 엄마는 방 한가운데 신문지를 깔고 우리 삼 남매를 둘러앉힌 후, 과도를 가져와 돼지를 뒤집어 배를 갈랐다. 말랑한 돼지는 과도질 몇 번에 금세 가득 채워둔 동전을 우르르르르 쏟아냈다. 겉으로 보기와 달리 많은 동전과 지폐가 흘러나왔다.

 

엄마는 지폐를, 우리는 동전을 그때부터 부지런히 세기 시작한다. 돈 냄새가 진동한다. '돈 냄새'라는 말은 추상적으로 쓰일 때가 많은데, 저금통 안의 동전과 지폐에서는 쇠냄새뿐 아니라 사람냄새가 밴 쿰쿰한 종이냄새, 먼지냄새 등이 섞여 묘한 냄새가 났다. 우리가 동전을 10개씩 쌓아서 가지런히 나열해 놓으면 엄마는 카운트하며 봉지에 담으셨다. 그 시절 꽤 큰 금액이 돼지에게서 나오곤 했던 걸로 기억한다. 엄마는 그 돈으로 집에 꼭 필요한 굵직한 물건(가전제품 등)을 사는데 보태고, 그렇게 우리에게 티끌을 모으면 산만큼 커짐을 직접 보여주시곤 했다. (그렇게 배웠건만 나는 왜 모으지 못하는지 알 수 없다)



실물 화폐의 쓰임이 현저히 줄어든 시대, 이제는 저금통도 온라인에다 만든다. 나도 동전이 생기지 않은지 오래이니 아마 집에 쌓인 동전들을 교환하고 나면 아날로그 저금통을 유지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런데 꽤 큰 맥주병 저금통을 버리기는 아깝고 그냥 두자니 아쉽다. 저금통에 꼭 동전만 넣으라는 법 있나?


갑자기 재밌는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미래의 나에게 보내는 편지를 저금해 보는 것이다. 땅에 묻지 않고, 병에 담지 않고(와.. 세기말 감성), 저금통에 저금하는 것. 어떨까? 물론 나에게 보내기 메일 등으로 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나에게 하고 싶은 말, 좋은 글귀, 다시 되새기고 싶은 이야기들을 손으로 써서 저금통에 모았다가 1년 뒤에 랜덤 순서로 꺼내보는 것이다.


먼지처럼 흩어지고 지나버리는 일상에서 내가 어떤 생각을 했었는지, 어떤 상황에서 어떤 마음이었는지, 왜 그런 편지를 썼었는지. 내가 나라는 친구에게 남긴 말들을 나중에 돼지 잡듯 열어서 보면 일기와는 또 다른 느낌이지 않을까. 저금통을 비우고 나면 한번 해봐야겠다.



*사진: UnsplashAndre Taiss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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