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아홉 달과 아직 남은 세 달
추석 연휴가 시작되었다.
대부분의 직원들은 회사 지침에 따라 오전 근무만 하고 퇴근했지만, 오늘 나는 혹시 모를 비상 연락을 대비해 Full time 근무를 했다. 그 혹시 모를 비상 연락은 단 한통도 오지 않았지만 부서 특성상 누구 하나는 남아있어야 모두의 마음이 편했다. 언제나 그렇듯 대비를 하면 아무 연락이 없다. 자고로 비상 연락이란 미처 대비하지 못했을 때 요것 봐라 하고 들이닥치는 것이었다.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명절 연휴 전날 오후는 그리 비상스러울 일이 없으므로(설령 있다 하더라도 우리에겐 휴대폰이 있지 않은가) 다 같이 업무를 일찍 종료하겠노라 보고해도 뭐라 할 사람은 없을 텐데, 아직까지 이 시스템에 변경은 없다.
직원들을 일찌감치 집으로 보낸 사무실은 조용했다. 나는 정리해야 할 것들을 정리하며 남은 오후 시간을 보냈다. 다음 주 업무를 미리 체크하고 10월 한 달의 일들을 예상해 보면서 달력을 넘기는데
이런. 올해 달력이 세장 밖에 남지 않았다.
1월 말부터였던 것 같다. 사스나 메르스처럼 잠깐일 줄 알았다. 우주 어디선가 타노스가 손가락을 튕겼을까 싶은 전 지구적 바이러스 재난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나는 회사에서 임직원 해외 출장 지원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모든 출장이 끊기면서 몇 달간 갈 곳을 잃어버린 사람 같았다. 출근을 했지만 근무 같지 않은 근무를 했다. 늘 해오던 일이 갑자기 멈춰져 버리는 상황은 모두에게 그렇듯 살면서 처음 겪는 일이었고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경험이었다. 그 생경한 한가로움은 내가 있는 회사 곳곳을 가시방석으로 만들었고 나라는 존재마저 희미해지는 우울감을 겪게 했다.
외교부 해외안전여행 홈페이지에 올라오는 각국의 출입국 제한 사항을 들여다보면 올림픽 경기 중계에서나 들을 수 있는 나라 이름들이 줄을 지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상투메프린시페, 코트디부아르, 트리니다드토바고.... 나라 이름을 읊어주는 아나운서의 올림픽 중계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점점 그 수도 늘어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 세계가 바이러스를 막느라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중국은 대륙임을 과시라도 하듯, 간쑤 성, 광둥성, 베이징시, 쓰촨 성... 각 성별로 다 다른 출입국 제한사항이 리스트의 네 페이지를 차지했다. 오라고 문을 열어줘도 안 갈 것인데 말이다.
가고 싶어도 갈 수 없고 오고 싶어도 올 수 없는 지경에 빠져 세상의 문이 닫히는 경험 속에 아홉 달이 지났다.
어릴 적 SF영화에서 봤던 것 같은, 자동차는 아직 날아다니지 않지만 현실이 되었던 숫자 '2020'을 야심 차게 맞이했던 날이 아득하다. 벌써 10월인가... 의 벌써는 숱한 해를 보내며 느꼈던 벌써의 느낌과는 다르다. 어느 누구도 겪어본 적 없는 초유의 사태 속에 참 길게 이어져온, 그렇지만 어느 새가 되어버린 벌써다. 10월과 11월 그리고 12월이면 수많은 기록적인 사건들로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2020년이 사라질 예정이다. 달력에선 사라져도 2020년의 그늘 아래서 내년을 살게 될 것 같지만, 올해만 두고 보자면 잃어버린 아홉 달 뒤로 아직 남은 세 달이 있다.
이번 연휴 기간은 소박하게 보내며 올해의 남은 세 달에 대해 고민해보려 한다.
나처럼 실행력이 부족한 사람은 계획만 잘 세우려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 단점이라도 써먹어야 불안함이 덜하니 또 뭔가 생각하고 계획하고 싶어 진다. 앞으로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까. 코로나가 앞당긴 급변하는 미래에 나는 어떤 모습으로 존재해야 할까. 사실 고민한다 해도 드라마틱한 별 수는 없다. 나아갈 방향을 정하고 흔들리지 않게 마음을 한번 더 다잡는 정도가 되겠지. 난무하는 계획의 반만 실행해도 성공이다.
*사진출처: unsplash.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