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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린 Jan 11. 2021

하와이 검은 모래, 검정치마

손잡고 걷던 밤바다, 검은 모래 위엔 부서진 유리만 남았네


우리가 알던  장소는 

무덤이 되었겠죠
추억을 고이 덮은 채

무궁화가 한가득
태평양 저 멀리 피었네


하와이에 가본 적이 없지만, 하와이라는 곳은 아름다운 해변과 유명한 관광지답게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이 들뜬 마음으로 모여있고, 그래서 활기차고 예쁜 곳이라고 생각했다. 그곳에 검은 모래로 이루어진 해변이 있을 거라고도 알지 못했던 나는, 이 노래를 듣고 그곳에 검은 모래로 이루어진 해변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노래와, 검은 모래,

그리고 하와이.


이제 나에게 하와이는 헤어진 후

홀로 걸을 나의 장소가 되어있다.


어쩌면 이 곡을 쓴 화자도 하와이에 사랑하는 사람과 가보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대가 가고 싶은 섬, 그래서 나도 가고 싶었던 섬. 그러나 나는 못 가요. 보다시피 내 발은 여기 아직 묶여 있어요. 우리가 함께 갈 수 없으니까요. 우리가 가고 싶었던 그 장소는 무덤이 되었겠죠. 우리의 추억을 고이 덮은 채, 무궁화가 한가득, 태평양 저 멀리 피었네. 꿈에서 손잡고 걷던 밤바다, 검은 모래 위엔 우리의 모습이 아닌 부서진 유리만 남았어요.


그래서, 이 노래가 이렇게

슬프고 먹먹한가.


세상에 나 혼자인 것 같을 때, 무작정 어딘가로 떠나고 싶었을 때, 가고 싶었던 곳이 있었다. 아무도 나를 모르고, 나를 찾지 않고, 신경 쓰지 않을 그런 곳에서, 나는 강가에 앉아지는 해를 바라보며 맥주를 마시고 생각에 잠겨 울컥하기도 하고, 후련하기도 하고, 그러고 싶을 때가 있었고, 그러고 싶은 곳이 있었다. 노래를 들을수록, 하와이의 검은 모래 위가 나에게 또 하나의 그런 곳이 되었다. 이 노래 속의 화자에게도, 그런 곳인가.



그대가 가고 싶은 섬,

나는 못 가요

알다시피 내 지은 죄가

오늘도 무겁네요


우리가 알던 그 장소는

무덤이 되었겠죠

추억을 고이 덮은 채

무궁화가 한가득

태평양 저 멀리 피었네


그대가 가고 싶은 섬,

나는 못 가요

보다시피 내 발은

여기 아직 묶여있어요

우리가 듣던 그 파도는

돌아오지 않아요

손잡고 걷던 밤바다,

검은 모래 위엔

부서진 유리만 남았네


오, 작년의 그늘이

나를 따라와요

드디어 내 그림자가

되려나 봐요

하지만 한 줌 햇살도

나는 못 가져가요

내 방은 작은 공기도

움직이지 않는 걸요


우리가 알던 그 장소는

무덤이 되었겠죠

추억을 고이 덮은 채

무궁화가 한가득

태평양 저 멀리 피었네


노래를 들으면 떠오르는 이미지, 상황, 이야기, 분위기 등이 있다. 이 노래는 제목 그대로 ‘하와이 검은 모래’의 해변을 연상시킨다. 하와이를 한 번도 가본 적은 없는데, 내 머릿속의 해변가, 석양, 사람들, 파도 등이 이 노래에 맞게 조합되어 하나의 풍경이 펼쳐진다. 불을 끄고 눈을 감고 아무런 소음도 없이 이 노래만을 듣고 있으면 나는 어느새 해변에 누워있다. 해변의 모래 위에 누워서 이 노래를 듣고 있다. 신기한 건, 내가 여태까지 생각했던 하와이는 눈부시고 아름답고 활기찬 모습이었는데, 검은 모래가 펼쳐진 조금은 쓸쓸한 곳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검정치마의 이전 앨범 <TEAM BABY>의 전곡도 들을 만큼 들었다 - 검정치마의 노래를 들을 만큼 들었다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올까? 그런 곡도, 그런 때도 살면서 없을 것 같다 - 할 자신이 없어서 최근 앨범 <THIRSTY>의 노래들도 들어보지 않은 곡이 더 많았는데, 한곡씩 듣기 시작하는 요즘에 이 노래를 듣고 정말이지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처음 이 앨범이 발매되는 날, 앨범 전곡을 들었을 때에도 느껴지지 않던 이 감정은 우연히 어느 날 내 귀에, 내 마음에 들어왔다. 나는 감히 이 곡을 <THIRSTY> 앨범에서 가장 사랑하는 노래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섹시하고 나태한 검정치마의 목소리와, 적당히 슬프고 황홀한 멜로디에, 클래식한 분위기, 그리고 시적인 가사까지. 내가 좋아하는 모든 요소들이 합해진 것만 같은 이 노래는 색소폰 연주가 나오는 부분이 단연 클라이맥스다. 색소폰 연주가 끝날 때쯤 ‘I Like Watching You Go’의 ‘ 난 네가 학교 가는 뒷모습이 너무 좋아’ 이 부분의 멜로디가 나올 때는 진짜. 하. 이건 사실 나도 몰랐는데, 되게 재밌는 게 검정치마의 음악들을 멜론에서 듣다가 나만큼이나 무자비한 감정의 동요를 느낀 사람들의 댓글들을 보면 공감도 하고, 이런 곡에 대한 정보나 해석들도 알 수 있다. 또 누가 나만큼이나 이 곡을 사랑하는가, 하면서 댓글들을 읽다가 이 사실을 발견하고 그때부터 들을 때마다 소름 돋고, 멜로디에 가사를 따라 부름 (...)



너무 좋아서 아직까지 리뷰를 쓰지도 못한 ‘Hollywood’ 만큼이나, 이 곡 또한 너무 좋아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지금 떠오르는 이 감정들을 남기기 위해 쓰는 이 곡의 리뷰는 아마 앞으로도 많이 수정되고 추가될지도 모른다. 여전히 나는 하루 종일 이 노래를 듣고 있기 때문에.


어쨌거나, 무튼, 그래서,

하와이에 꼭 가서 이 노래를 들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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