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종은 아닌데요, SNS는 달고 삽니다.
그 시작은 네이버 블로그였다. 임신 8주 차에 아이를 떠나보내고, 슬픈 마음을 달랠 길 없어 무엇이라도 써보자는 마음이었다. 슬픔을 끄집어내 마음껏 위로받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이를 잃은 건 나만이 아니었으니까. 동생이 생긴다는 기대에 부풀어 매일같이 행복해하던 첫째, 그리고 장군감이 태어날 거라며 아들을 간절히 바라던 남편과 시부모님까지. 그들 역시 희망이 무너진 자리에서 상실의 아픔을 겪고 있을 터였다. 그렇기에 힘들다고, 그런 나를 알아봐 달라고 유난을 떨 수는 없었다.
게다가 당시, 첫째는 보육기관에 다니고 있지 않았다. 육아휴직을 하고 가정보육을 하던 중이었기에 어디든 자유롭게 훌쩍 떠날 수 있는 몸도 아니었다. 몇 안 되는 친구들을 만나 수다를 떠는 일조차 많은 시간과 수고가 필요했다. 그래서였을까. 누구라도 괜찮을 것 같았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어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어떤 사람이든 괜찮을 것 같았다. 그렇게 난 SNS 세계 속으로 빠져들었다. 동네 마실 가듯 매일같이, 참새가 방앗간을 찾듯 뻔질나게도 들락거렸다.
글을 쓰는 과정 속에서 나를 돌아보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치유하는 일이 참으로 좋았다. 그보다 더 좋았던 건, 글을 매개로 누군가와 소통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랜선 친구들에게 힘들다고 속마음을 내비치기도 하고, 슬픈 일에 하소연도 하고, 기쁜 일에 축하를 받기도 했다. 비슷한 상황에 놓인 엄마들이었기에 우리는 서로를 진심으로 응원했다. 우린 서로가 서로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주었다.
어쩌면 중독이라는 표현이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몸이 아프지 않은 이상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SNS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8년 차가 되었다.
블로그, 인스타그램, 브런치, 스레드까지 나와 결이 맞는 SNS라면 어디든 달려가서 계정을 오픈하고 글을 썼다. 회사를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시간적 한계로 선택과 집중을 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그러다 최근에 스레드를 통해 한 학생을 알게 되었다. 현재 중학교 2학년이라는 아이는 유년기부터 아동학대와 성폭행, 학교폭력으로 인해 힘든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그녀는 스스로를 왕따, 찐따라고 불렀다. 학교 가는 일이 죽을 만큼 싫고, 학교가 망해버렸으면 좋겠다고 했다. 가끔 올라오는 사진 속의 인형들과 친구처럼 지내며 외로움을 견디고 있는 듯 보였다. 매일 여러 개의 글이 올라오는 걸 보면서 가슴이 아려왔다. 학교에 가는 것이 죽기보다 싫지만, 전학을 보내주지 않는 아빠 탓에 어쩔 수가 없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자신의 상황과 삶을 비관하면서도 죽고 싶다가 아니라, 살고 싶다고 외치고 있었다. 아직 못 다 핀 꽃 한 송이가, 처절한 몸부림으로 생명을 구걸하고 있었다. 나 여기에 있다고. 살려 달라고, 제발 자신을 좀 봐 달라고.
절박하고도 애달픈 마음이 가닿은 것일까. 스레드에서 그녀의 짧은 글들이 삽시간에 많은 어른들에게 퍼져 나갔다. 많게는 조회수가 30만 회가 나왔고, 댓글은 천 개 이상 달렸다. 그녀에게 진심 어린 응원과 격려, 위로의 댓글들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일주일도 되지 않은 사이에 2천 명이 넘는 팔로워를 얻었고, 아이는 수많은 친구를 얻었다. 어떤 피드를 올리든 응원해 주는 이모와 삼촌 부대가 생긴 것이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편을 들어주는 든든한 내 편 말이다.
스스로의 삶을 비관하던 아이는 며칠 전부터 조금씩 활력을 찾기 시작했다. 미래를 기다리는 희망에 찬 글이 올라오기도 했고, 아이디도 새로 바꿨다고 했다. '친구가 없어요'에서 '친구가 많아요'로(아이 보호를 위해 아이디는 비공개).
이것이 바로 SNS의 순기능이 아닐까.
말 한마디 건넬 곳 없던 아이가, 수천 명의 응원에 힘입어 살아갈 이유를 찾았다. 짧은 댓글 한 줄이, 한 아이의 세상을 바꿔놓은 것이다.
아이의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지난했던 시절의 내가 겹쳐 보였다. 학교 폭력과 가정 내 불화로 얼룩진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내며, 죽고 싶다는 생각을 수백 번도 넘게 되뇌었기 때문이다. 하소연할 곳 없이 혼자 감당해야 했던 그 무게가, 아이의 짧은 글들 사이사이에서 고스란히 느껴졌다. 살고 싶다고, 제발 나를 봐 달라고 외치던 아이의 목소리가, 오래전 내가 삼켜버린 말들과도 꼭 닮아 있었다. 그랬기에 더 마음이 쓰였고,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내어 짧지만 자주, 마음을 담은 댓글을 남겼다.
공감이란 결국 내 상처를 꺼내 타인의 아픔 옆에 나란히 놓아보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나 또한 그 시절을 버텨냈기에, 아이도 그럴 수 있을 거라 믿는다. 그리고 그 믿음을 댓글 한 줄에 담아 매일 조심스레 건네 본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용감한 아이라는 생각이 든다. 숱한 배신과 외면 속에서도 세상에 등을 돌리지 않았다는 것, 두려움을 무릅쓰고 먼저 손을 내밀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믿었던 사람들에게 거듭 상처를 받다 보면 더는 사람에 대한 기대가 사라지게 되는 법인데, 아이는 계속해서 사랑을 갈구하고 있었다.
만난 적도, 누군지 알 길도 없지만 녀석의 용기는 참으로 빛났다. 겨우 중학교 2학년 학생일 뿐이지만, 살려 달라고 말할 줄 아는 용기 있는 아이였다. 살고자 하는 마음이, 포기하고 싶은 순간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컸기에 가능했던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SNS라는 공간이 있었기에 그 용기가 수많은 이들에게 가닿을 수 있었을 것이다.
부작용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많지만, 내가 8년간 경험한 SNS는 분명한 순기능이 있었다. 외로움을 달래고, 상처를 보듬고, 때로는 누군가를 바꿔놓기도 했다. 짧은 시간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말이다. 어쩌면 그것이 SNS가 가진 가장 큰 순기능일지도 모른다.
이제는 희미해져버린 청소년기의 기억을 떠올리다 보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그때 누군가 단 한 사람이라도 진심으로 내 편이 되어주었다면, 내 인생은 달라졌을까. 작은 후회와 함께 거뭇한 기억들이 다시 마음 깊숙히 밀려온다.
용기보다는 두려움 탓에 손을 내밀지 못했던 나였기에 더더욱, 그런 사람이 되어주고 싶다. 외로운 이의 글에 진심 어린 댓글 하나를 남기는 일, 힘들다는 목소리에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이는 일, 내 이야기로 타인의 하루에 작은 위로를 건네는 일. 그렇게 나도, SNS가 건넸던 따뜻한 손길을 누군가에게 돌려주고 싶다.
아직 피지 못한 꽃 한 송이가
끝내 포기 없이
부디 활짝 피어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