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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꽃 May 19. 2021

문장을 담다, 닮다

글자의 질량





스무 살, 우연히 대학 도서관에서 에쿠니 가오리 작가의 소설 '반짝반짝 빛나는'을 만나게 되었다. 그 당시 나는, 에쿠니 가오리라는 작가를 알지 못했고 제목이 예쁜 탓에 내용도 따뜻하고 예쁠 거란 단순한 기대감에 책을 골랐던 것 같다.


하지만 나의 이런 기대를 비웃기라도 하듯, 그 당시 '반짝반짝 빛나는'의 소재는 한 편의 막장 드라마(?)처럼 파격적이었다. 사랑하는 애인이 있는 동성애자 남편이라니, 이게 말이나 되는 걸까.


하지만 에쿠니 가오리 작가 특유의 담담한 문체로, 쇼코(여자 주인공)의 입장도 무츠키(남자 주인공)의 입장도 이해가 가도록 그려냈다. 우리의 사회적 기준과 잣대로 그들의 가정을 비난하거나 판단할 수 없게, 작가는 그들의 서사를 만들어갔다. 그 지점이 놀라웠고, 참 매력적인 작가란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작품을 읽을수록 에쿠니 가오리 작가가 좋아졌다. 어딘지 비상식적인 소재를, 아주 차분하고 담담하게 읊조리는 듯한 느낌. 그녀만의 차분한 에너지가 좋았다. 그녀의 소설을 읽을 때면, 내 현실의 문제가 아주 작게 느껴졌다. 그래서 현실의 문제를 조금 내려놓고 그녀가 만들어놓은 시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소설의 끝까지 걸어갔다가 현실로 돌아오면, 내 마음은 한결 가볍고 단단해져 있었다. 이런 탓에 대학시절 나는 마음이 복잡할 때면 언제나, 에쿠니 가오리 작가의 소설을 찾아 읽곤 했다.

이 에세이집도 에쿠니 특유의 담담함이 깃들어 있다. 아주 담담하게 얘기하지만 그녀 인생의 여정이 이곳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하나의 예로, 남편과 이혼하고 홀로 집으로 돌아가 외로움을 마주하기 싫었던 에쿠니. 그래서 그녀는 작업실에서 주로 생활을 하며 집으로의 귀가를 피해왔다.  그러던 그녀가 메밀 국숫집에서의 기이한(?) 상황을 겪고 배부르게 순두부와 어묵을 먹고 웃으며 집으로 돌아가던 장면은, 역시 에쿠니 가오리 작가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겁지도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게, 그녀만의 따뜻함과 유쾌함으로 그녀의 내면을 잘 표현했구나 싶었다. 그리고 나도 이렇게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조금 곁들였다.


출처: 에쿠니가오리 에세이집 [한동안 머물다 밖으로 나가고 싶다] 중에서



책에서 발췌한 몇 구절들



-열세 살에서 열다섯 살. 그날들에 대해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고독입니다. 그릇장 속에 있지만, 사용되지 않는 그릇처럼 고독했죠. 그래서, 이미 그렇지 않은 지금, 그때의 그 고독은 필요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릇장 속에서 가만히 웅크리고 있던 서늘한 시간, 그 어슴푸레함. 나는 그곳에서 내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릇장 속에서/ P.37]

: 그녀만의 표현에 놀랐고, 공감이 되었고, 위로를 받았다. 아이를 키우며 세상과 동떨어져 있는 고독함을, 나만 뒤처지는 듯한 불안함을 느끼곤 했다. 지금도 그렇고. 그런 나에게  문장은, 다른 어떠한 말들보다  위로가 되었다.

나이를 먹으며 나를 가장 괴롭히는 건, 나를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는 나의 모습을 발견할 때이다. 그런 나에게, 이보다 더 큰 위로의 말이 있을까.


-글자에는 질량이 있어, 글자를 쓰면 내게 그 질량만큼의 조그만 구멍이 뚫린다... (중략)... 가령 이 계절이면 나는, 겨울이 되겠네요 하고 편지에 쓸지도 모르는데, 그러면 그때껏 나의 안쪽에만 존재하던 나의 겨울이 바깥의 겨울과 이어진다. 쓴다는 것은, 자신을 조금 밖으로 흘리는 것이다. 글자가 뚫은 조그만 구멍으로... (중략)... 아무튼 상대가 그 편지를 읽는 것은 오늘이 아니라서, 그날은 하늘에 구름도 껴있지 않고, 바람도 불지 않고, 내가 사는 구역의 쓰레기 수거 날도 아니고, 나의 아침은 토스트이거나 사과일 수도 있다. 그런데도 종이 위에 있는 것은 틀림없는 오늘이다. 쓴다는 것은 시간을 약간 멈추게 하는 것. 멈춰진 시간은 거기에 계속 머문다.

[투명한 상자, 혼자서 하는 모험/ P.52~53]

: 이따금씩 잊을만하면  글이 쓰고 싶고, 다른 일을 하다가도 다시 돌아와서 글이 쓰고 싶은  보면, 때로 '이것도 병이다 !'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다. 그만큼 나는 일정 시간이 지나면, 다시금 글이 쓰고 싶어 진다. 그래서 키보드 위에 손을 올리고 깜빡깜빡 반짝이는 커서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리고  공간을 글자로 채워간다. 그리고 내가  글을 읽고  읽는다. 그럼  세상에, 나와  공간뿐인 것처럼 느껴진다.

나의 멈춰진 시간들이 나의 글 속에서 언제나 영원히 머문다는 것이, 참으로 기쁘고 내게 안도감을 준다. 나의 삶이 의미 없이 흘러가 버리지 않게, 내 곁에 남겨두는 방법은 역시 '쓰는 것'이다. 쓴다는 것을, 게을리하지 말 것.


-세계는 내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내게 찾아온 자유와 행복. 올바른 판단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다. 세계는 이렇게 조화롭고 아름답고, 나는 그저 거기에 있기만 해도 된다.

[모색과 판단-내 인생을 바꾼 소설/ P.66]

: 과연 내가 인생을 잘 살아가고 있는지, 세상을 마주할 때 올바른 판단을 내리고 나아가는지, 늘 불안했다.  

그런데 올바른 판단이란 것은, 어떤 기준으로 정의 내릴 수 있는 걸까. 누가 나를 온전히 평가 내릴 수 있는 걸까. 그 물음에 우리는 명확하게 답할 수 없을 것이다.

정답이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는 시험보다 어려운 인생을 매일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작가는 말하고 있다. 세계는 우리에게 어떠한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고. 그저 우리는 거기에 있기만 해도 된다고.

더 나은 인생을 살아가야만 할 것 같고, 더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만 같은, 내 어깨를 짓누르는 어떤 무언의 압박에서, 내가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 있는 문장을 만나서, 행복했던 순간.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곳으로 떠나는 일이고, 떠나고 나면 현실은 비어버립니다. 누군가 현실을 비우면서까지 찾아와 한동안 머물면서, 바깥으로 나가고 싶지 않게 되는 책을, 나도 쓰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소설의 안과 밖-문학적 근황/ P.129]

 : 책을 읽으며 나의 현실이 비어버린 다는 것을 왜, 나는 인지하지 못했을까. 이 문장을 읽고 놀라움에 아! 소리가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그만큼 내게는 충격적인(?) 사실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마음이 지치고 힘들 때,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스트레스를 풀고 재충전의 시간을 갖는다. 나는 마음이 힘들 때면, 글 속으로 찾아들어와 주인공을 만나거나 문장을 필사하며 공허해진 마음을 채우기도 무너진 마음을 세우기도 했다. 마치 순간 이동을 하듯, 현실에서 책 속으로 떠나온 나는, 아주 안전하게 그곳에서 머물다 갈 수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 사실을 깨닫게 되자 문득 내가 좋아하는 작가님들의 이름이 스쳐 지나가며, 그분들의 책을 오래오래 간직해야겠다고.


그리고 아주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바람이겠지만, 언젠가 나도 한동안 머물다 나갈 수 있는 책을 쓸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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