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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 안 Feb 16. 2023

빈집

두 번째 이어짐


천천히 해가 지고 조금씩 노을로 물들어가는 하늘을 배경으로, 저기, 마을의 서쪽 언저리에 아주 적은 양의 여우비가 사뿐사뿐 뿌려지고 있었다. 혈기왕성해진 고양이가 요즘 저쪽 동네에 볼일이 많다고 했던 것이 생각나, 혹시 저 비에 젖지는 않았을까 하고 생각했다. 걱정은 아니었다. 한창인데 비에 좀 젖은 들 어떠하리.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잠시 뒤 고등어 무늬를 한 고양이가 흠뻑 젖은 채로 나타나 그쪽에서 털레털레 걸어왔다. 그것을 담벼락은 말없이 지켜보았다. 고양이는 약간 심통이 난 듯 보였다.


“비에 맞아 기분이 영 안 좋은가 보군.” 오돌토돌 빛바랜 붉은색 벽돌로 된 담벼락이 인사대신 말을 건넸다.

“그래-” 고양이가 부르르 떨어 자신의 털에 물기를 털어내며 말했다.

“그래도 덕분에 뜬 무지개는 이쁘지 않나.”

“그래- 그래-” 고양이는 자신의 목덜미와 몸 이곳저곳에 남은 물기를 혀로 열심히 닦아내며 대답했다. 그리고선 담벼락 위로 사뿐히 올라가 자리를 잡은 뒤 고개를 돌려 말없이 무지개를 감상하였다. 담벼락의 말처럼 이쁜 무지개였다.


둘이 처음 알게 된 것은 고양이가 아주 어렸을 때였다. 고양이는 동네에서 유명한 미친개 한 마리에게 쫓기고 있었고 때마침 담벼락과 마주쳐 그를 잽싸게 타고 올랐다. 그 조그만 것이 빠른 판단력과 날카로운 발톱, 그리고 가벼운 몸놀림으로 자기 자신을 구한 것이다. 담을 오를 수 없는 미친개는 그저 담벼락 밑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꼬마 고양이를 향해 거품을 물고 동네 시끄럽게 짖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러다 개는 결국 제 풀에 지쳐 침을 질질 흘리며 어디론가 가버렸고, 고양이는 그제야 숨을 한번 크게 내쉬며 담벼락에게 인사했다. “고마워, 너 아녔으면 큰일 날뻔했어.”

“나야 그냥 여기 서있었을 뿐인 걸, 뭐” 담벼락이 말했다. “벽을 타는 솜씨가 아주 제법이던데?”

“아, 미안- 내 발톱이 많이 아팠지?”

“괜찮아, 괜찮아. 그 정도야 아무렇지도 않다고.”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 고양이가 너무 가벼워 아무리 자신을 타고 올라도 하나도 아프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담벼락은 이 자그마한 고등어 무늬의 털북숭이가 그저 기특할 뿐이었다.


그것을 인연으로 고양이는 담벼락을 자주 찾았다. 그리고 둘은 대체적으로 무용한 것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마치 지금처럼 고양이가 담벼락 위에 가만히 앉아서 둘이 같이 무지개를 보고 있는 것 같이 말이다. 둘은 쓸데없는 수다도 참 많이 떨었다. 예를 들어 물속의 물고기들도 과연 하품을 할지, 재채기도 할는지, 장미에는 왜 가시가 나는지, 무지개 속에 들어가서 세상을 보면 모든 것이 무지개 색으로 보일지, 이런 것들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래, 뭐 어디에 딱히 쓸데는 없는 질문들 일지라도, 그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고양이의 밤을 더 밝혀주었고, 그의 눈을 반짝이게 하였으며, 그의 우주를 더 크게 하였다.


물론 고양이보다 훨씬 더 오래전부터 존재한 담벼락은 고양이가 가지고 있는 세상에 대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대부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도 세상을 직접 알아가는 것이 젊은이의 특권임을 알기에 담벼락은 어설프게 고양이를 가르쳐 들려하지 않았다. 그저 맞장구를 쳐주며, 잠자코 고양이가 스스로 세상을 깨우쳐가는 것을 지켜보며 응원해 주었다. 그렇게 도란도란 수다를 떠는 동안 담벼락은 고양이에게 그늘이 되어주고, 바람막이가 되어 주었으며, 잊을만하면 나타나는 동네의 미친개에게선 피난처도 되어주었다.


하지만 고양이에게, 영원한 듯이 한 곳에 우직하게 서있는 담벼락은, 그늘과 바람막이로서의 기능적인 것 보다도, 그 이상의 정신적인 안식처로서의 의미가 더 컸다. 길에서 태어난 고양이라도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곳, 언제나 자신의 편이 되어줄 하나인 것이다. 「의지할 수 있다는 믿음 만으로도 큰 의지가 되는 법이다.」 그 존재가 고양이에게는 담벼락이었다. 그 존재가 있었기에 고양이는 동네 여기저기, 구석구석, 그리고 이 동네 저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자신만의 세상을 탐험을 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언젠가 담벼락이 고양이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집고양이가 아닌 길고양이로 태어난 것이 불공평하다고 느껴진 적 없었느냐고.

“솔직히,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고양이는 대답했다. “하지만 이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는 건 진작에 깨우쳤어. 불공평하다는 것에 대해 너무 사로잡혀서 화만 내봤자 나만 더 불행해질 뿐이지-”

정말이지 씩씩한 고양이라고 담벼락은 새삼 감탄했다.

“애초에 태어나기를 있는 집 귀한 고양이로 태어나서 분양이 됐다면 겨울에도 등 따시고 평생 편히 좋은 사료만 먹으며 살 수 있었겠지. 하지만 그렇게 태어나지 못한걸 누구에게다 대고 한탄을 하겠어? 길고양이로 태어나서 인간의 지붕 아래 살려면 내가 어렸을 때 눈도 땡그랗고 그나마 조금 귀여웠을 때가 마지막 기회였겠지만 이젠 그것도 오래전 일인걸.”

“그럼 그러지 왜 안 그랬어? 넌 충분히 이쁘게 생긴 고양이잖아.”

“그때 내가 좀 더 약게 굴었어야 했다는 거야?” 고양이가 킥킥 웃으면서 말했다. “물론 겨울에 너무 추울 땐 나도 ‘아 그때 내가 왜 다른 고양이들처럼 영악하게 행동하지 않았을까-’ 후회하긴 하지만, 그래도 난 길고양이의 자유로움이 좋아.”

고양이가 문득 드높은 가을 하늘을 보며 말했다. “내 위에 지붕은 덮여있지 않더라도 대신 내 천장은 이렇게나 높으니까-”


말은 그렇게나 씩씩하게 한 고양이였지만, 사실은 마음속 깊은 한 곳에 일말의 걱정, 한 점의 불안감도 없었던 것은 아녔다. 물론 지금 당장의 선선한 날씨야 좋겠지마는, 그가 말했던 그 혹독한 겨울이라는 현실이 바로 그다음이니까 말이다. 담벼락에게 그렇게 의기양양하게 말은 하고 있지만, 그는 어쩌면 스스로 자신의 현실을 부정하느라고 일부러 더 그러는 것은 아닐까라고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궁금해하던 세상에 대해서 알아갈수록 더 심화되었다.


담벼락 또한 기특하게 말하는 고양이의 말을 들으면서 마냥 마음이 편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고양이에게 어떤 의미인지, 얼마나 의지가 되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알고 있기에 쉬이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도 영원하지는, 지금처럼 마냥 이렇게 우뚝 서있어 줄 수는 없을 거라는 것을. 자신의 집이 「빈집」이라는 것은 큰 문제라는 것을 고양이에게 차마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담벼락이 지키고 있는 이 집은 이미 십 년도 넘게 비어있는 상태라는 것이었다.


담벼락과 고양이는 이제 물러나려는 노을과 깊어가는 밤의 사이 어딘가를 함께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양이는 담벼락 위에서 스르르 잠들었다.


한창 새벽이 되자 고양이가 일어났다.

“오늘도 서쪽으로 가려고?” 담벼락이 물었다.

“그래-” 고양이가 대답했다. ”내가 세상에 대해 궁금한 것들은 거의 다 마을의 서쪽에 답이 있는 것 같아. 그곳엔 연못이나 인공 호수 따위도 있고, 공원에는 인간들이 심어놓은 장미들도 많아. 새들도 많이 지나다니니까 어쩌면 무지개에 대해서 물어볼 수도 있을 것 같고-“


부지런히 달려 해도 뜨기 전에 도착한 고양이는 호수에 자신의 꼬리를 살짝 담가 통통하게 살이 오른 떼깔 좋고 멍청한 붕어 한 마리를 꾀어내 잽싸게 낚아챘다. 아무리 멍청해도 자신이 하품을 하는지 안 하는지 정도는 말해줄 수 있겠지.

고양이는 지면에서 숨 가쁘게 헐떡이는 붕어의 아가미를 지그시 옥죄며 물었다. ”너네도 물속에서 하품을 하니? “

”네? “ 통통하고 멍청한 붕어가 잘 못 들었다는 듯이 되물었다.

”너네-, 물고기들도 말이야, 물속에서 하품을 해? 기침 같은 것도 하고? “ 고양이가 참을성 있게 다시 한번 물었다.

”네, 네, 저희도 당연히 하품을 하죠. 기침도 하고, 뭐든 다 하죠 저희도. 트림도 합니다. “ 붕어가 지방이 잔뜩 낀 아가미 틈 사이로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자신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와중에도 「그런 것 따위가 도대체 왜 궁금하느냐」는 말투였다.  


고양이는 머리가 살짝 띵했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잘 알 수 없었다. 애초에 어떤 기상천외한 대답을 기대했던 걸까. 물속의 동물들은 하품을 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싶었던 걸까. 혹은 하품 대신에 방귀를 뀐다거나, 아니면 적어도 입과 아가미가 아닌 다른 경로로 하품을 한다, 뭐 그런 신기한 대답을 원했던 걸까.

더는 할 말이 없었다. 하품을 하고, 기침도 하며, 심지어 트림도 한다는데, 그렇다면 그런 것으로 결론이 났을 뿐이다. 인공호수에서 멍청하고 비만인 붕어 한 마리를 이 이상 족친다 한들 그에게서 그 이상의 어떠한 설명을 듣겠는가. 입맛이 가신 고양이는 숨을 괴롭게 헐떡이고 있는 붕어의 배를 앞발로 툭툭 차서 다시 호수 안으로 방생해 주었다.


정오쯤이 되었을 때 고양이는 한 공원의 옆길에 피어난 장미들에 매료되어 다가갔다. 아무리 이쁘고 콧대가 높은 장미라 해도, 아니, 오히려 그렇다면 자신들에 대해서 말하는 것에 대하여 더 좋아하겠지.

고양이는 많고 많은 그들 중에서도 가장 붉고 풍성하게 피어나 깊은 향을 뿜어내는 장미에게 물었다. “장미는 왜 가시를 내나요?”

“뭐라고?” 붉고 아름다운 장미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세상에는 수많은 꽃이 있지만, 장미만은 「유난히」 가시가 돋잖아요. 왜 당신은 가시를 내는지가 궁금합니다. “ 가시만큼이나 까칠한 장미의 말투에 기가 눌린 고양이가 정중하게 다시 한번 물었다.

“그거야 당연히 장미가 아닌 다른 그 어느 꽃도 결코 장미일 수는 없기 때문이지. 네가 방금 말했잖아. 세상에는 수많은 꽃이 있지만, 장미만은 가시가 돋는다고. 오직 장미만이 장미이기 때문에 장미에겐 가시가 있어야 하는 거야.” 붉은 장미가 한심하다는 듯이 고양이에게 대답했다. 이제 막 여름이 끝났을 뿐인데 벌써 겨울 준비에 들어가느라 바쁜 와중에 「그런 것도 모르느냐」는 듯한 말투였다.


고양이는 그런 멍청한 취급을 받은 게 살짝 민망했고 약간은 억울했다. 그는 장미에게 그렇게 일차원 적인 질문을 한 것이 아니었다. ‘장미니까 당연히 가시가 나는 것이다’ 라는건 대답으로서 납득할 수 없었다. 고양이는 아마도, 장미의 가시가 자신에게 함부로 손대지 말라는 의미라거나, 이쁘기만 한 게 전부가 아닌, 남을 지키기 위한 울타리도 되어줄 수 있다는 그런 대답을 장미에게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고양이가 마을을 한 바퀴 돌며 곰곰이 생각해 볼수록, 곱씹어볼수록, 장미의 말이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그것은 마치 고양이 본인에게 뾰족한 귀가 두 개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에 누군가 이유를 묻는다면 자신또한 황당하지 않았을까. 장미의 가시는 그저 장미의 일부분인 것을, 그것 외에 다른 의미를 두려는 것은 고양이의 환상이고 욕심이었다.


해가 지고 어둑어둑해지자 고양이는 현실적이기만 한 세상의 대답들에 지쳐 잠시 나뭇잎이 다 떨어져 나간 앙상한 어느 가로수 위에 올라가 잠시 쉬기로 했다. 어쩌면 궁금한 것들은 그냥 궁금한 채로 있는 게 더 나았을런지도 모르겠다. 이런 식이라면 무지개에 대해서 만큼은 차라리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 더 이상 자신의 동심을 애써 파괴하지 않아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이름 모를 새가 고양이의 옆 가지에 푸드덕 날아와 앉았다.

그 이름 모를 새는 나무 위에 앉아 잔뜩 웅크리고 있는 고양이에게 대뜸 물었다. “자네, 무지개 속에 들어가 본 적이 있나?”

“뭐라고?” 고양이는 깜짝 놀라서 새에게 다시 되물었다.

“무지개 말이야, 얼마 전에 여기 사거리에 여우비가 내리고 무지개가 이쁘게 떠서 갑자기 생각이 났어. 왜, 어렸을 때 그런 생각 한 번쯤 해본 적 있지 않나. 무지개에 속에 들어가서 반대로 세상을 내다볼 수 있다면 세상이 온통 무지개 색으로 보일지 말이야.” 그 이름 모를 새는 고양이가 말을 끊을 새도 없이 말을 줄줄이 이어갔다.

“그게 말이야, 나도 그날 웬일인지 그게 문득 궁금해져서 하염없이 날아가 보았네, 무지개를 향해서. 그런데  무지개는 그냥 어느 순간에 싹 눈앞에서 사라지더라고, 그래서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내가 수소문을 해보니, 글쎄, 사실 무지개라는 건 실체 하는 게 아니라는 거야. 말하자면 비 오는 날의 아지랑이 같은 거지.” 이름도 모를 망할 놈의 새는 고양이가 그놈의 부리를 틀어막을 틈도 없이 고양이의 이 세상에 마지막 남은 낭만을 「뭐가 대수냐」는 듯이 누설해 버렸다. 그리고는 웃기지도 않게 푸드덕 날아가버렸다.


이제 더는 궁금한 것이 없는 고양이에게 세상이 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알고 보니 그가 궁금해하던 것들은 애초에 생각만큼 그리 신기하지도, 심지어 낭만적이지도 않았다. 어쩌면 신기하고 낭만적이라고 느꼈던 건 그저 그의 무지를 대신 채우고 있던 그의 상상력이 아니었을까. 「지금껏 쫓아왔던 그의 세상이 실제로 너무나 무용하여 지난 시간이 스스로 수치스러울 정도였다.」 그의 밤은 이제 추위와 어둠만이 가득했다. 그의 눈은 점점 탁해져만 갔다. 그가 세상에 대해서 아는 게 많아진 만큼 세상은 작아져있었다.


힘이 쭉 빠진 고양이는 잔뜩 웅크린 채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도 없었다. 오늘밤은 그냥 나무 위에서 잠을 청하기로 했다. 오늘 돌아가지 않더라도 담벼락은 기다려줄 것이다. 언제나 서있던 그 자리에 서서. 내일도, 모레도, 담벼락만큼은. 현실을 마주하지 않으려는 일종의 방어기제였는지, 복잡하고 심란한 마음이 고양이를 잠으로 빠르게 그리고 꿈으로 깊숙이 이끌었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찾아왔다. 어차피 고양이는 집고양이로 태어나 사람들에게 분양되지 못한 것은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받아들였고, 집고양이가 되려 좀 더 약게 행동하지 않았던 것 또한 자신의 선택이었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러니 주어지지 않았던 것에 대하여 절망하고, 가지 않았던 길에 대해서 그 길이 더 낫지 않았을까라고 가정하는 건 스스로를 갉아먹는 행위일 뿐이라고 믿기로 했다. 그렇게 정신을 무장하니 그해 겨울은 꽤 잘 버틸 수 있었다.


이후 고양이에겐 많은 일들이 있었다. 마냥 기특하기만 하던 고등어 무늬의 털북숭이는 자라서 어느덧 늠름한 고양이가 되었다. 몇 년 뒤 첫눈이 오던 날, 첫눈에 반한 하얀색 고양이에게 끈질긴 구애 끝에 결혼도 했고, 건강한 세 마리의 새끼를 낳았다. 가장이 된 고양이는 모든 새끼 고양이들이 벽을 타고 올라갈 수 있을 때가 됐을 때쯤 바로 온 가족을 데리고 담벼락에게 인사를 시키러 갔다. 담벼락은 자신이 드디어 삼촌이 되었다며 진심으로 기뻐했다.


행복한 나날들이었다. 물론 고양이 가족에게 겨울은 여전히 추운 계절이었고 골목 구석구석엔 갖가지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지만 잘 헤쳐나갔다. 오손도손 어떻게든 잘 살았다. 하지만 평소에도 몸이 그리 좋지는 않았던 하얀색 고양이는 아직 젊은 나이에 따뜻한 어느 봄날 눈을 감고 말았고, 조금 뒤 세 마리의 아이들도 때가 되어 아버지의 품을 떠나 각자의 길을 떠났다.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도 그러했듯이, 아마 그의 아이들도 길고양이의 삶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다들 그렇게 떠나고 혼자 남겨지니 다시금 고양이와 담벼락 둘이 남았다. 고양이는 이제 많이 늙었다. 잊을만하면 나타나서 자신을 쫓아다니던 동네의 그 미친개도 작년 겨울에 동네 길바닥에서 객사했다고 들었다. 하지만 동네에는 미친개 역할을 하는 또 다른 미친개가 반드시 또 나타날 것이다. 원래 마을 돌아가는 것이 그렇다. 그것엔 마치 할당량이 존재하는 듯한, 일종의 법칙이 있었다. 그래도 고양이에겐 담벼락이 있다. 담벼락이 있는 한 고양이는 괜찮을 것이다. 둘은 다시금 함께 많은 무용한 이야기를 하고, 무용한 시간을 보냈다.


새삼 어렸을 적 방황했던 시절이 생각났다. 하지만 지금의 자신이 고양이는 자랑스러웠다. 집고양이었다면 과연 물고기들이 물속에서 하품을 하는지, 기침을 하는지 안 하는지 평생 알아낼 길이 있었을까. 따뜻한 지붕 아래서 장미는 가시로서 완벽해진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안락한 소파에 앉아 티브이를 보느라 창밖에 무지개를 쳐다볼 시간이나 있었을까. 고양이는 담벼락 위에 앉아 마을의 서쪽에 노을이 지는 것을 보며 조금은 낯간지러운 말을 했다.

“네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고양이가 담벼락에게 말했다.

“예전부터 너는 내가 담대하고 씩씩한 고양이라고 해주었잖아. 그렇지만 생각해 보면, 그때 난 사실 속으로 많이 두려웠던 거야. 오히려 그렇게 우격다짐을 함으로써 앞에 있는 현실을 외면하려 했는지도 모르겠어. 어쩌면 그건 자기 최면이었는지도 모르지, 어차피 돌아갈 수는 없으니까. 그렇게 스스로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돌아버릴 것만 같았으니까. 가끔씩 세상이- 막막하게 막막할 때가 있잖아. 그럴 때마다 너만은 이곳에 든든하게 서있다는 것 만으로 나에겐 큰 힘이 되어 주었어. 너라는 최후의 보루가 나에게 있다는 것, 나의 마지막에 내가 어쨌든 너에게는 의지할 수 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 많이 의지가 됐어.”

담벼락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담벼락이 고양이에게 대꾸를 한 건 꽤나 오래 전인 것 같았다.


고양이는 쎄한 가을바람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하마터면 나뭇가지 위에서 떨어질 뻔했다. 해가 중천에 떴는데 야행성 동물로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여태 가로수 위에서 이렇게나 무방비로 태평하게 자고 있었다니 길고양이 체면이 말이 아니다.


고양이는 나무를 타고 내려와 아직 몽롱한 상태로 담벼락을 보러 마을의 동쪽으로 털레털레 갔다. 이상한 꿈이었다. 하지만 조금은 기쁜 꿈이었다. 신세를 한탄하던 가여운 길고양이에게 마치 세상이 괜찮다고, 긍정적인 미래를 미리 보여주며 위로를 해주려 한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우주는 어쩌면 내 편인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고양이의 걸음걸이는 조금 더 씩씩해졌다.


빨라진 발걸음으로 이동하면서 고양이는 꿈에 나왔던 자신의 어여쁜 하얀 고양이의 얼굴을 머릿속으로 다시 한번 그려보았다. 정말 이쁜 고양이었다. 그리고 고양이는 꿈속에서 자신이 담벼락에게 했던 말을 되새겨 보았다.

’네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웬일인진 모르겠지만, 오늘 담벼락에게 그 말을 해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멀리서 그놈의 미친개가 또 애꿎은 누군가를 향해 짖는 것이 들렸다.


그리고 저 멀리서 또 다른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담벼락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크게 들렸다. 그것은 하나의 소리가 아닌 여러 가지가 합쳐진 불협의 소음이었다. 그것은 파괴의 소리였다. 고양이의 보잘것없이 작은 심장은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고 그의 네 발 역시 필사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도착한 고양이 앞에 담벼락은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아무도 살지 않아 유지 될 수 없었던 집과 당연히 그 집의 담벼락까지 모조리 다 부서지고 해체되고 있었다. 노란색 안전모를 쓴 인부들이 대형 망치를 양팔로 휘두르면 벽돌은 너무나 힘없이 넘어갔고, 포클레인이 가뿐히 내려치면 지붕은 와르르 주저앉아 먼지가 되었다. 소형 굴삭기는 이곳저곳에서 집의 뿌리를 인정사정없이 뽑아내고 있었다. 고양이는 털을 세우고 미친 듯이 울었다. ”그것은 나의 담벼락이야 “라고 울었다. 하지만 그것은 벽돌과 시멘트가 철에 부딪히며 폭삭 무너지는 소리에 묻혀 그 누구에게도 전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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