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매달려 17

by 브리

#등대


수민은 젖은 옷가지를 대충 접었다. 이제 다시 한국에 들어올 때 모습으로 돌아갔다. 블랙진, 넉넉한 티, 후드 집업. 그녀의 것이 아닌 미니스커트와 티셔츠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서 명원에게 물어보려 하니 그는 잠들었는지 눈을 감고 꼼짝도 하지 않는다. 가로등 노란 불빛이 차 안으로 흘러 들어와 그의 반듯한 이마와 한쪽 뺨을 물들였다. 몹시 피곤해보였다. 마치 상대 선수에게 어퍼컷을 한 대 크게 맞은 권투선수 같았다. 눈 아래 드리운 그림자가 멍자국처럼 보였다. 수민은 손을 뻗어 명원의 티셔츠를 만졌다. 얼마나 젖어 있는지 확인하려고 무심코 한 행동이었다. 천이 살짝 당겨진 정도였는데 명원이 눈을 번쩍 뜨더니 고개를 홱 돌리고 몸을 뒤로 뺐다.

“뭡니까?”

“아니. 얼마나 젖었는지 볼려고”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생각하며 수민이 말끝을 흐렸다. 혼자만 마른 옷으로 갈아입으려니 미안했고 어딘지 그가 안쓰러웠다. 제 몫의 연민을 빠르게 끝내고 나니 오후 내내 명원이 남의 수단, 도구, 변명거리가 되어 준 게 마음에 걸렸다. 긴 인연은 아니지만 어제 오늘, 명원이 보여준 반듯함이 고맙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건데. 이렇게나 기겁하고 싫어할 줄 몰랐다. 그렇지만 처음 만난 날 수민의 볼에 손가락을 콕 찍은 사람이 명원이다. 어깨에 들쳐업고 팔을 잡고 무릎에 눕히고. 명원과 할 거 다 한 거 같은데 이제 와 눈을 세모로 뜨다니. 정말 알다가도 모를 남자다.

휴우.

수민은 한숨을 쉬었다. 역시 내가 문제인걸까? “네가 사람이나 제대로 볼 줄 아냐?”라고 수호가 비아냥거렸는데 사실 맞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수민은 상대가 보여주는 사소한 친절을 마음대로 해석하고 빠져드는, 정신머리 없는 여자애일지도 모른다.

갑자기 엄마가 떠올랐다. 드물게 엄마가 기분 좋은 날, 그러니까 와인 몇 잔 마시고 좀 취했을 때 하던 말이 있었다.


“나는 거지 같은 운명에서 탈출한 거야. 너희들도 고마운 줄 알아. 한국에 살았으면 꼴사나운 일 많이 당했을 거야. 하! 내가 그때 그 남자를 도와주지 않는 건데. 쓸데없는 오지랖 부리다가 제대로 피봤어.”


엄마는 대학에서 그 남자, 즉 수민의 친아빠를 만났다. 데모를 하던 남자였다. 그 당시에는 데모가 끝물이어서 학생운동을 하는 사람이 많이 없었는데 그 남자는 마지막 불꽃을 피우는 사람처럼 온 힘을 다해 데모를 했다. 당연히 대학 생활은 엉망이었다. 마지막으로 화염병이 나르던 시위에서 아빠는 도망치다 넘어졌고 마침 옆에 서 있던 엄마가 다친 아빠를 도와주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아빠는 “내 몸을 봤으니 책임지라”며 막무가내로 들이댔다고 한다. 온 힘을 다해 데모를 했던 것처럼 그는 사랑도 정열적으로 밀어 부쳤다. 사랑이 불타오를수록 상처는 깊었다. 결혼 실패 후 엄마는 뜨거운 거라면 뭐든 질색했다. 이성보다 앞서는 감정은 쓰레기. 엄마에게 그런 건 다 쓸데없는 낭비였다. 그래서 북유럽이 엄마에게는 딱이었다.

엄마는 다행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수민과 수호 남매에겐 추운 시간이었다. 그들은 엄마에게 의지하면 안 된다는 걸 빨리 알았다. 기본적인 의식주 외에 투정을 부리거나 애정을 요구하면 엄마는 불을 피해 도망가는 사람처럼 뒷걸음질을 쳤다. 남매는 서로에게 기댔다. 시간이 지나자 그들 사이는 나름 안정을 찾았다. 냉정한 엄마한테 익숙해졌고 작은 온기로도 견딜 수 있게 되었다. 괜찮다고, 이만하면 잘 성장했다고 스스로 치하하려는 찰나 현우를 만났다. 다정하고 친절하고 상냥한 현우. 사랑한다고 말하며 얼굴을 붉히던 현우. 요동치는 심장 소리를 들어보라며 가슴을 열어주던 현우. 그제서야 수민은 깨달았다. 자신에게 빈 곳이 많다는 것을. 사람의 체온보다 훨씬 더 뜨겁게 사랑받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을. 수민이 원했던 건 비어 있는 곳을 채우고도 넘칠 만큼 사랑받고 사랑하는 것이었다. 수민은 거기에 매달렸다.


-결국 실패지만. 엄마도 실패한 걸 내가 어떻게 하겠어?


수민은 고개를 돌려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한편 명원은 옆자리 수민의 존재를 온몸으로 느꼈다. 명원의 시선이 불안정하게 일렁이더니 손등으로 이마와 턱을 툭툭 두드렸다. 땀이 날 때 하는 행동이다. 무대 위는 조명 때문에 금방 땀이 나는데 마음대로 닦았다간 메이크업이 망가지기 때문에 생긴 습관이었다. 피부에 촉촉한 물기가 느껴진다.

-부끄럽다.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버렸으니 수민이 얼마나 당황했을까? 하지만 수민의 손끝이 허리 근처에서 느껴졌을 때 명원은 비명을 지를 뻔 했다. 머릿속에서 수민이 자신의 옷을 끌어 올리는 장면이 인서트 컷처럼 번쩍였기 때문이다. 눈을 감는 게 아니었다. 소리를 들으니 상상력만 커졌다. 차라리 노련하고 느긋하게 대했다면 어땠을까? 연예인으로 살면서 내 몸을 드러내는 일이 적지 않고 남의 벗은 몸을 보는 일 또한 잦다. 급하면 무대 뒤에서 여자 스태프들이 보거나 말거나 옷을 갈아입는 일이 얼마나 흔한데…명원은 스스로가 이해되지 않았다. 이렇게 경험이 많은데 왜 바보같이 애송이처럼 굴었냔 말이다.


“소리 질러서 미안해요.”


명원은 목소리를 낮춰 사과를 했다. 그는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 최대한 담담하게 굴었다. 다행히 수민은 별 다른 걸 못 느꼈는지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

“그게 뭐 소리 지른 건가요? 그냥 놀란 거지. 놀라게 해서 내가 미안해요. 여기가 한국이라는 걸 까먹었어요.”

“뭘 까먹어요?”

“스웨덴에선 여름이 짧은데 그 짧은 여름동안 다들 호수로 달려가 수영을 해요. 공원이나 해변에서는 일광욕을 하구요. 가끔은 공공장소에서 아무것도 안 입고 수영하는 미친 사람도 있어요. 그러니까 내 말은… 알죠? 우리 사이에는 문화 차이가 있다는 거. 한국은 그런 거에 훨씬 더 엄격한 나라잖아요. ”

“아니 그건 아니고.”

그건 부모님 세대나 그런 거지 지금은 전혀 아니라고 말하려다 말았다. 수민이 자신을 어리게 본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지금 무엇을 더 말해본들 명원의 기분을 나아질 것 같지 않았다. 명원은 표정을 가다듬었다. 침착하자. 덜 떨어진 놈처럼 굴지 말고.


둘 사이 짧은 침묵이 흘렀다. 차 지붕을 때리는 비 소리가 약해졌다. 수민은 고개를들어 올리며 어두운 하늘을 보다가 가방에서 반듯하게 접힌 티셔츠 한 장을 들어보이며 물었다.

“젖은 옷 갈아입을래요?”

“괜찮아요.”

“춥지 않나요?”

“금방 마를 겁니다. 체온이 높은 편이라.”


명원의 말투가 딱딱해졌다. 그는 한 손에 핸드폰을 들고 만지작거렸다. 핸드폰 화면이 켜졌다가 꺼졌다가를 반복했다. 어두운 차 안에서 핸드폰 불빛은 도달할 곳을 알려주는 등대처럼 깜빡거렸다.

“그럼 이제 책임질 시간인가?”


수민이 중얼거렸다. 명원에게 묻는 것 같기도 하고 혼잣말인 것 같기도 했다.


# 이름


둘은 번갈아 가며 혼이 났다. 명원은 매니저 연석에게, 수민은 이모에게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덤비는 어린 것들’이라는 비난을 들었고 특히 명원은 때늦은 사춘기를 겪는 거냐며 리더로서의 능력을 의심받았다. 현재 루오는 병원 응급실에, 명원이 수민과 함께 있다는 말에 연석은 머리 뚜껑이 열릴 것처럼 화를 쏟아냈다.

“이것들이 제정신이야? 미쳤구나. 미쳤어! 기자들한테 기사거리 못 줘서 안달이 났구나. 야. 이런 일을 쳐 놓고 연락을 씹어? 너, 이거 무단이탈에 계약 위반에 걸릴 수도 있어! 무슨 말인지 알아?”


명원은 할 말이 없었다. 어쨌든 처벌은 나중 문제고 일단 급한 불부터 처리해야했다. 연석과 루오의 부모님이 병원으로 오는 동안 명원과 수민은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어 있으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핸드폰 잘 받으라는 말을 남기고 연석이 바쁘게 전화를 끊은 후 명원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수민은 시트 위로 다리를 끌어올려 웅크리고서 창밖을 보았다. 그사이 젖은 양말을 벗어버려 맨발이었다. 조약돌 같은 열 개의 가지런한 발가락이 시트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있었다. 명원은 드러난 움푹한 뼈와 근육을 힐끔 보았다. 여자는 저런 것까지도 보드랍고 아름답다. 루오와 닮았지만 루오와 다른 점이 너무 많은 수민이다.

“우리 이제 어떻게 해요?”


숨어 있으라는 지령을 수민도 들었다. 그러나 전화 건너편에 있던 남자는 ‘어디에’숨으라는 말을 빼먹었다. 제일 중요한 건 그거인데 말이다. 어리다고 뭐라 그랬으면 어른으로서 방향을 제시해주던가. 명원은 차장을 내리고 손을 밖으로 내밀었다.


“비가 거의 그쳤네요. 배고파요?”


식사 시간을 넘겼지만 위장은 반응이 없었다. 너무 오래 음식이든 물이든 들어온 게 없다 보니 바싹 말라버린 모양이었다. 하지만 수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허기보다는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지박령도 아니고 이 병원에 발을 매일 이유가 없다. 응급실에 있는 루오는 연석이 의료진 측과 전화 통화를 해 본다고 했으니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거기다 이모도 내려오는 중이다. 수민은 밥이 되었든 탈출이 되었든 현우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병원 앞 주차장을 떠나고 싶었다.


명원은 핸드폰을 뚫어져라 보며 근처 음식점들을 검색했다. 숨어 있기에 적당하고 끼니를 떼울 수 있는 장소가 인터넷 지도에 나와 있을 리 만무하지만 지금 그가 믿을 건 손바닥만한 그 기계뿐이었다. 손끝으로 톡톡, 화면을 치는 소리가 한참 이어졌다. 창문 쪽으로 고개를 기대고 있던 수민이 눈을 들어 하늘을 보더니 “아! 별이에요.”하고 말했다. 비 그친 밤하늘에 은색 점 하나가 반짝거렸다. 명원이 힐끔 보더니 무심하게 대답했다.

“인공위성일껄요. 여기는 너무 밝아서 밤하늘 별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요. 별을 제대로 보려면 빛이 없는 곳으로 가야 해요.”

“알고 있어요. 잠시 착각한거에요. 하늘에 뭔가 반짝이니까 반가워서.”


수민이 새침하게 입을 삐죽이더니 덧붙였다.


“별 보는 거 좋아한다 그랬잖아요. 여기 천문대에 가보고 싶었다고 말했는데…”

말을 채 끝내기 전에 명원이 불쑥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거기 갈래요? 천문대. 여기서 멀지 않아요.”

“어디요?”

“그쪽이 말했던 천문대요.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천문대가 여기 있다면서요.”

명원이 핸드폰을 다시 보고 “별마로 천문대.”하고 중얼거렸다. 수민은 바로 답을 못하고 망설였다. 명원은 도착지로 ‘별마로 천문대’를 지정해 놓고 여기서 얼마나 걸리는지 검색했다.

“25분 정도 걸리네요. 가는 길에 먹을 거 사 가지고 천문대 가서 먹는 거 어때요? 산속이니까 어두울테고 사람도 많이 없을 거 같은데. 경치 좋은데 가서 별 보면서 삼각 김밥 먹읍시다.”

“우리 둘이요?”

“우리 둘 뿐이잖아요.”


명원이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고 수민을 보았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 수민의 얼굴이 비쳤다. 거긴 현우랑 가려고 했던 곳인데. 수민은 어쩐지 고약한 기분이 들어 망설여졌다.

“천문대에 나랑 가는 게 싫은 거에요?”

“그런 건 아니지만…”

“지금 막 헤어진 남자한테 지켜야 할 의리가 남은 거에요?”

“그런 것도 아니에요.”

“그럼 뭡니까?”

“그냥…천문대에 같이 갈 사람이 바뀔 거라고 예상을 못 했어서. 그런데 내가 그쪽을 뭐라고 불러야 해요?”

“지금 그게 궁금해요?”

“이렇게 하루 종일 같이 있게 될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물었을 거에요. 대화하기 너무 불편해요. 그리고 나는 친한 사람이랑 천문대에 가고 싶어요. 명원오빠라고 불러야 하나요?”


명원이 얼굴을 붉혔다. 그는 여동생이 없어서 오빠란 단어가 익숙치 않았다. 수민으로서는 심사숙고해서 고른 단어였다. 사실은 이름만 부르고 싶었다. 그러나 여기는 한국이고 한국에선 오빠니 형이니 서열이 중요하다고 들었다. 그래서 수호에게도 잘 붙이지 않는 오빠란 단어를 선택했다.


“그냥 이름 불러도 돼요.”

“명원?”

“네.”

“그럼 내 이름도 불러요. 수민이든 에린이든 뭐든 좋아요.”

“그럼 수민이라고 부를게요.”

“좋아요. 한번 불러봐요.”

“…수민.”


명원이 나지막하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수민은 활짝 웃었다. 그렇게 웃는 건 처음 봤다. 명원은 수민이 루오와 다른 점을 또 발견했다. 웃으면 더없이 귀여운 보조개가 루오와 반대쪽 뺨에 오목하게 패였다. 그리고 눈동자가 찬란하게 반짝거렸다. 눈 속에서 웃음이 터지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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