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여행 이야기 7.
정상이란 건 포장된 도로와 같다. 걷기엔 편할지 몰라도 꽃은 자라지 않는다.
-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올해 들어 내 주변에는 '센서티브(Sensitive)' 한 사람들이 유독 많이 보이기도 하고, 그들과 인연이 되기도 한다. 센서티브 하다는 것의 정의를 어찌하는가에 따라 어감이 다를 수 있겠으나 나에게 이 단어가 굉장히 긍정적인 의미로 다가온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센서티브 한 사람들은 보통 예민하고, 까칠하고, 생각이 많고, 조직 문화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라 여겨지기도 하나 올해 접한 일자 샌드의 '센서티브'라는 책에서처럼 이들은 남들보다 민감하여 창의적인 일에 최대치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꺼내면 많은 이들이 "어, 나도 그런 거 같아"라고 말한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 (굳이 따로 분류하여 명명할 만한) 센서티브 군에 속하는 사람은 '기냥 예민'한 것과는 다른 것 같다. 주변 상황에 대한 감수성이 남다르고, 적어도 그걸 무엇으로든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있는(잠재되어 있는) 사람인 것 같다. 음악적 자극이나 미술 작품을 포함한 시각예술, 혹은 남들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들에 감정이 압도당하는 경험이 있다거나 (여러 수단을 이용하여) 어떻게든 자신만의 스토리로 풀어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백 프로 센서티브 하다.
이들은 남들이 열심히 노력해도 가지지 못하는 타고난 감수성과 함께 타인을 세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이해력이나 민감함을 갖췄다. 내가 이런 점에 주목하고 긍정적으로 보기 시작해서인지 이런 특성을 지닌 사람들이 참 잘 보인다. 자신의 성격상 스트레스는 받지만 혹은 불만족스럽지만 어쩔 수 없이 조직사회에서 더 강하게 자신을 몰아치며 사는 사람과 자신의 감수성을 표출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사는 사람들, 양자를 모두 본다.
자신의 이런 기질적 특성을 일찌감치 스스로 잘 파악하고 그런 점을 살리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다행이지만,
감성적이고 창의적인 일에 적합한 사람이 주로 이성적 판단이 요구되는 일들만 하고 살면 어딘가 모르게 탈이 나는 것 같다. 그럼 뭐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대책 없이 본업을 때려치우거나 갑자기 혼자 행위예술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자신을 잘 관찰해보면 답이 있다. 무얼 할 때 가장 속 편하고 행복한지.
그 방법을 잘 모른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을 제대로 볼 기회나 여유를 스스로에게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경험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머리로 찾아지는 것은 없으니 시간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최대한 경험하며 찾아야 한다. 직업과 전혀 무관하더라도 그림을 그리거나, 음악을 하거나, 춤을 추거나, 요가나 명상 같은 내면을 강화할 수 있는 수련을 하거나, 글을 쓰거나.. 어떤 방식으로든 표현하고 분출할 자신만의 방법이나 탈출구를 마련해 놓는 것이 꼭 필요하다. 이들은 특히 그런 시간과 경험이 아주 매우 필요한 사람들이다.
현재 내가 머무는 제주집의 주인 L 모 씨는 나와 참 닮은 구석이 있다.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살아온 환경은 너무 다른데도 타고난 성격적 특성이 어쩜 이리 비슷할까 놀랄 때가 있다. 더군다나 자라나는 과정에서 완전히 다른 피드백을 받으며 살아왔음에도 비슷한 생각들을 가지고 성장했다는 것도 좀 신기하다. 그녀가 읽은 책들의 목록을 보며, 영화들을 보며, 가끔 그리는 그녀의 그림들을 보며 내가 이 집에 온 것도 우연은 아닐 거야 하는 생각이 들만큼 뭔가 통하는 것들이 있었다. 표면적이고 현상적인 이야기들로 채워지지 않는, 세세한 감정들을 함께 공유하고 나누는 것에 흥미를 느끼는, 전형적인 센서티브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녀가 이런 감수성을 발현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먼 나라 이야기 같이 요원해 보였다. 그녀 앞에 놓인 당장 해야만 하는 것들의 무게가 무겁게 그녀를 누르고 있고(그녀는 7살 아이가 있는 싱글맘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그녀가 관심을 두고 싶은 것들의 순서는 매번 그다음으로 밀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의 과외 학생 K양(지난달부터 난 그녀에게 허접한 프랑스어를 가르치고 있음)은 서양화 전공으로 프랑스 유학을 준비 중이며 내달 출국한다. 한 번은 그녀가 어떤 그림을 그리는지 궁금해서 작품을 좀 볼 수 있을지 조심스레 물어봤다. 그녀는 자신이 그린 그림은 대중이 그리 좋아할 만한 것이 못 된다며 마치 우리 집주인이 자신의 습작을 처음 보여주기 전과 같은 반응을 보였다. '극한의 우울함'을 담고 있다고 했다. 명랑한 이십 대 초반의 아이가 우울하면 얼마나 우울하겠어하는 마음으로 그녀가 가져온 포트폴리오를 열어 보고 놀랐다. 생각보다 굉장히 깊은 멜랑꼴리한 감정들이 묻어 있는 그림들에서 집주인의 그림들과 비슷한 정서가 느껴졌다.
그러나 정작 놀라운 건 그다음이다. 저녁에 퇴근하고 돌아온 집주인에게 이 친구의 포트폴리오를 보여주었는데 그녀는 매우 놀라며 이 그림을 자신도 봤다는 것이다. 올해 초 이 학생의 작품이 제주의 한 지역에 전시가 된 모양인데 그때 우연히 그곳에 들렀다가 맘에 들어서 사진 촬영을 했다는 것이다. 일적으로 쓰려는 사진이 아니라 순수하게 그 친구의 그림이 좋아서 사진을 찍고, 작가 이름도 찍어놓았노라고 했다. 그녀가 찍은 사진 속에는 과외 학생의 이름 세 글자가 정확히 있었다.
뭐야 도대체 이런 인연은.. 우리는 진짜 신기하다.. 를 한동안 연발했다.
K는 제주 토박이다. 그녀가 자라난 지역은 자연으로 둘러 쌓인, (평생을 도시에 산 사람의 시각으로 보기에) 고요하다 못해 적막감마저 감도는 곳이다. 말 없는 자연을 보며 유년 시절부터 그녀가 느끼고 생각했던 것들이 어떤 것일지 그림으로 짐작해 본다. 그녀의 그림에는 주로 '나무'와 '가족'이 등장하는데 그 모습이 그리 밝지는 않다. 형제, 자매가 많고, 아름다운 자연이 늘 함께 하는 생활이 내겐 그저 아름답고 평화롭게만 다가오는데 그림 속에서 그녀가 표현하고 있는 것들은 내 상상과는 많이 달랐다. 보기 좋은 것들만 그려야 한다는 어느 정도 상업화된 표현 방식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 같아 오히려 좋았다. 내면의 다양한 이야기를 그녀만의 방식으로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길을 찾은 것이 내심 부럽기도 하고, 참 다행이다 싶었다.
그리고 벌써부터 멋진 예술가로 성장할 그녀가 무척 기대된다.
K는 내가 이 글을 쓰는 지금 서울에 가서 비자를 받기 위한 인터뷰를 진행 중일 것이다. 그녀와 난 이를 대비해 예상 질문에 맞춰 나름 맹연습을 했더랬다. 프랑스어 좀 못한다고 비자가 안 나올 것 같지는 않지만 기본적인 이야기는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았다.
프랑스에서 계획이 뭐냐고 물으면 어쩔까? 그럼 프랑스에서 괜찮은 아티스트가 되고 싶다 정도는 말하자고 했다. 물론 멋지게 전 프랑스에 이런저런 작가에 관심도 많구요, 학교 졸업하고 나중에 유럽을 포함한 여러 지역에서 전시도 열 계획이랍니다 등등 뭐 이거 저거 찬란한 계획을 말하면 좋겠지만 왠지 다 까먹을 것 같았다. -.- 어차피 말하다 보면 외운 티가 날 것이기에 그냥 좀 유치해도 쉬운 단어들로 '순수하고 심플하게' 가자고 했다. 그리고 말미에 지금은 잘 못하지만 가서 열심히 하겠노라는 다짐의 말을 덧붙이면 그래도 귀엽게 봐줄 것? 이라며 우린 막판 포장술에 더 큰 열정을 쏟았다.
떨려서 모조리 다 까먹더라도 왜 가는지 이유만은 본능적으로 나오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당당히 한마디 던지고 나올 수 있길 바라본다.
"왜냐하면.. 난 프랑스에서 멋진 아티스트가 되고 싶거든요."
나와 인연이 된 그녀들이 앞으로 더 많이 자유롭게 표현하고, 더 많이 행복해지길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