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의미

Paris 어느 다인실 아파트의 추억

by Iris K HYUN




가정의 달 5월,

기념일이 연달아 있는 오월답게 가는 데마다 가족 타깃의 상품들이 즐비하고 주말엔 가족단위 인파에 이리저리 치인다.

어떤 이는 자식이 언제 커서 고사리 손으로 카네이션을 만들었다고 자랑스럽게 카톡에 걸어놓았고, 또 누군가는 부모님을 위해 정성스레 준비한 선물을 만인에게 공개하며 효자 인증을 하고 있다.

나도 엄마를 보러 가지만 이젠 아무것도 해드릴 수 없다는 헛헛함이 차오른다. 그리고 기일과 어버이날이 같기에 상대적으로 마음이 더욱 쓸쓸할 아빠에게 무얼 더 해 드려야 하나 고민만 깊어간다.



성당 문 앞 아이와 아빠, 2018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든다. 가족은 무엇인가.

단지 혈연으로 묶인 집단에서만 사랑의 가장 큰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까.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다.


자비에 돌란 감독의 영화, '단지 세상의 끝'에서 시한부의 삶을 선고받은 한 남자는 자신의 죽음을 가족에게 알리기 위해 아주 오랜만에 가족들이 모여있는 집을 찾는다. 하지만 반가움도 잠시일 뿐, 각자 자신의 입장에서만 피해자 코스프레하는 가족들의 민낯을 보고 입을 다문다. 서로의 마음을 들여다볼 여유가 없는 그들은 각자의 상처로 인한 자기방어기제만이 작동하는 듯 보이고, 그 속에서 진심을 보긴커녕 오해와 화만 쌓는다. 그렇게 오랜만에 만났건만 물과 기름처럼 서로 섞이지 못하고 둥둥 떠다니다가 다시 또 그렇게 헤어지는데, 중간에 엄마가 그에게 건넨 말이 이 가족의 모습을 압축적으로 제시한다.

"난 널 이해하지 못하겠어. 하지만 사랑해"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자신의 마음을 내보인 대상은 유일하게 혈연으로 엮이지 않은 그의 형수다.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 아주 오랫동안 교류를 하지 않고 살았던 가족들에게서 그는 끝내 평안함을 느낄 수 없다.


0000497184_003_20170203135811177.jpg 영화 '단지 세상의 끝' (Juste la fin du monde, 2016)



물론 가족은 누구보다 서로를 잘 알고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존재다. 하지만 너무 사랑하기에 또 너무 아프게도 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살다 보면 가족이 있는 것이 없는 것만도 못하다며 큰 짐을 진 듯 힘들어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해득실이 분명한 세상 속에서 본능적으로 아무 조건 없이 내 편이 되어주는 가족의 역할은 그 자체로 큰 것이기에 그 역할이 충족되지 않거나 '상실'을 경험할 때 우리는 절망하게 된다.

나 역시 감사하게도 나를 있는 그대로 지지해주는 엄마가 존재했기에 '조건 없는 사랑'이 무엇인지 느끼며 살 수 있었지만, 엄마의 존재가 없어졌다고 해서 가족이 주는 만큼의 안락함, 사랑을 더 이상 찾을 수 없는 것은 아니며, 그것이 전형적인 가족의 틀 속에서만 채워질 수 있는 것도 아님을, 여행 중 여러 형태의 가족의 모습을 보며 생각하게 된다.



DSC07453.JPG Paris, Jardin-des-Tuileries, 2018



이번에 파리에서 만난 남자 P는 다국적의 사람들과 공간을 일부 쉐어 하며 함께 살고 있었는데, 그는 '가족 없이 오랫동안 여기서 혼자 외롭지 않냐'는 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이렇게 말했다.

"가족이 뭔데? 곁에서 함께 웃고, 울고, 먹고.. 그렇게 지내면 가족이지. 난 지금 나랑 같이 사는 이 사람들을 내 가족으로 생각해."


사랑하는 가족을 일찍 떠나보낸 이에게는 가정의 달 오월이 다소 소란스럽고 때론 잔인하게 느껴질지 모르겠으나 상실의 빈 구석이 외롭고 쓸쓸해도 누군가 마음을 나눌 수 있다면 그것이 가족이지 않을까.



DSC08457.JPG Paris, 2018



방금 등장한 P가 속해 있는 다국적 사람들이 함께 생활하는 아파트에 사실 나도 며칠을 머물렀다.

그에 관한 이야기를 잠시 하자면 이러하다.


올해 2월, 난 파리에서 혼자 지낼 곳을 미리 계약하고 갔다. 그곳은 파리에 거주하는 분이 한국으로 잠깐 들어오며 비운 집이었는데 계약일이 내가 머물 기간과 약간 차이가 있어 마지막 얼마 간은 다른 숙소를 알아봐야 했다. 미리 좀 하면 될 것을 집주인이 올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 되어서야 나는 부랴부랴 에어비앤비에 접속하곤 집을 뒤지기 시작했다. 일단 큰 가방을 나르기에 위치상으로 편리해야 한다는 것이 일차적인 조건이었는데 닥쳐서 하는 상황이라 대안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비성수기의 파리라도 파리는 파리다. 어어 이렇게 괜찮은데 가격이 정말 착하네... 하는 곳은 당연 죄다 풀 부킹이다) 그러다 위치상으로 가장 근처에 한 집을 보게 되었는데, 방은 개인실이지만 주방과 욕실&화장실을 공유하는 조건의 다인실 아파트였다. 모델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여자는 재밌어 보였고, 그간 햇빛도 안 들어오는 음습한 파리 집에서 혼자 지냈기에 며칠 동안은 좀 북적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DSC07218.JPG Paris, 오르세, 2018



그리하여 도착한 그곳,

키가 엄청나게 큰 상쾌유쾌발랄한 여자가 활짝 웃으며 나를 반겨주었다. 나도 작은 키는 아닌데 정말 많이 우러러봐야 하는 이 여자는 한껏 부풀린 솜사탕 머리를 하고 있어서 얼굴은 상대적으로 더 작아 보였는데.. 한 '십 등신'쯤은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모델 포스 제대로 풍기며 집 여기저기를 안내해 주었고, 나머지 멤버들은 퇴근 후 저녁 때나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여자에게 '문 열고 잠그는 교육'을 받고, 커피를 얻어먹고 집을 나섰다.


저녁 8시, 볼일을 보고 간단히 저녁도 먹고 들어오는데 멤버들이 주방에 다 모여 있었다. 또 다른 솜사탕 머리의 키 큰 여인이 있었는데 아까 나에게 집 소개를 해준 이의 언니였다. 그리고 호주에서 온 플로리스트 K, 물리치료사 P 이렇게 네 사람이 함께 지내고 있었고, 한 방은 에어비앤비를 이용해 나처럼 잠깐씩 머물고자 하는 사람에게 내주고 있었다. 모델, 플로리스트, 물리치료사, 그냥 글 쓰고 있는 애 이렇게 흥미로운 조합은 자연스럽게 서로에 대한 호기심으로 이어졌다.

플로리스트 K는 장 봐온 재료들을 정리하며 정말 많은 질문들을 속사포로 쏟아냈고, 멋진데 알고 보면 허당인 모델 자매는 저녁에 뭔 파티가 있다며 머리를 더 솜사탕으로 만들고 이 옷 저 옷을 계속 갈아입고 다녔다. 그 사이에서 유일한 남자인 P는 이 상황이 익숙한 듯 그냥 조용히 앉아 있다가 한 마디씩 거들거나 내가 무슨 질문을 하면 프랑스 관광청에서라도 나온 듯 바로바로 대답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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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C07386.JPG Paris 사람들, 2018



처음엔 활동 시간이 서로 달라 그 패턴을 아는 데까지 좀 불편하기도 했으나, 서로 배려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면서 이도 금방 적응이 되었다.

아쉽게도 나에게는 며칠 간의 생활이었지만, 몇 달 간을 같이 지내고 있는 그들의 연대는 가족 이상으로 대단하게 느껴졌다. 서로의 단점을 이해하고 때론 커버하고 있었고, 작은 일에도 함께 기뻐해 주고 격려하는 것이 가족과 다를 바 없었다. 항상 무언가를 잘 흘리고 다니는 모델 자매는 외출 후 얼마 되지 않아 꼭 한 번씩은 집으로 다시 돌아와 빠트리고 간 물건을 챙겨갔는데, 그 물건들이 어딨는지는 P가 훨씬 잘 찾았다. 한 번은 늦었다고 허겁지겁 나가다 금세 돌아왔는데 P는 화장실 세면대에 놓인 그녀의 핸드폰을 집어다 주었다. 그녀가 뭘 잊고 나갔는지 말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이 찰떡 호흡은 오랜 시간 함께 생활하며 자연스레 형성된 것이었다.


혈연으로 묶이지 않았지만 이들의 연대와 결속은 부러울 정도였다. 어찌 보면 독신 가구가 많은 파리에서 고독을 씹으며 혼자 생활하는 것보다 이렇게 생활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혈연 가족의 끈끈함에 뒤지지 않는 정을 느꼈다.




요즘 tvn에서 하는 '나의 아저씨'를 우연히 보기 시작했는데 참 인상적이었다. 불륜을 베이스에 깔고 나이 차 많이 나는 아저씨 이선균과 아이유의 사랑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결론적으로 '사람'에 대한 이야기였고, '멋진 어른'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 드라마에서 설정된 후계동이라는 장소에 모인 사람들의 연대는 혈연 가족이 아니지만 참 따뜻하고 멋지다. 가족은 그런 게 아닐까. 세상에 대한 냉소로 가득 찬 아이유에게 멋진 어른을 보여주는 사람들에게서 그녀는 가족을 느끼지 않았을까.



마지막으로 진짜 어른이 별로 없는 세상에서 박동훈 부장(이선균 분)처럼 멋진 어른이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꼰대가 되지 말아야지. 하.



https://www.youtube.com/watch?v=uTGcerubbmY

나의 아저씨 OST, 제휘, Dear Moon/ 드라마에서 정말 문이 비현실적으로 크게 똭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