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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ky Oct 20. 2022

경이로움을 마주하다-포스토이나, 슬로베니아

딸아이가 여행하고 싶은 곳 1순위는 단연 제주도이다. 어려서부터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쉴 틈 없이 해외여행을 하면서 ‘여행은 고생이다’라는 단순 명료한 진리를 알아버렸다. 그래서인지 제주도 여행은 편안하다고 느끼며 딸아이 스스로 여행 계획을 세울 때가 많다.

국에서 9학년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던 여름방학 역시 제주도에 가고 싶어 했다. 거의 매년 가는데도 아직 못 가본 곳이 많다. 세계 자연유산인 만장굴에 가보고 싶다는 딸아이의 계획대로 그곳에 들렀다. 초여름인데도 서늘한 기운이 동굴 입구부터 전해진다. 화산이 분출하여 흘러내린 용암 돌기둥 형상을 바라보다가, 딸아이와 나는 동시에 슬로베니아 여행이 떠올랐다.

 

아침 일찍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에서 한 시간 반 버스를 타고 포스토이나에 왔다. 아드리아해 연안에 가까스로 닿아있는 피란에 가기 위해 잠시 거쳐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들렀다. 하지만 잠시 거쳐 가는 곳이 아님은 엄청난 관광객의 수가 말해주고 있었다. 한 시간 이상 줄을 선 뒤에야 티켓을 손에 잡을 수 있었다. 포스토이나에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긴 21킬로미터에 달하는 장대한 석회동굴이 있다. 단, 5킬로미터만 일반인들에게 공개한다고 한다. 빌딩 크기 만한 석회암들이 이백 만년의 세월을 살아오며 지하세계를 점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7세기에 발견되어 대중에게 공개되었는데 1872년에 동굴 탐험을 위해 만든 열차가 아직도 운행되고 있다. 기차는 놀이동산 열차처럼 엄청난 속도로 달린다. 딸아이와 나는 시원한 바람과 동굴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맞으며 10여 분을 기차로 달렸다. 이제 걸어서 두 시간 정도 걸리는 동굴 탐험 시작이다.  

 

동굴 안으로 들어서면서부터 입을 다물 수 없는 광경들이 펼쳐졌다. 백 년에 1센티미터씩 자란다는 물방울들이 수백만 년에 걸친 내공이 쌓여 산타클로스도 만들고 앵무새도 만들었다. 노아의 방주도 만들고 피사의 탑도 만들었다. 가장 신비로웠던 것은 브릴리언트(Brilliant)라 불리는 보석처럼 빛나는 새하얀 석순이었다. 영국의 조각가 ‘헨리 무어’는 그곳을 세상에서 가장 경이로운 자연미술관이라 했다. 당시 탐험가들이 겪은 칠흑 같은 어둠을 경험해 보라고 중간에 조명을 꺼주기도 한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순간 눈부시게 빛나는 석회암들이 눈앞으로 쏟아진다. 동굴에 아름다운 선율이 흐른다. 딸아이와 어둠 속을 한 걸음씩 내딛는다.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자연 예술작품들이다. 끝까지 도달하면 일만 명 이상 수용 가능하다는 지하광장이 나온다. 자연음향효과가 뛰어나 실제로 콘서트홀로 사용하고 있단다. 딸아이는 메아리쳐 돌아오는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보려 연신 성악가 흉내를 내본다.

                                              포스토이나 동굴(2014년)

 

정신이 몽롱하다. 눈과 귀가 모두 혼란스럽다. 어떤 신비로운 세상을 체험하고 나온듯한 착각이 든다. 잠시 들렀던 포스토이나 동굴은 슬로베니아를 생각나게 하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그날, 항구도시 피란으로 이동할 계획이었지만 포스토이나에서 딸아이와 하루를 머물기로 했다. 엄청난 지하세계를 품고 있는 조용한 시골마을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싶어 졌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마을이 우리를 붙들었다.

여행을 하며 뜻하지 않게 마주하는 자연경관 앞에서 할 말을 잃을 때가 참 많다. 발칸반도를 여행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문득문득 믿기 어려울 때가 많았는데, 우연히 포스토이나에서 만난 천연 예술작품은 우리를 매우 흥분시키고 놀라게 했다. 수백만 년의 세월을 지나온 형상의 존재만으로도 신비할 따름이었다.

 

딸아이가 제주도를 좋아하는 이유를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매년 그곳에서 우리가 무엇을 했을까 되돌아보았다. 한라산을 오르고, 바닷가를 거닐고, 섬에 가고, 숲길을 걸었다. 한 마디로  자연이다. 딸아이에게 제주도는 자연이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어떠한 걸작품보다 자연이 만든 예술품에 경악하는 딸아이 모습에서 값진 보물을 발견한다. 또한 자연을 통해 세월을 거슬러보는 지적 호기심이 딸에게는 현재와 미래도 가늠해보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최소한 자신이 왜 공부하는지 생각했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여행을 통해 지구 반대편 친구들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보여주고 싶었던 이유가 기대치보다 훨씬 큰 보답으로 딸아이에게 돌아오고 있다는 것을, 어느 장소를 가든 되돌아볼 추억이 많아 행복하다는 것을, 만장굴에서 포스토이나 동굴을 떠올리며 절실히 느껴진다.


                          여행노트에서 꺼낸 추억 이야기 16.

                             -2014년 열두 살이던 딸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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