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세계, 팔레스타인 1부④
피해!
누군가 날카롭게 외쳤다. 돌팔매를 하던 팔레스타인 소년들은 다급히 도망치고 있었다. 나도 황급히 몇 발자국을 떼자마자 등 뒤에서 펑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방금까지 내가 서 있던 곳에서 흰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최루탄을 직사한 모양이었다. 나는 잠시 오싹해졌다. 동시에 외신(그들에게 나는 해외언론이었으니)을 향한 공격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올려다보니 30미터 정도 떨어진 건물 위에 총을 든 이스라엘 군인이 있었다. 그도 나를 보고 있었다. 앳된 얼굴이었다.
2019년 8월 16일 정오를 조금 지난 시간 나와 일행이 탄 차는 팔레스타인 나블루스 인근 산간 마을인 쿠파카둠으로 향하는 산길을 달리고 있었다. 쿠파카둠 마을은 팔레스타인 북부의 대도시 나블루스에서 14킬로미터 가량을 가야한다. 직선거리는 2km 정도에 불과하지만, 이스라엘의 정착촌이 만들어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정착촌을 연결하는 도로가 조성되면서 길은 막혀버렸다. 도로는 이스라엘 정착민만 사용할 수 있었다. 팔레스타인인이 나블루스로 가려면 한참을 돌아가야 했다.
그 날의 금요집회는 이스라엘 정부의 봉쇄 조치에 항의를 하고자 꾸려졌다. 매주 금요일 무슬림 예배가 끝나면 집회가 시작된다고 했다. 그게 벌써 10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고 하니 10년 이상 끊임없이 분노와 충돌이 이어진 셈이다.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전 세계의 언론인들과 국제인권 활동가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고 있었다. 동행한 NGO 아디의 이동화 국제활동가가 말했다.
“쿠파카둠의 사례는 팔레스타인 땅에 계속 건설되고 있는 이스라엘 정착촌이 얼마나 팔레스타인인에게 악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주죠.”
금요집회 때마다 많은 사람들은 피를 흘렸다. 이스라엘 군인들은 총을 쏘고, 최루탄을 직접 발사했다. 비교적 최근까지도 해산 요구를 따르지 않는 국제활동가들을 연행해 구금하는 일이 있었다. 최루탄은 ‘효과적인’ 진압 도구였다. 한 번에 집에 있던 2살 아이에게 최루탄이 날아들었다. 아이는 병원에 실려 갔다.
폐타이어 더미가 불에 타면서 검은 연기를 뿜었다. 이 불더미는 집회에 참여한 이들과 이를 저지해야 하는 이스라엘 군인 사이의 경계였다. 너머는 이스라엘 정착촌이었고, 그 앞을 이스라엘 군인이 지키고 있었다. 주변에는 빈집이 즐비했다. 벽에는 총알 자국이 선명했다. 벽은 오래전에 그을린 자국으로 을씨년 스러웠다. 상풍경한 모습이었다.
집회 행진이라고는 해봤자 정착촌 방향으로 백여 미터를 걷는 게 전부였다. 집회를 하기 전 마을 주민 대표로 보이는 이가 큰 소리로 무어라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집회 참석자의 수는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헬멧을 쓰고 방탄조끼를 입은 현지 언론인들도 하나, 둘 도착했다. 한 청년은 돌을 깨고 있었다. 돌팔매질에 쓸 요량이었다.
정오를 지난 시간 나는 조금 시시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펑’ 하는 소리가 들렸다. 시위대의 꼬리부분에 이스라엘 군인 몇 명이 나타나 최루탄을 쏘고 있었다. 바닥에 꽂힌 최루탄은 제 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며 최루 가스를 뿜었다.
팔레스타인 국기를 든 남성이 선봉에 섰다. 그의 뒤를 쫓고 있으려니까 현지 기자가 거칠게 외쳤다.
“너무 앞으로 나오지 마!”
고함소리, 돌멩이가 날아가며 만든 날카로운 파열음에 나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었다. 흥분한 청년 열댓 명이 돌을 던지면, 군인들은 총을 들어 그들을 겨냥했다. 다시 귀를 찢는 폭발음이 또 한 번. 선두에 선 시위대 일부가 뿔뿔이 흩어졌다. 매운 최루연기는 바람을 타고 시위대로 덮쳤다.
그제야 현지인들이 왜 두건으로 얼굴을 싸맸는지를 알 것 같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상공에 시위대를 촬영 중인 드론이 있었다. 드론 카메라가 얼굴을 체증하는 것을 회피하려는 이유도 있었다.
이윽고 집회는 정점으로 치달았다. 돌멩이가 팔레스타인 청년의 손에서 ‘쉭’ 소리를 내며 날아갔다. 이어 다른 이가 바통을 넘겨받았다. 이에 맞서 이스라엘 군인들은 최루탄을 쏘아댔다. 노란머리의 외국인 참가자 두 명이 양손을 들고 앞으로 나아가자 이스라엘 군인들이 총을 겨눴다. 집회 선두에서 여럿이 소리쳤다.
“뒤로 빠져!”
선두에 선 이들은 혹시 모를 유혈사태를 염려했다. 쉴 새 없이 최루탄이 터지고 이스라엘 군인들이 쏜 고무탄도 사방에서 날아들었다. 건물 뒤 자욱한 화염 사이로 비치는 군인의 그림자가 무서웠다. 이런 공포를 현지 거주민들은 10년 넘게 겪고 있었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아이와 손을 잡고 나타난 아버지, 유럽에서 온 국제 활동가, 현지매체 기자와 프리랜서 언론인들로 현장은 북새통이었다. 그러한 모습이 익숙한 아이들은 곳곳을 뛰어 다녔다.
“이봐, 괜찮아?”
내게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던 현지 기자가 안부를 물었다. 난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아직 해는 머리 위에 있었다. 저무는 하루의 끝, 이날 이스라엘 군인들이 본 '사나운' 전사들이란, 누군가의 아비이자 아들이었다. 이들은 최루가루를 툭툭 털어내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간다. 빵을 구워 식사를 하고 아이들에게 입을 맞출 것이다. 그리고 또다시 돌아오는 금요일이 되면 또다시 치열한 하루를 반복할 것이다.
“우리의 바람은 평등, 자유, 정의, 존엄이 지켜지는 것입니다. 가난한 팔레스타인 농민들의 주 수입원인 올리브 수확철이 되면 이스라엘의 공격이 이어집니다. 정착민들은 군의 비호로 농부들의 삶을 방해하고 있죠. 때문에 우리의 땅을 보호하고 이런 상황을 전 세계에 바로 알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팔레스타인 나블루스의 지역 시민단체 ‘탄위르’ 소속 요셉 박사의 말이었다. 지난 1993년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이 체결한 오슬로 협정이후 서안지구는 A, B, C지역으로 나뉘어 이스라엘의 영향 하에 놓여 있다.
특히 이스라엘의 전 방위적 지배하에 있는 C지역에서 발생하는 여러 피해에 대해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어떠한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요셉 박사는 팔레스타인 풀뿌리 시민의 방어와 국제연대가 필요하다고 했다.
쿠파카둠 금요집회에서 알 수 있듯 이스라엘을 향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저항은 곧 체포와 구금으로 이어진다. 남편이나 아들이 구속되면 당장 생계의 위협에 직면한다. 가장의 부재로 인해 가계를 돌봐야하는 팔레스타인 여성들에게 선택지란 많이 없다.
요르단계곡 등에 위치한 이스라엘 정착촌에서의 일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노동의 대가는 턱없이 낮다. 하루 평균 12시간을 일하고 수중에 쥐는 돈은 10달러 가량. 현지 최저임금보다 적다. 탄위르의 와엘 활동가가 말했다.
“이런 상황이 팔레스타인 저임금 노동자를 양산하고 있는 겁니다.”
부수적 피해도 심각한 실정이다. 난 이스마트 팔레스타인 여성연합위원회 대표 겸 알나자대학 교수로부터 그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가 체포되면) 가족 전체의 피해로 이어지는데, 남편이 반이스라엘 집회 등으로 인한 수감 경력이 있다면, 연좌제로 인해 배우자 및 자녀들의 해외 출국 등을 위한 여권 비자가 중단되죠.”
“교도관은 면회를 온 여성에게 성적인 폭력을 가할 수 있다고 위협합니다. 공포에 질린 여성은 울음을 터뜨리죠. 그런데 옆방에 수감자를 둬 그 울음소리를 듣게 하는 겁니다. 수감자가 포기하도록 만드는 심리 전술이죠.” (와엘 활동가)
이스라엘도 팔레스타인 문제로 골머리를 앓긴 마찬가지다. 매일 팔레스타인인을 맞닥뜨려야 하는 이스라엘 군인들이 일상적으로 직면하는 도덕적 문제와 그 후유증의 해결은 요원한 상황이다. 이스라엘 대테러 정보기관인 신베트의 카르미 길론 전 국장의 말은 이스라엘이 자국의 전략으로 겪고 있는 윤리적 문제를 아프게 꼬집는다.
“우린 수백만 명의 삶을 힘들게 만들고 있고 그들의 고통을 연장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입대한 지 몇 달밖에 안된 병사에게 무엇이 적절한 행동인지 결정하라고 강요합니다. 기껏해야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일 년 된 젊은이가 어린 딸을 안고 지나가는 (팔레스타인) 아버지를 보고는 그를 세워 수색해야 할지 보내줘야 할지 몰라 고민합니다.” (다큐멘터리 더게이트키퍼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