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세계 팔레스타인-프롤로그
2020년 6월 30일. 이날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분노의 밤이었다. 그리고 이튿날부터 분노의 날이 시작됐다. 7월 1일부터 점령국인 이스라엘이 서안지구의 30%에 달하는 영토의 병합을 공식화했기 때문이었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이를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은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강력한 지지가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이미 서안 곳곳에 자리잡은 유대정착촌은 원주민인 팔레스타인인과 계속 충돌하고 있었다.
2019년 나는 우연찮은 기회로 열흘동안 팔레스타인 서안지구 일대를 취재하는 기회를 얻었다. 현지 소식이 밝은 시민단체와 함께 간 터라 만나기 어려운 현지 인사들을 여럿 만날 수 있었다. 열흘이란 시간을 보내고 난 이후 나는 분쟁지역의 인도주의 위기를 보건의료의 눈으로 조명하자고 마음 먹었다. 어쩌면 필생의 책무가 생긴 것으로, 이 시기를 기점으로 기자로서 나의 삶은 180도 바뀌었다.
베들레헴에서 처음 분리장벽을 보았을 때의 충격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 거대한 벽이 주는 위압적이고 폭력적인 분위기에 나는 할 말을 잊었다. 분리장벽은 이팔갈등의 지난한 세월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이듬해인 2020년 팔레스타인을 다시 가려 했지만, 코로나19 대유행으로 하늘 길이 닫히고 말았다. 항공권을 환불하며 나는 속으로 칼을 갈았다. 코로나19가 맹위를 떨칠 때에도 나는 종종 팔레스타인이나 로힝야 등지와 같은 분쟁지역의 코로나19 위기를 글로 썼다. 팔레스타인에 다시 갈 수 있었던 건 첫 방문으로부터 삼년이나 지난 2022년에서였다.
이제와서 생각하면 이 삼년이란 시간은 꼭 내게 필요한 것이었다. 처음 팔레스타인에 다녀오고 기자상을 두어개 받으면서 나는 ‘뽕’에 취했다. 필생의 책무라고 말 하지만 분쟁지역을 누비는 저널리스트인 내가 멋지다고 멋대로 생각해버렸다. 그 사이 나는 가장 중요한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나의 삶과는 동떨어진 고된 세상을 직접 체험하고 들여다보려는 본래 기획의 의도 자체는 착한 것이었다. 팔레스타인인의 비참한 현실을 알려 변화를 가져오자는, 기획 의도 자체는 선의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것은 고작 내게 고작 열흘의 체험일 뿐 현실이 될 수는 없었다. 꼭 해병대 캠프 체험처럼 이러한 고된 과정은 잠깐의 맛보기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모욕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나는 깨닫게 되었다. 처참한 현실을 버티며 그 안에서도 희망을 찾는 이들의 입장에서 나의 고통 체험과 그렇게 써내려간 글 몇 줄은 허망하였다. 나는 부끄러워졌다. 사실 내가 그 먼 팔레스타인까지 꾸역꾸역 날아가 그들의 삶을 직접 경험해 보지 않더라도 의료 접근권과 물부족, 피점령지의 거주민으로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가혹할지는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민 없이 팔레스타인인의 70여년의 고난을 잠깐 보고 오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브런치에 <뜻밖의 세계, 팔레스타인> 연재를 꽤 오랫동안 연재하지 않다 최근에서야 1부를 마무리 지은 것은 바로 이러한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부끄러움도 기록이므로, 나는 본래의 글을 크게 손보지 않고 1부를 마무리지었다. 그렇다고 부끄럽게 연재를 끝낼 수는 없기에 2부에는 더 많은 고민을 담으려 노력했다. 물론 그것이 잘 담겼는지는 모를 일이다.
나는 현장의 처참함 너머를 들여다보아야만 했다. 왜 팔레스타인인은 자유가 보장된 삶을 살 수가 없는지, 무엇이 이런 불공평한 결과를 낳았는가. 이 불합리한 구조는 왜 바뀌지 않는가. 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지만 살아갈 수 있기 위한 기본 권리는 주어져야 하는 것 아닌가. 이스라엘의 입장은, 그들의 명분은? 이팔갈등을 흑백논리로 바라보고 현장에 매몰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앞으로 이어질 글들은 이러한 고민의 답을 찾기 위한 과정의 기록이기도 하다.
팔레스타인. 분쟁과 탄압, 혹은 갈등과 억압. 중동의 화약고. <김양균의 코드블랙>이 브런치를 통해 전하는 <뜻밖의 세계, 팔레스타인> 연재의 배경이 되는 팔레스타인의 역사적 배경을 연대순으로 전달한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겪은 지난 100년사는 우리와 닮아 있다. 강대국의 입맛대로, 힘의 논리에 의해 침략과 강탈을 당해야 했던 팔레스타인 민중의 100년. 그 시작은 191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17년 제1차 세계대전의 혼란 속에 영국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는 팔레스타인인에게 독립을 약속하며, 반란을 고무했다. 그러나 영국의 속셈은 따로 있었다. 같은 해 팔레스타인 지역에 시온주의 국가 건설을 돕겠다는 ‘밸푸어 선언’을 하고 만다. 중동의 영향력과 세력 견제를 위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이용했지만, 힘의 균형은 유럽내 유대세력으로 기울어져 있었던 것이다.
시온주의자들은 유대인이 유대교의 발생지(팔레스타인 지역)에 돌아와 유대인의 국가를 세울 권리가 있다고 말한다. 이에 대한 반박은 이 지역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모두에게 매우 의미가 있다는 점이다. 즉, 유대교에 한정해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권리 주장은 시작부터 유대인들의 관점만을 반영했다는 모순을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영국과 미국 등 서방 강대국은 중동 지역에서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 전략적으로 시온주의를 지지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유럽 내 적지 않은 수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인 1947년 유엔(UN)은 팔레스타인 영토의 절반 이상을 유대인의 몫으로 인정한다는 분할안을 발표했다. 분할안에는 대다수 거주민인 팔레스타인인의 의사는 반영되지 않았다. 유엔 스스로 강대국의 힘의 논리에 좌우됨을 증명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유엔 분할안과 미국과 영국 등의 강력한 후원에 힘입어 마침내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되었다. 고무된 시온주의 민병대는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학살을 자행, 당초 분할안보다 더 넓은 영토를 차지했다. 그 결과 70만 명이 넘는 팔레스타인인 사람들은 고향에서 쫓겨났으며, 이 과정에서 요르단과 이집트는 팔레스타인 일부 영토를 점령했다. 예루살렘은 동서로 분할돼 동예루살렘은 요르단이, 서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이 손아귀로 넘어갔다.
1959년 아랍 민족주의 성향의 팔레스타인 저항 세력인 ‘파타’가 결성되었다. 파타는 60~70년대 팔레스타인 저항 운동의 중심축이 됐는데, 이후 1967년 이스라엘은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을 공격해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와 시리아의 골란 고원, 동예루살렘 등 팔레스타인 영토를 상당수를 점령했다. 이후부터 팔레스타인의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 지역에 사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점령자인 이스라엘의 가혹한 통치 아래 놓이게 되었다.
십여 년 후인 1978년 이집트는 ‘캠프 데이비드 협정’을 통해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는다. 이 협정이 의미하는 것은 이스라엘 국가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아랍 국가들의 합의를 무효화하는 것이었다. 앞서 1967년의 전쟁의 압도적 승리를 통해 이스라엘은 서방세계에 중동의 콘트롤러로 자국의 지위를 공고히 했고, 캠프 데이비드 협정을 통해 이집트가 친미로 돌아서면서 이스라엘의 지위는 더욱 단단해지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난민 학살은 계속 자행되었다. 1982년 일명 사브라·샤틸라 난민촌 학살로 팔레스타인인 수천 명이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볼 때, 1987년 팔레스타인 대규모 민중 항쟁인 1차 인티파다는 예고된 것이었다. 1차 인티파다는 점령국인 이스라엘에도 충격을 안겼고, 그만큼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희생도 뒤따랐다. 그리고 보수적인 이슬람주의 저항 세력인 ‘하마스’가 급부상하게 된 계기도 되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사이에 갈등이 심화되자 미국이 개입해 1993년 이스라엘의 라빈 총리와 아라파트 PLO 의장은 오슬로 협정을 체결하게 된다. 팔레스타인 현지 취재 과정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단어도 오슬로 협정이었다. 오슬로 협정은 대외적으로는 이스라엘 건국 이후 갈등과 분쟁을 계속하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분쟁을 종식하자는 것이지만, 실상은 좀 다르다. 아라파트 의장과 라빈 총리, 시몬 페레스는 이후 이듬해인 1994년 노벨평화상을 공동수상했다.
협정의 대내외적 의미는 땅과 평화의 교환이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 등 점령지를 반환해 팔레스타인 자치국가를 설립하는 한편,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에 대한 무장투쟁을 포기하라는 것이다. 문제는 협정에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의 성격이나 동예루살렘의 지위, 팔레스타인 난민의 귀환, 이스라엘 군의 배치 등은 사실상 포함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도 팔레스타인 지역에서의 이스라엘군 철수와 땅 반환, 자치권 확대 등은 이행되지 않고 있으며, 앞으로도 기약이 없다. 오슬로 협정이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사이에 평화를 위한 상징적 선언의 차원으로 본다면 나름의 의미가 있지만, 협정 자체만 놓고 보면, 팔레스타인에 절대적으로 불리하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오슬로 협정 이후 서안지구는 A, B, C지역으로 나뉘어져 PA가 지역별 차등적 행정·치안 권한을 갖게 됐다. 우선, A지역(Area A)은 PA가 민간행정과 치안을 담당하는 지역으로, 서안지구의 약 18%가 여기에 해당된다. 팔레스타인 라말라 등 주요 8개 도시와 주변지역이 포함됐다. 그리고 B지역(Area B)은 PA가 민간행정을, 치안은 이스라엘과 PA가 공동관할하는 지역이다. 서안지구의 약 22%, 약 440개 팔레스타인 마을과 주변 지역이 포함된다.
마지막으로 C지역(Area C)은 A와 B지역을 뺀 나머지 전체지역을 말한다. 이스라엘이 행정과 치안을 담당하며 온전히 이스라엘의 지배를 받는데, 그 규모가 자그마치 서안지구의 약 61%에 달한다. 이곳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불법정착촌과 이스라엘 군사시설이 분포되어 있다. 이스라엘 불법기지(Israeli Illegal Outpost)는 서안지구와 동예루살렘 내 위치한 이스라엘 소규모 거주시설 및 마을인데, 국제법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국내법상 미등록 시설로 분류된다. 현재 60만 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각지에 만들어진 정착촌에 거주하고 있다. 불법정착촌의 원 거주민은 팔레스타인 마을에 대한 공격은 현재 진행형이다. 때문에 내가 만난 팔레스타인 현지에서 만난 사람들 가운데에는 오늘날 그들이 처한 비극이 바로 이 협정으로 비롯되었다고 믿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1995년 미국 의회는 이스라엘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법을 통과시켰다. 이슬람 성지가 있는 예루살렘에 이스라엘 대사관이 위치하게 되는 것은 팔레스타인을 비롯해 아랍국가에 대한 중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전역이 모두 이스라엘의 수도라고 미국이 이스라엘의 손을 들어준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발을 의식한 미국 정부와 이스라엘은 대사관 이전은 차일피일 미뤘다.
2000년 발발한 2차 인티파다는 이스라엘 및 PA에 대한 팔레스타인 민중의 분노가 폭발한 결과였다. 오슬로 협정 이후에도 이스라엘은 영토 확장을 계속 진행했고, PA는 이렇다 할 저지나 협상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노를 바탕으로 6년 후인 2006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선거에서 하마스가 승기를 거머쥐고 만다. 이에 이스라엘은 하마스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는 가자지구를 봉쇄하는 한편, 레바논내 팔레스타인 저항세력인 헤즈볼라의 저지를 위해 레바논을 침공했지만, 참담한 실패로 이어지고 만다.
이후 가자지구는 하마스가, 서안은 PA가 각각 지배하는 현재의 구도가 굳어지게 되었다. 2010년과 2011년은 아랍세계의 격변의 시기였다. 아랍 혁명으로 인해 미국과 이스라엘의 우방이었던 무바라크가 이집트에서 실각하면서 권력 구도의 변화가 이뤄졌다. 이후 도널드 트럼프 집권까지 이스라엘의 가자지구에 대한 폭격이 계속되었다. 하마스는 건재했다.
그리고 2017년 12월 트럼프 행정부는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수도’라고 선언하며 주 이스라엘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옮기겠다고 발표한다. 트럼프의 강력한 지지 아래 이스라엘은 2020년 7월 1일 서안지구 영토 30%를 자국 영토로의 병합을 공식화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자신들의 저항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존재가 투쟁이다(Exist is to Resist)
참고. 홍미정 GCC국가연구소 공동연구원, 단국대 교수 ‘이스라엘 천연가스 수출을 위한 협력: 이스라엘, 아랍국가들, 유럽국가들, 미국’, ‘트럼프의 세기의 협상안, 평화를 통한 번영’, 사단법인 아디 ‘2019 팔레스타인 인권실태보고서’ 중 발췌, 국가인권위원회, 노동자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