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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니 Mar 30. 2021

아들에게 가는 길 영화 리뷰

들을 수 있는 자가 듣지 못하는 자를 이해해야만 소통이 시작된다

아들에게 가는 길(2016)

드라마 2017.11.30 개봉

100분 전체관람가

감독: 최위안

주연: 김은주, 이로운, 서성광

네티즌 평점: 9.1

- 다음 영화 참조 -


자칫 무거울 수 있는 주제인 청각 장애인 이야기를 소소한 위트와 함께 가족 이야기로 잘 만든 영화이다.


영화를 한 줄로 요약하면 청각 장애인 엄마가 할머니 손에 키워진 자신에 아들과 이제는 함께 살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는 이야기이다.


영화의 대부분의 대사는 수화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자막으로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보여준다. 소리 없는 대화의 세상을 느낄 수가 있다.


영화를 보는 동안 주인공이 말을 못 한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일반인의 삶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는 것 잘 보여준다.


소통을 외치는 시대, 가족 간에 진정한 대화가 무엇인가를 이 영화를 통해서 느낄 수 있다.



이 글은 줄거리 결말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 속 주인공은 부부 한 쌍이다. 보현(김은주)과 성락(서성광), 이 둘은 듣지도 말하지도 못한다. 아내는 공연을 앞두고 한참 춤을 연습 중이다. 남편은 꽃과 나무를 가꾸는 일을 한다. 둘은 알콩달콩 사이가 좋다.


둘 사이에는 원효(이로운) 아들이 한 명 있다. 감독은 왜 아들의 이름을 원효 대사를 연상하게 하는 이름으로 지었을까? 아들은 부모님과는 달리 듣고 말하는데 문제가 없다.


아들 원효는 태어났을 때 보현의 친정엄마의 반대로 직접 양육하지 못하고 보현의 할머니 손에서 자라게 된다. 원효는 시골 할머니 품에서 무럭무럭 자라서 지금은 유치원을 다닌다.


보현은 할머니 손에 자라는 원효를 서울로 데리고 와서 같이 지내고 싶다. 남편도 당연히 찬성이다. 그래서 유치원에 다니는 원효를 데리러 시골로 내려간다.


그런데 아들은 말을 듣지도 말을 하지도 못하는 엄마 아빠가 맘에 들지 않는다. 엄마 아빠를 보자마자 도망을 간다. 아빠는 원효를 겨우 달래서 장난감과 킥보드를 준다. 킥보드를 가지고 동네 친구 2명이랑 같이 논다.


그러다가 그 친구 중 한 명이 너희 엄마처럼 말 못 하는 거 전염되는 거 아니냐고 놀린다. 그러자 기분이 상한 원효는 킥보드를 던져버린다.


그리고 친구 2명은 너는 엄마가 없잖아. 그러는 너는 엄마가 외국인이라 우리나라 말도 잘 못하잖아. 이러면서 서로 막 다툰다.


이 장면을 잠깐 생각해 보면 원효를 포함한 친구들은 모두 엄마에 대한 아픔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서로 자극하고 싸움을 걸로 그러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아들을 서울 집으로 데려가려는 계획은 실패했다. 속상한 보현은 하소연을 남편에게 한다. 자신이 일을 관두고 아이만 돌보고 싶다고 한다. 남편은 유머러스하면서 때로는 진지한 사람이다.



그는 보현에게 이런 말을 해준다.


아이는 우리가 키우는 게 아니다. 
말을 배울 때까지만 키우는 거다. 
그 후로는 저절로 아이가 큰다. 

아이를 키우는데 
당신의 인생을 걸지 말라. 
당신이 행복해야 원효도 행복하다.


원효가 엄마를 거부하듯이 사실은 보현도 친정엄마를 거부하고 있었다. 보현이 말을 하지 못하자 친정엄마는 그녀가 말을 하도록 훈련을 시켰다. 그러는 와중에 보현은 상처를 많이 받았다.


보현이 성락과 결혼을 하고 싶을 때에도 엄마는 반대를 했었다. 그리고 보현이 아이를 낳아서 키우는 것도 반대를 했었다. 네가 정녕 자식을 말을 못 하고 못 듣게 만들 거냐며 속을 후벼 파는 모진 말을 했었다.


그래도 아들과 같이 살고 싶은 보현은 다시 아들을 서울로 데려 오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강제로 아들을 보현의 집으로 데리고 와서 며칠 지내게 된다.


아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보현과 그런 엄마가 마냥 답답한 아들이다. 그래도 그저 아들이 옆에 있으니 싱글벙글 좋은 보현이다. 하지만 원효가 갑자기 열이 올라가고 몸이 아프게 된다.


엄마에게 병원에 데리고 가달라고 외치는 원효. 하지만 그 말을 전혀 못 알아듣는 보현이다. 겨우 시골에 할머니와 전화 통화를 해서 원효를 병원에 데리고 간다.


원효는 자신이 목이 아파서 말을 못 하게 되는 거 아니냐고 의사에게 물어본다. 원효의 마음속에는 자신도 엄마 아빠처럼 말을 못 하게 될까 불안한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보현은 자기가 아들을 잘 돌보기가 어렵다고 생각해서 다시 시골 할머니에게 보내기로 한다. 그리고 이렇게 된 이유로 친정엄마 탓을 한다.


친정 엄마가 원효를 어릴 때 자기 손으로 키우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라고 엄마를 원망한다. 같이 춤을 연습하는 청각 장애인 직장동료이자 친구에게 하소연을 한다.


자기는 이제는 춤을 관두고 아이만 키울 거라고 이야기한다. 친구는 이제 공연이 얼마 안 남았는데 일도 하면서 아이를 키울 방법을 찾자고 설득한다.


이야기하다가 보현은 친구의 과거를 알게 된다. 그 친구는 말을 못 한다는 이유로 버려져서 엄마 없이 고아원에서 자랐다고 한다. 그래서 보현이 왜 여태 그런 이야기를 안 했냐고 물어보니 말을 못 해서 이야기 안 했다는 것이다.


갑자기 보현은 자신의 친정엄마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엄마에게 찾아가지만 마침 엄마는 쓰러져서 병원에 입원 중이다.


보현은 울음을 터트린다.

나를 왜 낳았나?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나를 낳아서 
왜 이렇게 힘들게 하느냐?


보현의 친정엄마는 보현에게서 엄마라는 소리를 듣고 싶어 했었다. 하지만 어린 보현이는 끝내 그 소리를 하지 못했다. 


어린 보현이는 속으로 '엄마'라고 말하고 소리로는 '어, 어, 어' 이렇게 울먹거린다.


여기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분명 어린 보현이는 엄마라고 말했는데 듣는 친정엄마는 그 소리를 '어'라고 인식한다. 의사소통이라는 것이 어려운 점이 바로 이런 것이다.


말을 하는 사람은 분명히 자기 속으로 '엄마'라고 했는데 들리는 사람은 '어' 이렇게 들리는 것이다. 


사주 명리에 무식상이 있다. 식상이 없는 사람은 자기 생각과 느낌을 표현을 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는 사주팔자이다. 그러나 무식상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서 말과 행동을 못하는 사람은 전혀 아니다. 


하지만 무식상은 '엄마'라고 말했는데 들리는 사람은 '어' 이렇게 들리는 것과 비슷하다. 이 난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것인가?


보현은 아들 원효가 보고 싶다. 춤은 이제 포기하기로 하고 그냥 시골로 버스를 타고 내려간다. 그런 엄마에게 원효는 '저기 저 사람 여기 살러 왔냐고?' 할머니에게 묻는다.


보현은 소리는 못 듣지만 천천히 말하면 입모양으로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다. 보현은 자신의 아들이 자기를 엄마라고 부르지 않고 '저기 저 사람'이라는 말에 화가 나게 된다.


원효를 눈이 내리는 겨울에 신발과 양발을 벗겨서 집 문 앞에 벌을 세워둔다. 엄마에게 사과할 때까지 거기 서 있으라고 말이다.


마침 원효 아빠가 서울에서 차를 타고 내려왔다. 아들이 밖에서 벌벌 떨고 있으니 무슨 일인가 물어본다. 보현은 아들이 사과하기 전에는 집에 들어올 수 없다고 우긴다.


그러자 아빠는 아들을 품에 안아서 자동차로 데리고 간다. 그리고 혼내는 엄마 없이 아빠랑 둘이 살자고 하면서 집과 점점 멀어지지는 방향으로 운전한다.


그러자 원효는 어디까지 갈 거나고 울먹인다. 자기는 신발도 없고 집에 가겠다고 말한다. 그러자 아빠가 엄마한테 사과를 안 하면 못 간다고 대답한다.


원효는 울면서 전화로 엄마에게 사과를 한다. '엄마 잘못했어요.' 아들이 엄마라고 말하는 입모양을 본 보현은 감동이 벅차오른다. 기쁨으로 눈이 내리는 시골길을 막 뛰어서 아들이 있는 자동차에 달려간다.


마지막에 '엄마'라고 말하는 듯한 보현의 얼굴이 나온다. 그녀에 목에서 나오는 '어, 어, 어'라는 소리와 함께 영화는 막을 내린다.




이 영화에서는 원효 아빠의 주옥같은 대사가 많이 나온다. 아내의 심정을 이해하는 그런 말, 그러면서도 아내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도 정확하게 아내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해주는 모습이 나온다.


그리고 아내와 아들 사이에서 현명하게 대처하는 모습이 인상 깊다. 그러면서도 그는 유머를 항상 잃지 않는 모습으로 나온다.


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과 어떻게 의사소통을 할 것인가? 그것이 가족이라면 말이다. 그런 것에 대한 화두를 던져주는 것은 아닐까?


사실 말을 하는 사람들끼리도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주어진 사주 명식이 다르기 때문에 각자 색안경을 끼고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


무식상인 사람의 말과 행동을 식상을 가진 사람은 어떻게 해석하는 것인가? 그냥 '어, 어, 어' 이렇게 해석해 버리는 것은 아닌가 싶다. 무식상인 사람은 정작 '엄마'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말이다.


무식상을 가진 사람이 식상을 가진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까? 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이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수화나 문자로 이해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식상을 가진 사람이 무식상을 이해하는 것은 수화나 문자로 대화를 하는 느낌은 아닐까? 속 시원하게 소리 내서 말을 못 하는 느낌일 것 같다.




과연 의사소통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서로 다른데 말이다. 이 영화는 나에게 그런 화두를 안겨주었다.


영화 속 원효는 엄마 아빠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한다. 엄마 아빠 또한 아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한다. 


그 간격은 좁혀가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야만 가능할 거 같다. 그래도 그 간격은 여전히 존재한다.


사주에 무식상, 무관성, 무재성, 무인성을 가진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뭔가 모를 의사소통에 한계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무식상을 가진 사람이 식상을 가진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까? 아니면 식상을 가진 사람이 무식상을 이해할 수 있을까? 


비유를 하자면 식상을 가진 사람은 원효인 것이다. 무식상은 원효의 부모님인 것이다.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 서민이 부자를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


명예가 높은 사람이 명예가 없는 사람을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 명예가 없는 사람이 명예가 높은 사람을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


결론적으로 가진 자가 가지지 않은 자를 이해해야 한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이 말이다. 가져서 여유가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우아하다.


나 같은 경우도 무식상인 남편을 많이 답답하게 느꼈다. 하지만 본인은 얼마나 더 답답했을까? 영화 속 보현처럼 말이다.


스스로 답답해하고 있는 사람에게 소리 내서 '엄마'라고 말을 하라고 했었다. 마치 내가 보현의 친정엄마 같은 모습이었구나 느끼게 된다.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라고 한다. 영화를 통해서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그 속을 들여다볼 수 있다. 그러면서 그들과 어떻게 소통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표를 던져준다.


영화가 전혀 무겁지 않게 밝게 만들었다. 그 원인은 영화 속 캐릭터가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런 성격을 가진 사람이 있을 듯하게 잘 그려냈다.


원효의 아빠 캐릭터는 토(土) 기운이 잘 발달된 사람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아들과 아내 사이, 아내와 장모 사이, 아내와 할머니 사이, 아내와 남편, 각각의 역할에서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균형감이 높다.


소소한 재미와 훈훈한 이야기를 안겨주면서 동시에 묵직한 주제를 관객에게 던져주는 그런 영화이다.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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