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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gela Gus May 31. 2023

프롤로그 Fake it until you make it

Polyglot Diary

낯선 언어는 매혹적이다. 어린 시절에는 지구의 모든 언어와 외계 행성 언어 두어 개쯤 구사하는 게 꿈이었다. 이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도 어족 별로 하나씩은 배워야 한다던가, 대륙 별로 빠짐없이 배워야 한다던가, 동북아시아 언어는 섭렵해야 한다던가, 판타지 소설을 읽으면 고대 노르드어나 켈트어를 배워야 한다던가(장래희망: 고대 노르드어 특기자로 발할라에 파견되는 드루이드), 세계 언어 영향력 순위 1위부터 10위까지는 다 알아야 한다던가, 소리가 예쁜 멸종 위기 언어는 배워 두어야 한다던가… 이런 다소 도착적인 욕망이 있었다. 어쨌거나 폴리글롯(다국어구사자)은 정해진 미래였다.


인공지능 DALLE-E가 그려준 "발할라에서 근무 중인 드루이드"


평범한 한국인에게 가장 가까이에 있던 영어는 원대한 폴리글롯 여정의 시작이었다. 다행히 대입 주요 과목이어서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으면서 덕질을 할 수 있었다. 숨 막히는 수험생 시절에도 제2외국어라는 숨 쉴 틈이 있었던 덕분에 우아하게 드라이한 sch 사운드에 매료된 독일어도 시작할 수 있었다. 장국영과 아무로 나미에 팬이라 수능만 끝나면 중국어(광둥어+북경어, 장국영이 둘 다 쓰는 관계로)와 일본어를 배울 예정이었다. 계획대로 일본어는 대학 2학년부터, 중국어(일단 진입 장벽이 낮은 북경어부터)는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시작했다. 3학기에 문부성 프로그램으로 일본에서 가게 되자 전공 공부보다 ‘신나는 외국어 생활’에 빠져들어 본 대학원을 그만두고 눌러앉아 영어 쓰는 직장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워킹 비자의 세계는 언어 덕력만으로는 하루하루가 쉽게 흘러가지 않았다. 여력이 생길 때까지만 독일어, 북경어 공부를 잠깐 쉬기로 했는데, 한국에 돌아와서도 다시 시작하지 못했다. 결국 직장 생활이라는 것을 하는 내내 쉬었고, 언제부턴가 독일어, 북경어 영화를 보면 소리는 고향의 말처럼 친근한데 뜻은 거의 모르겠는 제주 방언 같은 느낌이 되어 버렸다.


외국어 조기교육 인프라가 없던 시절에 자라서 폴리글롯이 되기 위해 어른이 되고 싶던 어린 시절의 나, 나 쫌 벌써 5개 국어 하는 것 같다며 뿌듯해하던 20대 초반의 내가 함께 손잡고 타임머신을 타고 중년이 된 나를 찾아온 상상을 해 보았다. 적어도 10개 국어는 하고 있을 줄 알았더니 3개 국어로 자족하면서, 그들에게 약속했던 다른 꿈들도 전부 미루고만 있는 나에게 실망한 그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다행히 그들을 만나기 전에 OTT와 유튜브의 시대가 열려, 봉인되어 있던 폴리글롯 야망이 살아났다. 유튜브에서는 선배 폴리글롯들이 언어를 재미있게 비교하고 가르쳐주는 콘텐츠가 수도 없이 올라온다. 디즈니플러스, 넷플릭스, 애플 TV에는 접하기 어려웠던 언어로 제작된 콘텐츠들과 함께 다국어 더빙판들이 나타났다. 좋아하는 영화/드라마를 이 언어 저 언어 더빙판으로 보면서 플리글롯 놀이를 시작하게 되었다. 내용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여러 언어로 보면 마치 이 모든 언어를 알아듣는 것 같은 황홀한 착각에 빠진다. (경험적으로, ‘착각’은 ‘구사’의 시작이다.)


아이폰 'toys' 폴더

결국 17년 전 이력서에서 지워버렸던 독일어와 북경어를 다시 시작했다. 독일어/북경어 학습을 위해 듀오링고(Duolingo), 드롭스(Drops), 부슈(Bushuu), 링크(LingQ) 앱을 깔고, 유튜브 채널 ‘이지 랭귀지(easy languages)’를 구독했더니, 찜 해두었던 언어들이 계속 눈에 밟힌다. 북경어 공부를 하려다가 레고의 나라 덴마크어를 눌러보고, 독일어 공부를 하려다가 츤데레 sch 발음과 정반대 진영에서 쫀득하다가도 또르르 굴러 다니는 발음이 예쁜 인도네시아어 맛보기를 해보는 통에 집중을 할 수가 없다. 언어에 관해 나란 사람은 어차피 선택과 집중은 못한다. 룰을 만들어서 타협하기로 했다. 우선 가장 오랫동안 귀와 마음에 담아 왔던 광둥어, 프랑스어, 스페인어만 지금 시작하고, 매년 장국영 기일(4월 1일)에 새로운 언어를 시작하기로.



잠들어 있던 폴리글롯 스피릿을 깨운 ‘N개국어로 영화/드라마 보기’ 놀이는 글로 잘 정리하여 연재할 예정이다. 기본이 전혀 없는 언어들도 파파고/DeepL/구글 번역기, 네이버 사전, ChatGPT의 도움을 받으면 암호 해독하는 것처럼 가지고 놀 수 있다. 영어와 일본어 대사는 받아 적고, 받아쓰기 어려운 언어는 자막을 옮겨 적는다. 원문이 영어나 일본어인 경우 우리말 번역은 직접 한다. 받아 쓸 수 있고 번역할 수 있는 언어가 2년에 하나씩 늘어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20개 국어를 구사하는 전 세계 폴리글롯들의 아이돌 스티브 카우프만은 기초는 가이드이지 순서가 아니라는 명언을 남기셨다. 기초를 끝내고 뭘 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바로 제일 재미있는 방식으로 살아 있는 콘텍스트 안에서 놀면서 언어에 ‘노출돼라’는 것이다.


유튜브 채널 Steve Kaufmann - lingosteve


폴리글롯들의 스토리를 살펴보면, 대부분 흔한 학습 순서 [기초 마스터 - 단어 암기 + 문법 학습 - 회화 or (한국이라면) 인증시험공부] 는 안중에도 없다. 다들 나름의 독특한 학습법이 있는데, 공통점은 전부 좋아하는 다른 것과 연결하여 ‘노출 시간’을 늘리는 것이다. 생각해 보니 나는 그동안 이걸 ‘착각시키기’라고 부르고 있었다. 알아듣고 있다고 계속 뇌와 귀가 착각하게 하다 보면 어느 날 정말 알아듣고 있기 때문이다. 30년 정도 꾸준히 언어 공부를 해 오면서 좌우명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다. Fake it until you make it.




프랑스어를 배워야 하는 이유는 가장 사랑하는 책 <어린 왕자>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어린 왕자>를 우리말, 영어, 일본어로 읽으면 번역이 확연하게 다른 지점이 꽤 많다. 원문이 단순하고 함축적일수록 번역자가 독자의 문화적 배경을 고려해야 하거나, 역자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담을 수 있는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며 장미에게 돌아가라고 말해주는 부분은 원래 대표적 명장면이지만, 일본어판(미타 마사히로 역)을 읽으면서 가장 감탄했다. 한국어판(김경주 역)에서는 “너는 네 장미에게 바친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그 장미가 그토록 소중해진 거야.”, 영어판(리처드 하워드 역)에서는 “It’s the time you spent on your rose that makes your rose so important…”로 번역한 부분을 일본어판에서는 이렇게 번역했다.


花のためにあんたがむだにした時間のぶんだけ、花はたいせつなものになったんだ。
 (꽃을 위해 네가 쓸모없이 보낸 시간만큼 꽃이 소중해진 거야.)


‘바치다’, ‘spend’ 대신 우리말로는 ‘허비하다’라고 까지 번역할 수 있는 ‘無駄にする(쓸모없이 쓰다)’라는 표현을 선택한 것은, 번역가가 ‘다른 무엇을 바라지 않고, 어떤 결과도 생각하지 않고 순수하게 애정을 쏟는 시간’이라는 의미를 담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역시 오타쿠의 본산 일본이라 이런 표현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덕후족으로써 미타 마사히로 님께 깊은 리스펙을 보낸다.


우리나라 언어덕들은 종종 의심과 공격을 받는다. 메이저 언어 도장 깨기를 하는 사람은 자기 계발 중독자로 오해받기도 하고(사용국 수에 비례해서 언어를 배워두면 어딜 여행 가도 소통이 편할 테니 국제 운전면허 취득보다 든든한 자기 계발이기는 하다. 쏘왓?), 마이너 언어에 꽂혀 있으면 쓸데없다는 핀잔을 받기도 한다. 그 시간에 차라리 뭐뭐에 도움이 되는 뭐뭐뭐를 하라거나 하다못해 다른 메이저 언어를 배우라는 충고를 과장 조금 보태면 백만 번 정도 들을 수 있다. 꽃꽂이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퇴직하면 살림살이에 보탬 되게 꽃집 창업 스쿨에 다니라거나, 꽃꽂이해서 뭐에 쓰냐 하다못해 화전을 부쳐 먹으라고 하지는 않으면서 말이다. 언어를 일이든 공부든 다른 무엇을 하기 위한 도구로 한정하는 논리인데, 학벌이나 커리어를 위해 메이저 언어를 ‘취득’하는 게 흔한 목표인 마이너 언어 국가라서 어쩔 수 없이 생긴 사고방식일 것이다.


재미있는 역설은, 한국어 학습 인구는 K-콘텐츠 덕후 분들 덕분에 무서운 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2023년 5월, 듀오링고 한국어 학습자 수는 랭킹 7위까지 올라왔다. (1위 영어, 2위 스페인어, 3위 프랑스어, 4위 독일어, 5위 일본어, 6위 이탈리아어, 7위 한국어, 8위 포르투갈어, 9위 중국어, 10위 힌디어) 우리말이 사용인구 1억 명을 돌파하고 메이저 언어로 등극한다면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덕후 분들 덕분이다.


모어가 메이저 언어라 다른 언어를 배우는 것이 옵션인 나라에서는 외국어 콤플렉스가 없다. 하고 싶을 때 하고 싶은 만큼만 하기 때문에 발음이 어떻다느니, 어디가 틀렸다느니, 틀린 말은 아닌데 뭔가 어색하다느니… 따지고 보면 소통과는 상관도 없는 걸 가지고 왈가왈부하며 서로 위축시키고 위축되는 일도 없다.


한국어가 메이저 오브 메이저인 K-Pop 세계관에서는 외국어를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 3~4세대 아이돌 그룹 한국인 멤버들을 보면 외국 방송에서건 외국어가 유창한 멤버 옆에서건 당당하게 자기 스타일로 되는 만큼 말한다. 잘하려고 애쓰지 않으니까 자연스러워서 의미도 뉘앙스도 더 잘 전달되고 개성까지 더해진다. 역시 언어는 세계관이고 구사력은 자신감이라는 걸 절감한다.

 

AI 번역기 성능이 나날이 진화하면서 언어 학습 자체에 대한 무용론도 등장했다. 진심으로 AI의 건승을 빈다. 이제 드디어 사용 인구 순위던, 취업 영향력 순위던 상관없이 어떤 언어를 배운다는 것이 순수한 ‘애호’의 영역으로 완전히 넘어갈 테니까. 고등학교 때는 외국어 낙제생, 대학에서는 화학을 전공했으나 스무 살 넘어 눈 뜬 외국어의 세계에 빠져 아흔넷에 소천하실 때까지 16개 언어를 구사한 폴리글롯 씬의 선구자 롬브 커토는 자신을 통역가, 번역가, 교사 등 언어를 사용하면서 하고 있는 ‘일’로 규정하지 말고 ‘언어 애호가’로 불러 달라고 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언어 덕들의 길이다.




진정 사랑하는 것들을 취미라고 이름 붙여 ‘짬’이라는 좁디좁은 시간의 틈바구니에 쑤셔 넣어 왔던 시간을 돌아보고 있다. 값진 경험도 많이 했던 고마운 시간이지만, 이제는 타임머신을 타고 중년의 나를 만나러 온 꼬마와 청년에게 “약속했던 대로 소설 쓰면서 여기저기서 신나는 일을 찾고 이 사람 저 사람들과 판을 벌리는 폴리글롯으로 살고 있습니다”라고 당당하게 인사할 날을 준비해야 한다고 다짐해 본다. 


‘Fake it until you make it’에 시동을 걸기 위해 이 글을 시작할 때 붙였던 제목 ‘Polyglot (Wannabe) Diary’에서 (Wannabe)를 지웠다. 신나는 폴리글롯 라이프는 이미 시작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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