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영이 이사를 간 것은 그해 초여름이었다. 짐을 싣는 트럭의 요란한 소리만 남긴 채 그 누구에게도 작별을 고하지 않았다. 지영의 가족이 떠난 뒤 그녀의 두 아이가 키우던 화분 하나가 주인을 잃고 분리수거장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희수는 남매의 이름표가 꽂힌 화분을 보며 지영이 그토록 붙잡고 싶어 했던 '평판'이라는 것이 한여름의 안개처럼 얼마나 쉽게 흩어지는지를 생각했다.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 3년이 지났다. 하린이는 제법 무거운 가방을 메고 혼자 등교할 만큼 자랐고, 희수의 서재에는 그녀의 이름이 박힌 번역서가 몇 권 더 늘어났다.
어느 늦은 가을 오후였다. 희수는 새로 맡은 원고의 배경이 되는 오래된 성당을 취재하기 위해 낯선 동네를 찾았다. 취재를 마치고 근처 작은 카페에 들어섰을 때, 문에 달린 풍경 소리에 섞여 들려오는 낯익은 웃음소리에 희수의 걸음이 멈췄다.
카페 구석, 햇볕이 비스듬히 내리쬐는 테이블에 지영이 앉아 있었다.
그 앞에는 처음 보는 여자 둘이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지영은 3년 전과 달리 화려한 스카프를 둘렀고, 손놀림은 우아하고 기민했다.
"그 집 엄마가 좀 그래요. 내가 웬만하면 도와주려고 했는데, 워낙 자기 세계가 강해서 소통이 안 되더라고. 내가 오죽하면 그 사람 때문에 마음고생을 다 했겠어."
지영의 목소리가 익숙한 점도로 공간을 채웠다. 그녀는 새로운 무대 위에서, 새로운 관객들을 앉혀두고, 예전과 같은 배역을 연기하고 있었다. 지영의 말속에서 누군가는 다시 '사회성이 부족한 가여운 여자’로 박제되고 있었다.
카운터로 향하던 희수는 걸음을 돌려 조용히 카페를 나왔다. 지영은 여전히 열정적으로 말을 이어가느라 여념이 없었다.
카페 밖은 차가운 가을바람이 불고 있었다. 희수는 코트 깃을 여미며 길을 걸었다. 지영에 대한 분노도, 연민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지영이 평생 헤매고 다닐, 복잡하게 얽힌 미로가 마치 정해진 문법처럼 명확하게 다가올 뿐이었다.
희수는 가방 속의 수첩을 꺼내 오늘 본 성당의 차가운 돌벽에 대해 적으려다 멈췄다. 대신 지영이 머물고 있는 카페 위로,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던 그 위태로운 햇살의 모양을 떠올렸다.
홀연히 사라졌던 지영을 더는 떠올리지 않을 자신을 느낀 희수는 길고 부드러운 숨을 내쉬었다. 이내 결심한 듯 손에 든 수첩을 접어 가방에 밀어 넣고 하린이가 기다리는 집을 향해 빠른 걸음을 내디뎠다. 썰물이 빠져나간 후 단단해진 갯벌처럼, 희수의 내면은 이제 아무런 흔적 없이 평온했다.
--fin
* 글을 마무리하며 *
우리는 누구나 누군가의 이야기 속에서 악역이 되기도 하고, 가련한 주인공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만든 무대 위에 서 있기를 거부하는 순간, 비로소 진짜 나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지영이 여전히 헤매고 있는 그 미로 밖으로, 희수와 함께 걸어 나와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를 전합니다. 여러분의 내면에는 지금 어떤 사정이 흐르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