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이 있은 지 한 달쯤 지났을 때, 아파트 단지 내 작은 도서관에서 소란이 일었다.
희수는 하린이 빌린 책을 반납하러 가던 길이었다. 유리문 너머로 낯익은 목소리들이 날카롭게 얽혀 있었다. 지영과 현미, 그리고 점심 모임에서 보았던 여자들이었다. 평소의 우아한 소프라노가 아닌, 쇳소리가 섞인 지영의 목소리가 복도까지 흘러나왔다.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어? 내가 너희들한테 어떻게 했는데."
지영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배신감보다는 자신의 영향력이 부정당하는 데서 오는 당혹감이 더 커 보였다. 현미가 차갑게 대꾸했다.
"지영아, 네가 우리를 도와준 게 아니라 우리를 이용한 거겠지. 희수 씨한테도 그랬잖아. 우리 뒤에서 희수 씨가 얼마나 이상한 여자인지 떠들고 다닌 거, 우리가 모를 줄 알았니?"
희수는 문고리를 잡은 채 멈춰 섰다.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낯설게 보였다. 지영은 타인에게 베푼 호의를 일종의 부채로 여기게 만들었지만, 그 부채는 결국 지영 자신에게로 돌아가고 있었다. 지영이 다른 엄마들에게 희수를 '사회성이 결여된 가여운 여자'로 묘사했듯, 그들에게도 서로를 제물 삼아 자신의 위치를 확인해 왔음이 드러난 모양이었다.
며칠 뒤, 지영이 희수의 집을 찾아왔다.
초인종 소리는 길고 집요했다. 문을 열자 서 있는 지영은 전보다 수척해 보였다. 눈가의 화장은 번져 있었고, 늘 꼿꼿하던 어깨는 힘없이 처져 있었다. 지영은 희수를 보자마자 거실로 밀고 들어와 식탁 의자에 주저앉았다.
"희수 씨, 들었죠? 사람들이 나를 오해하고 있어요. 나는 정말 희수 씨를 생각해서... 현미 그 여자가 질투가 나서 말을 지어낸 거예요."
지영은 희수의 손을 잡으려 했다. 그 손은 차갑고 축축했다. 희수는 부드럽게, 그러나 분명하게 자신의 손을 뺐다. 식탁 위에는 희수가 교정하던 원고 뭉치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지영 씨."
희수의 부름에 지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사람들이 말하는 게 오해라면, 시간이 해결해 주겠죠."
"시간이라니요! 지금 당장 내가 죽겠는데. 희수 씨가 한마디만 해줘요. 내가 희수 씨 얼마나 챙겼는지 알잖아. 우진이 다쳤을 때도 희수 씨가 도와준 거, 내가 동네방네 고마운 사람이라고 말하고 다녔던 거 잊었어요?"
희수는 지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영의 말속에는 여전히 '거래'의 논리가 흐르고 있었다. 내가 이만큼 주었으니 너는 이만큼 내놓아야 한다는 계산서. 하지만 희수는 그 계산서에 서명할 생각이 없었다.
"지영 씨가 저에 대해 사람들에게 뭐라고 했는지, 다 알고 있었어요."
지영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하지만 전 화나지 않았어요. 지영 씨가 만든 그 여자는 제가 아니니까요. 그래서 도와줄 수도 없어요. 제가 그 싸움에 끼어드는 순간, 지영 씨가 만든 허구 속의 제가 진짜가 되어버리거든요."
희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문을 열었다. 밖에서 들어오는 복도의 빛이 지영의 초라한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지영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만든 미로에 갇힌 미노타우로스처럼 보였다.
지영이 문밖으로 나설 때, 희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누군가를 구원하려 했던 지영의 손길이 실은 자신을 붙잡아달라는 비명이었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그 비명은 너무나 뒤틀려 있어 아무에게도 닿지 못했다.
문이 닫히고, 희수는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문장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고, 공기는 다시 차분하고 명료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