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은 점심 식사 자리였다.
지영의 무리는 넷이었다. 모두 지영보다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다. 희수가 들어서자 지영이 손을 흔들었다.
"왔어요? 여기 희수 씨예요. 우리 아파트에 같이 살다가 지금은 근처에 사는 분인데, 번역가예요."
소개는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희수는 그다음 문장에서 멈췄다.
"집에서 일하면서 애 키우는 거라 다들 워킹맘이라 할 수 있냐 하지만, 그래도 나름 열심히 하는 분이에요."
웃음이 따라붙었다. 악의는 없어 보였다. 희수는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자리에 앉는 내내 희수는 느꼈다. 지영이 자신을 소개하는 방식과, 자신이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 사이의 간극을. 그 간극 안에서 지영이 원하는 '희수'가 조용히 만들어지고 있었다. 희수는 그걸 부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은 그 안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모임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희수는 승미에게 전화했다. 오늘 모임 이야기를 했다. 승미가 말했다.
"야, 희쑤. 그거 소개가 아니야. 전시야. 지영이 자기가 어떤 사람들이랑 아는지 보여주려고 너를 데려간 거라고."
희수는 웃었다. 그 말이 새롭지 않았다. 이미 식사 자리에서 느낀 것을 누군가 알아보았다는 게 위로가 됐다.
박 선생님은 지영의 말대로였다. 선이 분명했고, 말이 많지 않았고, 학부형과 필요 이상으로 가까워지지 않았다. 첫 상담에서 희수는 그걸 느꼈다. 그리고 마음이 놓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지영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 상담 어땠어요? 많이 당황하셨죠?
희수가 답했다.
— 아뇨, 잘 맞을 것 같아요.
잠시 후 지영의 답장이 왔다.
— 그래요? 다행이네요. 희수 씨랑 비슷한 스타일이라 갈등할 수도 있을 것 같았는데.
희수는 그 메시지를 오래 바라봤다. 처음 카페에서도 같은 말을 했었다. 비슷한 스타일이라 갈등할 거라고. 희수는 그 말이 어디서 나오는 건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다만 이번에는, 그 문장이 자신을 향한 예측인지 아니면 바람인지, 그 경계가 흐릿하게 느껴졌다. 희수는 짧게 답했다.
— 네, 다행이에요.
그리고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었다. 박 선생님과의 관계는 지영의 예측과 달리 흘러갔다. 선이 분명한 선생님이었지만, 그 선 안에서는 단단하고 따뜻했다. 하린이를 정확하게 봐주는 사람이었다. 희수는 그런 어른이 딸 곁에 있다는 게 안심이 됐다.
이듬해 봄, 2학년이 된 하린이가 어느 날 조용히 희수 곁에 앉았다.
"엄마, 나 학교 가기 싫어. 민준이가 자꾸 나 때문에 학교 오기 싫다고 한대. 내가 뭘 잘못했대."
희수는 아이의 얼굴을 바라봤다. 억울함과 혼란이 뒤섞인 얼굴이었다. 희수는 아이의 손을 잠시 잡았다가 놓았다. 그날 저녁 지영에게서 연락이 왔다.
— 희수 씨, 저 오늘 들은 이야기가 있는데요. 말해야 할지 몰랐는데. 민준이 엄마가 하린이 때문에 민준이가 학교 가기 싫어한다고 많이 속상해한다더라고요. 엄마들 사이에서 이야기가 나오는 것 같아서요. 희수 씨가 아는 게 좋을 것 같았어요.
희수는 메시지를 두 번 읽었다. '말해야 할지 몰랐는데. 희수 씨가 아는 게 좋을 것 같았어요.' 그 문장이 오래 남았다. 희수는 잠시 생각했다. 이 말이 자신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무언가를 향해 던져진 것인지.
희수는 답장 대신 전화기를 들었다. 지영이 아니라 박 선생님께 전화했다. 선생님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어머니, 하린이는 반에서 모범적으로 잘 지내고 있어요. 그런 이야기가 나올 아이가 아닙니다. 제가 지켜봐 왔으니까요. 혹시 어디서 들으셨어요?"
"아는 분께 전해 들었어요. 확인하고 싶었어요."
"잘하셨어요. 이런 건 직접 확인하는 게 맞아요."
전화를 끊고 희수는 오래 앉아 있었다. 지영의 메시지를 다시 봤다. 이번엔 처음 읽을 때와 다르게 읽혔다. 걱정과 정보 사이 어딘가에 있는 말. 희수를 위한 것 같지만, 읽고 나면 불안이 남는 말. 희수는 지영에게 짧게 답장을 보냈다.
— 선생님께 직접 확인했어요. 그런 일 없다고 하시네요. 알려줘서 고마워요.
지영의 답장은 한참 후에 왔다.
— 그래요? 다행이다. 제가 괜한 말을 전한 것 같아서 미안해요.
희수는 그 답장에 답하지 않았다. 창밖을 보며 희수는 생각했다. 지영이 그 말을 전한 건 희수를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희수가 흔들리길, 혹은 누군가와 갈등하길 바랐던 걸까.
희수는 그날 밤도 결론 내리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지영의 말은, 도착한 곳에서 한 번 더 읽어야 한다는 것. 앞으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