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품을 구입할 때마다 유통기한을 확인했다. 최대한 많이 남은 날짜의 것으로 집어 들며 '저 짧은 것들은 누가 사 가지? 궁금증 보다 죄책감이 스몄다. 유통기한이 되었다고 상하거나 못 먹는 게 아닌 식재료도 있다. 두부, 치즈가 특히 아리까리했다.
나 같은 소비자가 많았던 게 분명했다. 소비기한이란 것이 생겼고 최소 이 날짜까지는 먹어야 한다는 명확한 지침이 생긴 셈이었다. 냉장고에서 식자재를 꺼낼 때마다 소비기한과 유통기한을 헷갈리지 않으려는 노력이 아직은 필요하지만, 나처럼 예민한 소비자에겐 큰 도움이 된다.
이른 아침에 냉장고 문 칸에 있던 우유를 꺼내 들었다. 유통기한이 지나있었다. 우유를 자주 마시지 않는 우리 리에게 흔히 일이라 놀랍지는 않았다. 많이 남지 않아 다행이었다. 입구를 열어 냄새를 슬쩍 맡아보았다. 멀쩡했다. 작은 컵에 조금 따라 맛도 보았다. 맛도 별다르지 않았다. 그냥 먹어도 되나? 우유 팩을 들고 얼음이 되었다.
지난가을 어중간한 날씨에 어중간한 맛이 나는, 냉장고에 넣어 두지 않았던 무언가를 먹고 식중독에 걸려 고생한 기억이 번뜩 떠올랐다. 그때 얼마나 후회를 했던가! 맛도 냄새도 멀쩡하지만 유통기한이 지난 우유에 물을 부었다.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듯이 허겁지겁 수돗물을 부어 우유를 묽게 만들었다.
브런치에도 올렸지만, 스피치를 부탁받았던 모 기업에서 주관하는 독서 토론 활동을 5년째 이어오고 있다. 기수로는 열한 번 째다. 지난 기수를 마치며 이제 그만할 때가 아닌가 고심했다. 해당 출판사가 발간하는 책의 색이 비슷한 데다 이젠 나만의 독서 클럽을 만들어 진행해야 할 때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토론 횟수만도 300회가 다 되어 가고, 회의, 토론 등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자격증도 이미 취득했으니 경험이라면 충분하지 않을까 했다.
문제는 나만의 내적 친밀감이었다. 코로나19로 온 세상과 단절될 뻔 한 때에 나를 행복하게 해 주었던 커뮤니티를 내가 먼저 떠나기가 쉽지 않았다. 미련이 뚝뚝 흘렀다.
꾸역꾸역 이번 기수를 애써 해 나가던 중에 스피치 관련 일이 발생했다. 유치하게도 정이 뚝떨어졌다. 고작 이런 일로? 싶게 말이다. 하루 이틀이 지나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들의 잘못도 나의 잘못도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미련을 내려놓지 못하니 하늘이 알아서 어떤 기회를 마련해 주는 느낌이랄까?
다음 기수부터는 신청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들이 발간하는 책 중 내게 필요한 걸 선택적으로 읽긴 하겠지만, 그들이 강요하지도 않은 충성심은 가벼이 버릴 수 있게 되었다. 느슨한 관계를 설정할 힘이 생겼다. 그들과 나 사이 유통기한은 여기까지였다.
오랜 사귄 친구가 있다. '친구였다'가 명확한 정의가 아닌가 생각하게 될 만큼 어렵게 이어가고 있는 관계다. 몇 년 전 이 친구에게 내쳐진 경험이 있다. 나를 마음에서 밀어내는 듯 보인 징조가 있었지만, 그렇게 일방인 방법으로 내쳐질 거라 생각하지 않아 상처를 크게 받았다. 그런 결정을 내린 이유라도 알았더라면 받아들이기 조금 쉬웠을 텐데, 일방적 통보와 다름없어 심적 타격은 상상 이상이었다. 놀란 가슴을 진정하는 데 수개월이 걸렸다.
여러 우여와 고절을 통과하고 친구와 다시 마주한 날이 있었다. 2년 만이었다. 그간 서운했던 마음을 털어내고 서로를 보듬는 시간이었다. 고해성사하듯 속사정을 털어놓던 친구의 사정이 이해됐다.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겠구나, 지난 시간을 잘 털어내고 지금부터 새로운 관계로 전환하면 그만이지' 단순하게 생각했다. 그날의 우리의 만남이 따뜻했고 사랑스러워서 설레기까지 했다.
다시 만난 친구에게 간혹 전화를 걸었다. 바로 받을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좀 더 많았다. 바쁘다는 문자가 오기도 해지만 콜백은 없었다. 얼마 전 마지막으로 연락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장은 할 일이 있어 어려우니 곧 연락하겠다 한 것과 달리 2주 가까이 감감무소식이다.
친구의 콜백이 없었다는 걸 알아차린 어느 때, 서운했다. 다시 연락이 닿던 때로부터 지금껏 매번 내가 먼저 친구를 찾았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친구와 내 관계의 유통기한이 다 한 걸까 소비기한을 통과하는 중인 걸까? 유통기한이 다 한 건 분명해 보인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빌리자면, 우리 관계의 유통 기한을 갱신하려면 새 술이 필요한 걸까, 새 부대가 필요한 걸까? 아니, 꼭 그래야 하는 걸까?
친구와 나는 소비기한이 끝나길 기다리는 사람들 같다. 유통기한이 끝났지만 버려야 할지 냉장고 속에 다시 넣어야 할지 긴가민가 하는 우유처럼.
묽게 희석한 우유는 우리 집 베란다에서 반짝이는 초록을 자랑하는 고무나무 몫으로 돌아갔다. 고무나무의 잎에 묻은 먼지를 닦아내고 남는 건 조금 부어 주었다. 그러고도 남은 건 마당 텃밭에 고루 뿌렸다. 연약한 인간의 장기로는 감당하지 못하는 유통기한 지난 우유를 자연은 넉넉히 소화했다.
"좋은 우유니까 먹고 잘 자라라~" 엄마가 심어 놓으신 부추를 향해 미안한 변명 어린 한 마디를 건넸다. 탈탈 털어진 우유팩이 가벼워 후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