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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umpkin Oct 18. 2021

나비되어 날아간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의<생의 수레바퀴>

아름다운 한 마리의 자유로운 나비처럼...



우리가 지구에 보내져 수업을 다 마치고 나면

몸은 벗어버려도 좋아

우리의 몸은 나비가 되어 날아오를 누에처럼

아름다운 영혼을 감싸고 있는 허물이란다.

때가 되면 우리는 몸을 놓아버리고 영혼을 해방시켜

걱정과 두려움과 고통에서 벗어나

신의 정원으로 돌아간단다.

아름다운 한 마리의 자유로운 나비처럼 말이야.

- 엘리자베스 퀴블로 로스가 ‘암에 걸린 아이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생의 수레바퀴> 그 옆에는 흙 색깔로 ‘죽음을 통해 삶을 배우고자 하는 이에게’라는 작은 제목이 붙어있다. 그녀의 삶을 담은 그녀의 마지막 에세이.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달랐다. 세 쌍둥이 중 900g의 그 작디작은 몸으로 동생들이 세상에 잘 나올 수 있도록 길을 내어준 맏언니 퀴블로 로스.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자신의 자리를 당당하게 지키며 태어난다.

생김새뿐만 아니라, 머리 모양도, 옷도 똑같이 입고 다녀야 했던 세 쌍둥이라는 것이 그녀에게 영향을 끼쳤던 걸까.  그녀는 고백하고 있다.


“나는 언제나 남보다 열 배의 노력을 하여 남보다 열 배의 가치가, 뭔가 생존의 가치가 있음을 입증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것이 매일의 고통이었다.” (P23)




그렇게 어렸을 때부터 일찍 자신의 정체성과 자신의 생존의 가치를 입증해야 한다고 느꼈다. 어쩌면 그녀의 강박관념은 엄마의 좁은 뱃속에서 열 달 동안 자기와 똑같이 닮은 다른 두 여동생과 함께하며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 생존의 몸부림이 그녀의 세포 안에 박혀버린 것 아닐까. 그녀의 끈질긴 생명력은 ‘삶’과 ‘죽음’에 대한 관심으로, 생명에 관한 존엄성과 사랑으로 이어지고, 그것은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그녀의 DNA에 새겨져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생명의 목적을 찾아내고 싶습니다.
언젠가는 꼭 내 힘으로 해낼 것입니다. 
언제나 가장 높은 별을 목표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P20)


어린 퀴블러 로스는 자신이 스스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누가 가르쳐주기도 전에 삶의 비전을 어떻게 가져야 하는지 이미 스스로 혼자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언제나 가장 높은 별을 목표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녀의 당당한 고백은 전율이 이는 감동으로 이끌었고 내 안에 심짓불을 댕겨주었다.




꼬마 엘리자베스가 폐렴으로 병실에 있었을 때 만난, 먼저 죽음의 나라로 떠나는 여자 아이와의 경험은 뭐라 말로 표현하기 힘든 벅찬 감동이었다. 쏟아지는 눈물을 막기 힘든 애틋한 슬픔이 함께 동반된 아름다운 감동.

그 여자 아이는 아무도 찾아오는 이 없는 외로운 아이였지만, 그 아이는 외롭지 않다고 했다. 혼자가 아니라고 했다. 죽음이란 무엇일까. 영혼의 세계란 어떤 것일까. 꼬마 엘리자베스의 삶은 이때부터 죽음과 연결되었던 건지도 모른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받아들이게 하는 그래서 죽음 너머의 삶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던 엘리자베스. 이 삶은 다른 삶으로 넘어가는 과정이고 관문이라는 것을 알려주며 그런 평온하게 저곳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이 삶을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 세상에 온 것이라는 것.


그래선지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죽음이라는 것이 좀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사실 나 스스로의 죽음이 두려웠던 적은 없는 것 같다. 단지 내가 죽고 난 후에 남겨지는 가족들의 슬픔, 상황들이 내겐 두려움일 뿐. 이 책을 처음 읽을 당시엔 큰 딸아이는 대학생이고  자신의 삶을 잘 챙겨갈 수 있는 나이지만 막내 딸아이는 아직 어리니까 만약 내가 떠나야 할 때라면 조금 이르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어떤가. 큰 아이는 대학원을 졸업하고 전문 분야에서 일하고 있고, 둘째 역시 대학을 졸업하고 전공을 살려 자기 앞길을 잘 챙기고 있으니 지금이라면 이르지 않다고, 이제는 갈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역시 답은 쉽지 않다. 남편이 너무 외롭겠지. 우리 부부는 종종 이야기한다. 남편이 먼저 가야 한다고. 




퀴블러 가족. (맨 왼쪽이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그녀가 그렇게 태어날 때부터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의 긴장 속에 보내야 했고 가부장적인 아빠 밑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기는 했지만, 엄마도 아빠도 참 따뜻하고 가정적인 분이셨음이 느껴진다.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아기 예수님을 찾으러 아빠와 함께 산속을 헤매는 장면이었다. 흰 눈이 반짝거리는 것은 바로 아기 예수님이 가까이에 있다는 표지라고 알려주는 아빠. 아이들에게 아름다운 꿈과 추억을 심어주는 얼마나 멋지고 다정한 모습이었는지. 한치의 의심 없이 믿는 순진한 아이들. 그렇게 헤매고 다니다 결국 찾지 못하고 집에 돌아오니 환하게 불빛이 달려있는 크리스마스트리. 아기 예수님이 켜놓은 것임을 믿고 두근대며 좋아라 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가슴 먹먹한 감동이 이는 가운데, 우리 사랑하는 딸들에게 그런 아름다운 기억을 심어주지 못했음에 마음 한편이 싸했다.


엄마는 사랑하는 남편과 어린 자녀들을 위해 맛있는 음식을 만들고 함께 노래를 하고 합창을 하며 보내는 퀴블러 가족들. 엘리자베스는 비록 노래가 안 따라줘서 설거지를 하며 부엌에서 보내지만, 원하는 노래를 신청하며 좋아라 하던 그녀. 너무나도 예쁘고 아름다운 가족의 그림이다. 신기했던 것은 가족들과 함께 노래하며 함께하지 못하고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면서도 투덜대지 않고 좋아하는 노래를 신청하는 그녀의 긍정성과 예쁜 마음에 얼마나 마음이 따뜻해지던지.


그녀가 매니와 이혼을 하고 떠날 때도, “이혼은 그가 한 것이지 내가 한 것은 아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하며 끝까지 매니를 곁에서 지켜주는 엘리자베스. 그녀의 가족에 대한 확고하고도 끈끈한 사랑은 어쩌면 이렇게 가족 사랑을 함께 나누며 자란 엘리자베스에겐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에게 신은 똑같은 사랑을 보내준다. 죄인에게도 의인에게도 똑같이 비와 햇빛을 뿌려주듯이 사랑도 마찬가지다. 단지 그 사랑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고는 모두 나의 선택이며, 그 뒤로 이어지는 행동 역시 나의 선택이라는 것. 그러기에 우리의 삶은 각각의 형태로 나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오래 살고 짧게 살고 하는 문제가 아니다. 내가 세상에 나와 배워야 할 수업을 다 배웠는지. 소명이라 불리는 목적을 다 했는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결국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은 내가 세상에 나온 소명을 다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가슴 저 밑바닥부터 끓어오르는 내면의 목소리에 온 몸으로 반응했다.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한치의 주저함이 없었던 고집스러운 엘리자베스. 전쟁 속을 뛰어들고, 좋은 직장을 버리고 평화 지원군으로 나서며,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으로 라면 그녀는 갈길이 험하고 굶주리고 고통의 연속이어도 달려갔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도 삶의 고통은 여지없이 따른다. 매니와의 이혼, 자신의 모든 소중한 것을 상실하게 되는 어느 누군가의 방화. 배신 그리고 병. 하지만 그녀는 그 모든 것을 이겨낸다. 사랑이 있다면 어떤 것도 이겨낼 수 있음을 그녀는 삶으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경험 속에 알고 있다. 신은 우리에게 우리가 지지 못할 십자가는 주지 않으신다는 것을. 그렇기에 내게 주어지는 고통은 내가 이겨낼 수 있는 것임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주 넘어지고 자주 힘들어하고 자주 무너진다. 나의 두려움과 불안까지 얹어놓은 십자가의 무게에 짓눌려서.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녀가 말하는 것처럼 나에 대한 믿음 인지도 모른다. “신이 준 것이라면 어떤 고통도 견뎌낼 수 있다는, 나에 대한 믿음”. 왜냐면 신은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견뎌낼 수 없는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은 결코 주시지 않으시니까.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으니까....





큰 상실을 겪을 때마다 오뚝이처럼 일어난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그렇게 고개 바짝 쳐들고 하늘을 바라보고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 그 이유는 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어떤 고통의 순간에서도 내가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그 안에 하느님이 내게 깨닫게 해주고 싶은 무엇이 있을 거라는 믿음. 무엇을 나에게 가르쳐주고 싶으신 거고, 내가 무엇을 배우기를 원하시는지를 찾는 마음. 그것이 내가 무너지지 않고 그때마다 잘 견뎌낼 수 있었던 이유였다.


나비를 사랑한 아름다운 그녀는 그렇게 자신의 어린 시절부터의 꿈과 소명과 사랑에 대해 그녀가 얼마나 집요하고 끈질기게 자신의 꿈을 놓지 않았는지. 그녀 안에 가득한 사랑을 있는 그대로 나누어주고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나눠주고자 했는지. 그녀의 삶은 마치 이미 태어나기도 정해져 있었던 운명처럼 느껴졌다. 그녀를 둘러싼 모든 삶이 그녀를 그렇게 이끈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에 열심히 충실하고 성실하게, 온 사랑으로 기꺼이 임했던 그녀 엘리자베스.


"에바는 믿음, 에리카는 희망, 나는 사랑이었다. 전 세계에 사랑이 부족한 것 같던 그 시기에 나는 선물로, 명예로, 무엇보다도 책임으로 그 말을 받아들였다." (P53)


이해가 가지 않는 한 가지는 엘리자베스의 아빠는 왜 꼬마 엘리자베스가 그토록 사랑으로 키웠던 토끼 블래키를 그녀로 하여금 정육점에 갖다 주게 했던 것일까. 너무나도 잔인했고 도저히 눈물 없이 읽을 수 없었던 부분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너무 무서웠다. 그 어린 엘리자베스가 느꼈을 그 고통과 상실감과 괴로움. 그리고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지켜주지 못했음에 달라붙는 죄책감과 무력감. 내가 엘리자베스가 된 듯한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너무나도 잔인했던 아빠의 명령.


그토록 사랑하는 블래키를 지켜줄 수 없었던 스스로의 나약함이 얼마나 싫었을까. 어쩌면 자신이 사랑하는 모든 것을 지키기 위해선 스스로가 강해져야 함을 그때 느꼈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그토록 고집스러울 정도로 외골수처럼 지켜나갔던 건지도.


어쨌든, 그것은 엘리자베스의 잠재의식 속에 오랜 시간 머물러 있었고, 그녀는 그에 대한 치유가 필요했었다.

비록 나는 우리 딸들이 키운 토끼를 정육점으로 갖다 주라고 하진 않았지만, 혹시나 너무나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그 어떤 것을 아무렇지 않게 없애버리거나 빼앗아버린 적은 없는지. 고의적이진 않았으나 행여 나도 모르게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나 않았는지... 그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 내겐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와 마더 테레사


참으로 오랜만에 온 몸이 따뜻해지는 책을 읽었다. 삶과 죽음에 좀 더 여유로워지는 느낌. 파닥거리며 아등바등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 삶에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나는 정말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인지, 내 삶의 소중한 의미는 무엇인지. 나는 내가 지구라는 곳에 보내져해야 하는 수업을 진지하고 충실하게 임하고 있는지. 그래서 언젠가 졸업을 하고 내 몸을 벗어버릴 때가 되면 나도 그녀처럼 아름다운 나비가 되어 자유롭게 날아갈 수 있을 것인지, 나는 그 순간을 기쁘게 맞이 할 수 있을 것인지, 그 모든 질문은 내게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도저히 손에서 놓을 수 없었던 책. 그래서 빨리 리뷰를 써서 그 느낌을 그대로 옮겨놓고 싶었지만 타이밍을 놓치고는 이렇게 기억 한가닥 부여잡고 느낌을 끄집어내고 있다. 이 아름다운 책을 읽고 리뷰를 쓰는 동안 내가 느꼈던 안타까움이었다.


마더 테레사 다음으로 내가 가장 존경하는 그녀. 너무나 아름다운 그녀. 그녀의 장례식에 함께하며 나비를 날리는 류시화가 떠올랐다. 그는 보았겠지. 엘리자베스가 얼마나 행복해하며 환한 미소 속에 나비 되어 은하수로 춤추러 갔는지를....



2012. 12.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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