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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젤라권 Feb 11. 2023

우리는 지금 여기에 있다

Wolfgang Hoffmann

올드타운의 홀리루드궁Palace of Holyroodhouse에서 에든버러성Edinburgh Castle까지 이어지는 로얄마일Royal Mile에는 중세시대 분위기의 펍들이 즐비하다. 

수백 년의 긴 세월이 만들어 낸 초콜릿처럼 부드러운 돌바닥은 가로등 불빛을 반사하며 옐로우 사파이어처럼 빛나고, 귀에 익은 팝송부터 울림이 깊은 샹송, 그리움인지 슬픔인지 외로움인지 모를 오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아이리쉬 음악과 이국적인 비트의 퍼커션, 그리고 스코틀랜드 백파이프 연주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오버랩되어 알 수 없는 심장박동을 만들어 낸다. 이로 인해 예측할 수 없는 감정의 롤러코스터는 에든버러를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도시’로 만든다.


1999년, 나의 첫 축제는 최단기간 동안 ‘처음’이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사용하게 만드는 기록을 남겼다. 

축제는 기존 공연장을 포함해 어셈블리룸즈(의회회관), 발모럴호텔, BBC 스튜디오, 카페, 펍 등 120여 개의 공간이 공연장으로 변신하는 마법을 선보였다. 각각의 공연장에는 씨어터, 피지컬 씨어터, 아트서커스, 월드뮤직, 스탠드업 코미디, 각종 마술과 가족극까지 다양한 장르의 공연이 7~10작품씩 포진되어 한 달간 1,200여 개의 작품이 상연되고 있었다. 


일상의 공간을 채우는 이국적인 공연의 홍수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런던의 웨스트 앤드와 뉴욕의 브로드웨이에서 유명하다는 뮤지컬을 관람했을 때 받았던 벅찬 감동보다 족히 수십 배는 강한 기쁨과 놀라움과 행복과 경이로움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매일 저녁 7시와 9시 반, 밀리터리 타투Millitary Tatoo가 끝나며 쏘아 올리는 불꽃이 에든버러성과 어우러져 마치 동화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을 느끼게 할 때쯤, 그날의 공연을 마친 아티스트들이 하나둘씩 ‘레인바Rain Bar’로 모여든다. 


죠지 스트리트 George St.와 로즈 스트리트Rose St. 사이, 어셈블리룸즈Assembly Rooms의 건물 옆 공간에 축제기간에만 오픈하는 이 팝업 바 Pop-up Bar는 1999년 축제의 시그니처 칵테일로 프로즌 마가리타 Frozen Margarita를 선보였다. 테킬라 tequila에 라임주스와 레몬주스를 더하고 넓은 샴페인잔 테두리에 소금을 묻히는 것이 일반적인 마가리타라면, 레인바의 시그니처는 소금대신 달콤한 설탕을 듬뿍 묻힌 샴페인잔에 슬러쉬처럼 부드럽게 얼린 마가리타를 담아 축제의 달콤함을 더했다.


마가리타의 탄생과 관련해서는 금주령이 있던 시절에 만들어졌다거나 아카풀코의 어느 파티에서 처음 선보였다거나 등의 확인되지 않은 많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중, 1949년 로스앤젤레스의 테일 오더 콕Tail O’the Cock에 근무하던 바텐더가 유탄에 맞아 숨진 멕시코 애인을 생각하며 멕시코의 스피릿인 테킬라를 베이스로 이 칵테일을 처음 만들었다는 애절한 사랑이야기가 달콤 쌉싸름한 마카리타와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레인바에서, 아니 축제에서 대화의 시작은 단연코 모두의 공통 주제인 공연이다. ‘무슨 공연을 하는지’, ‘무슨 공연을 봤는지’, ‘지금까지 어떤 공연이 제일 좋았는지’, ‘추천할 공연이 있는지’로 시작되는 대화는 공연에 대한 세세한 설명과 함께 몇 잔의 칵테일을 쉽게 비워낸다.


적당히 오른 술기운과 함께 이야기의 방향은 의식의 흐름대로 흘러가고, 그렇게 의도하지 않은 대화들은 첫인상의 선입견과 편견을 걷어내며 예측하지 못한 관계를 만들어간다. 누군가와는 그렇게 하룻밤 즐거운 대화상대로 머무를 수도 있고, 누군가와는 내일의 만남을 약속하는 인연으로 발전하며, 누군가와는 일을 함께 하는 사이로, 또 누군가와는 수십 년 일 없이도 만나는 가족 같은 사이로 발전한다. 20년의 시간이 지나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났는지 정확한 기억이 없는 사이라도 우리는 부러 기억을 찾아 헤매지 않는다. 어느 날 공연을 마치고 일상처럼 찾은 아티스트 클럽에서 우리는 우연히 마주쳤을 테고, 또 다른 우연 혹은 운명이 두 번, 세 번의 만남을 이어가게 했을 테니…, 그렇게 오늘의 우리가 되었을 것이다. 


문화가 섞이고 사람이 섞이고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우리는 서로의 세계를 넓혀가고 있었다. 따뜻한 앰버빛으로 빛나는 중세도시에서 느끼는 신선한 자극과 감성적인 풍요에 벅차하며 축제의 하루가 저물어갔다. 




에든버러에서 사랑은 사람에게 국한되지 않는다. 

1999년 나의 첫사랑은 ‘어나니머스 소사이어티Anonymouse Society’였다. 

‘익명의 사회’라는 제목의 이 공연은 어쩌면 아날로그 감성이 가득했던 세기말보다 지금 우리 사회에 더 잘 어울린다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80년대와 90년대를 지나 밀레니엄을 앞두고 있던 당시에도 우리는 하나같이 입을 모아 ‘예전보다 개인주의가 더 팽배해진 것 같다’, ‘인간관계가 삭막하다’는 걱정을 늘어놓았다.


공연은 샹송 하면 엄마가 가끔 흥얼거리던 ‘에디뜨 삐야쁘Edith Piaf’의 ‘사랑의 찬가’ 정도만 알고 있던 당시의 나에게 벨기에 출신의 국민가수 쟈크 브렐Jacques Brel과 그의 음악을 소개해 주었다. 축제에 대한 켜켜이 쌓인 기억 중에서도 가히 Top 5 안에 등극할 만한 이 선물 같은 공연은 그 해 영국의 유력일간지 더 가디언 The Guardian의 리뷰처럼 "총알처럼 가슴에 와서 박히는 한곡 한곡의 노래들... delivers each song like a gunshot to the heart"로 사진을 찍어놓은 듯 선명하게 기억된다.


매일 밤, 나는 레인바에서 친구들과 그날의 밀린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11시 45분이면 어김없이 볼룸으로 발길을 옮겼다. 공연장 맨 뒷좌석에 몸을 깊숙이 기대고 앉은 채로 그렇게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온전히 공연에, 음악에 몰두했다. 


태어나 처음 본 벨기에 공연에서 귀에 익은 음악이 들려왔다. ‘Ne Me Quitte Pas’. 부드러우면서도 묵직한 음색으로 시적인 가사를 덤덤하게 노래하던 프랭크 시나트라의 ‘If you go away’가 오버랩되어 들렸다. 공연에서는 ‘If you go away(당신이 떠난다면)’가 아닌 ‘You can’t leave me now(당신은 이제 날 떠날 수 없어요)’로 개사되어 불리었고, 가사의 영향인지 배우들의 표정과 움직임은 더욱 애절하게 느껴졌다. 


브렐의 넘버 중 공연에 사용된 19곡은 작품에 따른 새로운 해석으로 6명의 싱어이자 배우, 1명의 무용수, 2명의 뮤지션에 의해 시적인 언어로 불려졌다. 배우들은 상실과 죽음에 대해 마치 얼음장 같은 손으로 심장을 움켜쥐듯 강렬하게, 때로는 슬픔의 깊이를 감히 헤아릴 수조차 없을 만큼 모든 것을 초월한 표정으로 담담하게 노래한다. 그리하여 슬픔은 배가 된다. '마조히즘적인 즐거움을 안겨다 준다'는 리뷰에 묵묵히 수긍하며, 슬프도록 완벽한 공연에 압도당한다. 


축제 2주 차를 지나며 공연은 입소문을 타고 빠르게 객석을 채워갔다. 어셈블리 스텝들의 배려로 나는 축제 기간 내내 보고 또 봐도 또 보고 싶은 공연을 나의 지정석(?)에서 매일 볼 수 있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아까운 축제의 시간이 흘러갔다. 


[TMI] 

어나니머스 소사이어티는 그 해 축제 어워즈 중 가장 명망 있는 ‘프린지 퍼스트Fringe Fiirst’와 ‘토탈 씨어터 어워즈Total Theatre Award’에 베스트 공연으로 선정되었다. 이듬해인 2000년에는 런던에서 베스트 뮤지컬상을 수상하였다. 

시나트라가 불러 더 유명세를 탄 ‘If you go away’의 원곡이 브렐의 ‘Ne Me Quitte Pas’라는 사실과 이 공연이 로렌스 올리비에 어워즈를 2번이나 수상한 벨기에-모로코 댄서이자 안무가인 시디 라비 체카오우이 Sidi Larbi Cherkaoui의 20대 초반 작품이었다는 사실은 수년이 지난 후에 알게 되었다.




2022년 7월.

독일친구 울프강으로부터 축제에 참가한다는 반가운 이메일이 도착했다.

국가마다 코로나 상황이 다르고 정부 규제 또한 불확실성의 연속인지라 축제는 3월이 되어서야 이번 여름에는 풀 페스티벌을 진행하겠다는 공식 발표를 내놓았다. 3년 만에 개최되는 축제다운 축제는 어느새 75주년을 맞이하고 있었다.


2015년부터 코리안 시즌의 루틴은 매년 같았다. 11월 선정공고를 내고 12월과 1월에 장르별 우수작품을 선정하고, 인터뷰를 거쳐 최종 참가작을 정한다. 3월의 축제 공식 발표는 엔데믹을 알리는 신호 같아 반가우면서도, 평소보다 현저히 짧은 준비기간에 대한 우려와 걱정으로 참가에 대한 고민을 안겨주었다. 코리안 시즌은 2023년을 기약하며 조금 더 긴 준비기간을 갖자는 내용으로 파트너인 어셈블리와 협의를 마쳤다. 


영국이나 유럽의 국가들처럼 우리보다 축제 참가가 용이한 프로덕션들조차 긴 고민에 빠졌다. 인플레이션과 경기침체 기사가 하루가 멀다 하고 흘러나오고, 러우 전쟁으로 시작된 유가의 상승과 항공료 상승에 더해, 호텔과 에어비앤비 모두 축제 기간의 숙박비를 올렸다. 그에 비해 축제의 티켓 가격은 여전히 예년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 3년의 공백은 관객을 예측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축제의 시스템도, 현지의 상황도 변화가 있었다. 각각의 속사정에 더해 산재한 불확실성이 겹치며 축제 참가는 그 어느 때보다 어려운 선택이 되어 있었다.


축제에 참가하고 싶은 각기 다른 수많은 이유들은 경제적인 문제에 봉착하면 쉽게도 좌절된다. 공연 참가를 알리는 프로덕션의 이메일은 그 수가 현저히 줄었고, 긴 고민을 반영하듯 축제를 임박하여 도착했다.


7월 14일. 축제를 보름 남기고 날아온 울프강의 이메일에는 4개의 작품 소개가 담겨 있었다. 매년 8~13개 작품을 선보이던 그의 긴 이메일이 꽤나 단출해졌다는 생각에 아쉬운 마음도 잠시, 반가운 프로덕션 이름을 발견하고 영상 링크를 클릭했다.



울프강은 2012년부터 ‘오로라 노바Aurora Nova’라는 브랜드로 유럽의 우수한 피지컬씨어터와 아트서커스를 선별하여 에든버러에 선보이고 있다. 코리안 시즌이 연극, 신체극, 음악, 무용, 가족극, 전통 등 한국의 우수한 공연을 장르별로 선정하여 선보인다면, 오로라 노바는 국가를 한정하지 않고 독일, 영국, 스웨덴, 스위스, 미국, 아르헨티나, 팔레스타인, 이란, 뉴질랜드 등지의 ‘피지컬과 비주얼 공연 Celebration of international physical and visual theatre’을 엄선하여 선보이는 콘셉트이다.


오로라 노바의 시작은 200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축제기간 1,300여 개의 공연이 상연되던 2000년대 초, 울프강은 1828년 윌리엄 플레이페어William Playfair에 의해 디자인된 세이트 스테판 교회 St. Stephen’s Church를 8월 한 달간 공연장으로 탈바꿈시켰다. 무용과 신체극에 집중하는 그의 프로그램과 공연장으로 변신한 교회는 완벽한 하모니를 이루었다. 

세인트 스테판 교회는 높은 층고와 무대 중앙을 빙 둘러 객석을 배치할 수 있는 다이아몬드 형태의 공간을 제공하며 무용 공연을 위해 일부러 계획하고 지은 공연장 같았다. 중앙 벽면에 위치한 파이프 오르간마저 절묘하게 어우러져 신체로 표현하는 예술에 신성한 아우라를 부여하며 공연을 위한 완벽한 세트가 되어 주었다. 탁월한 선택이었다.


장르를 특정하고 작품성이 우수한 소수의 공연을 프로그래밍하는 그의 전략은 축제에서 확실히 눈에 띄었다. 해를 거듭할수록 언론과 관객은 그의 프로그램에 주목했고, ‘오로라 노바에 가라. 공연을 봐라. 만족할 것이다.’라는 공연장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라 얻어냈다. 어떤 공연을 하는지 알아볼 필요도 없이, 그냥 그 극장에 가서 무슨 공연이 상연되든 보라고 하는, 오로라 노바가 프로그래밍한 공연이라면 분명히 만족스러운 관람이 될 것이라는 자신감 넘치는 리뷰에 전율을 느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축제의 메인 거리를 벗어나 30분은 족히 걸어야 하는 조금 동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 공연장을 나는 매년 기꺼이 방문했다. 2004년에는 데레보의 신작 ‘Reflection’을 관람하기 위해, 2005년에는 프린지 퍼스트, 토탈씨어터 어워즈, 해럴드 엔젤 등 최고의 어워즈를 석권한 ‘판도라88’을 관람하기 위해 발길을 옮겼다. 


2006년, 애정하는 오로라 노바에서 에든버러의 역사에 기록된 이태리 공연 ‘카타클로’를 상연하게 되면서 울프강과 나의 조금 특별한 인연이 시작되었다. 유료 객석 점유율 98%를 기록한 '카타클로'는 울프강과 나에게 함께 만들어 성공의 추억을 각인시켰다. 수개월의 노력과 수많은 선택이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성취는 놀랍도록 달콤하다. 하지만 모두가 아는 아픈 진실은 공연도 공연장도 그 과정의 노력과 결과가 결코 비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공연장을 운영한다는 건 불확실성의 연속이다. 

공연장 운영으로 수익모델을 만들기란 어렵다. 최소한의 인원을 상주시키고 대관을 주 업으로 하는 공연장도 운영이 쉽지 않지만, 직접 공연을 기획/제작하는 공연장의 경우 작품의 성패에 공연장의 명운이 걸리기도 한다. 흥행몰이를 한다고 해도 기획/제작비가 높다면 손실이 발생할 수 있다. 인건비, 운영비 등 각종 비용의 상승과 스폰서의 부재, 축제의 메인 공연장들이 올드타운으로 거점을 옮기는 등의 이슈가 겹치며, 2008년 오로라 노바는 문을 닫았다.

 

2013년. 나는 신문에서 우연히 '프린지 공연장 세인트 스테판 매매/Fringe venue St. Stephen's for sale'라는 기사를 발견했다. 나름 문화적 충격이었다. 

부동산에 문외한이라서 나만 모르는 건가? 원래 지구의 모든 부동산은 (그게 유서 깊은 교회이건 성당이건 상관없이) 일정 금액을 지불하면 구매가 가능한 건가?

1828년 건립 당시 스코틀랜드 교회의 소유로 운영되었던 세인트 스테판 교회는 언제 민간의 소유로 넘겨진 걸까? 어떤 이유로? 이 아름다운 교회는 어찌 이리 기구한 운명을 타고났을까… 

신문 한 귀퉁이에 실려 있는 ‘200년 역사를 품은 교회를 £500,000에 판매한다’는 기사는 꽤나 쓸쓸해 보였다. 세인트 스테판 교회는 자주 매물로 나왔고 주인이 수차례 바뀌었다. 주인이 바뀌지 않는 동안에도 2010년은 트라버스 씨어터로 이름이 바뀌었고, 2012년에는 노던 스테이지로 또다시 이름을 바꿔야 했다. 2014년 한 기업에 팔렸던 교회는 다시 2017년 잉글리시 국립 발레 학교의 설립자인 피터 슈퍼스Peter  Schaufuss에게 팔렸다. 

 



4년의 공백 이후, 울프강은 공연장 오로라 노바가 아닌 피지컬 씨어터에 특화된 오로라 노바 프로그램으로 다시 프린지를 찾았다. 


코리안 시즌이 22개 공연장을 운영하는 어셈블리 페스티벌이라는 하나의 파트너 극장과 우정과 신뢰를 기반으로 운영된다면, 오로라 노바는 피지컬 씨어터, 비주얼 씨어터, 아트 서커스 등 각각의 작품에 어울리는 여러 개의 공연장으로 매년 분산된다.

 

2015년 첫해를 맞은 코리안 시즌은 한국무용과 타악이 접목되어 한바탕 멋진 판을 벌이는 전통공연과, 댄싱9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안무가의 현대무용, 연금술사의 세계관을 모티브로 마술과 코미디를 접목한 퍼포먼스, 아시안 아츠 어워즈의 베스트 공연으로 선정된 가족극, 한국적 샤머니즘의 진수를 보여 준 제주 굿 등 장르가 다른 우수한 한국문화를 선보였다. 

같은 해 오로라 노바는 가면극으로 유명한 독일 파밀리에 플롯즈 famillie Floz의 ‘호텔 파라디소Hotel Paradiso’와 제2의 짐 캐리라 불리는 뉴질랜드 배우 트리비 워켄쇼Trygve Wakenshaw의 ‘크라켄Kraken’, 그리고 조지 해리엇 스쿨을 배경으로 라이브 드로잉 프로젝션과 퍼커셔니스트의 연주가 싱크를 맞춘 ‘애니모션 쇼 The Animotion show’를 포함해 9개의 작품을 선보였다. 


나는 오로라 노바 팬이다. 

오로라 노바가 공연장으로 운영되었을 때도, 지금의 플랫폼으로 운영될 때도, 울프강이 선택한 작품들이 좋다. 각각의 공연을 선택한 이유가 꽤나 납득이 가고, 설득력이 있고, 그렇게 그를 조금씩 더 이해할 수 있어 좋다. 


울프강과는 십 년의 나이 차이가 있기에 각각의 연도는 다르지만, 20대의 우리는 배우이자 무용수로 무대 위에 있었다. 30대의 우리는 에든버러와 서울이라는 전혀 다른 도시에서 공연장을 운영했으며, 아픈 추억과 함께 문을 닫은 전력이 같다. 우리에겐 한때 축제를 운영했거나, 운영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독일인 울프강과 한국인 나의 30년 인생의 경로가 시차를 두고 비슷하게 연결된다. 신기하다. 


다른 점을 찾자면, 나의 시작은 퍼포먼스, 뮤지컬, 음악극 등의 연출과 기획, 제작에 무게가 실리는 한편, 울프강의 시작은 무용과 피지컬 씨어터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으나 제작을 하지 않는다는 점 정도다. 

우리는 서로가 기억하는 과거의 시간에 머물러 있지 않고 경험과 함께 조금씩 성장해 왔다. 지금의 그는 나의 기억 속 어느 시간 속의 그가 아니며, 나 또한 그렇다. 

시간을 거치며, 우리가 보고 듣고 경험하고 느낀 셀 수 없는 인생의 사건과 그 순간에 마주한 사람들을 지나 우리는 변화한 서로를 마주 본다. 완성형이 아님을 알기에 기대에 찬 눈으로 서로의 다음을 응원한다. 


모든 선택에는 장점과 단점이 존재한다. 모든 일에는 기쁨과 슬픔의 감정이 묻는다. 기쁜 일에도 아쉬움의 순간이 있고, 슬픈 일에도 배움이 있다. 그리고 결국 모든 선택에는 후회가 남는다. 1% 덜 후회할 방향으로 선택할 수만 있어도 다행이라 생각한다. 51:49 혹은 34:33:33 혹은 26:25:25:24... 


나의 상상은 가끔씩 어떤 선택의 순간들로 돌아간다. 

영화배급사에서 스카우트 제안을 받았을 때 그 길을 선택했다면 어땠을까. 그 선택으로 이어진 20년 후의 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쓸데없는 단순 비교로 후회를 만든다. 제작을 마친 영화의 배급을 협의하기 위한 해외 출장은 개인 짐만 고민하면 되는 단출함일 것 같다. 지금처럼 세트와 소품, 의상들의 운송과 공연장 기술 관련 협의로 머리를 쥐어뜯는 상황은 없었을 것이다. 제작을 마쳤으나 국가마다 도시마다 공연장마다 고려하고 협의해야 할 사항들이 수십 수백 인 해외 공연과 군더더기가 떠오르지 않는 영화배급을 비교하면 할수록, 당시 나의 선택이 1% 덜 후회하는 방향이었는지 선뜻 답을 내릴 수 없다. 의미없는 비교로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한다. 


그럼에도, 종국의 나의 생각은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로 향한다. 그리곤 과거의 나의 선택을 지지한다. 타임슬립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이야기. 이런저런 시도 끝에 결말에는 모든 것을 원상태로 되돌리려 노력하는 주인공의 선택. 그 이유는 언제나 사람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내가 존경하는 사람은, 내가 아끼는 사람은, 당시의 그 선택이 아니었다면 만나지 못할 인연이었을 테니 말이다. 나는 과거의 어떤 순간으로 돌아가도 반드시 같은 선택을 반복해야만 한다. 우연을 가장한 운명 같은 선택들 덕분에 우리는 지금의 모습으로 여기에 있다. 




2022년 8월의 축제는 지나치게 감동적이었다. 

아무리 친해도 속으로 철저히 계산하며 내가 한번 사면 너도 한번 사고를 시전 하던 친구들도, 그런 셈법이 싫다고 얘기하며 매번 정확히 반을 나눠서 계산하던 친구들도 앞 다투어 단말기에 카드를 들이밀었다. 유럽의 친구들에게서 지나치게 익숙한 한국의 정이 느껴졌다. 친구들의 포옹과 마주한 눈에 나는 자주 뭉클했다.


오전 10시. 축제의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에 울프강과 나는 텅 빈 클럽바에서 모닝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윌리엄의 말처럼 축제기간 동안 하루를 일주일처럼 사는 우리는 체력적 한계를 느끼며 누적된 피로를 감출 수 없었지만 페스티벌 피플의 바쁜 일상에 복귀한 행복을 만끽하고 있었다. 


좋은 공연이 더 넓은 무대로 나아갈 수 있기를, 더 많은 사람에게 보여질 수 있기를 바라며 지켜 온 그의 오로라 노바가, 나의 코리안 시즌이 이제는 부디 평안한 항해를 이어 갈 수 있기를 소망하며, 우리는 오랜 전쟁을 함께 해 온 전우처럼 말없이 서로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by 엔젤라 권


 P.S/ 2015년 울프강이 새해 인사로 올린 글이 좋아 소개한다.

3살배기 아들들에게 '해피 뉴 이어'를 가르쳤더니 year를 ears로 발음했다는 이야기. 

새해에는 새로운 귀를 갖자는 그의 제언. 가슴에서 우러나는 소리를 듣는 귀를, 다른 이의 말을 경청하는 귀를, 모두의 말을 호의를 가지고 공감하며 들을 수 있는 한해만큼 성숙한 '행복한 새로운 귀'를 갖는 한해가 되길 희망한다. 


"HAPPY NEW ...EARS!I tried to get my three year sons to say 'Happy New Year' yesterday. They looked at me in their amused and curious way and Theo replied confidently "Happy New Ears"

 Indeed! Here's to happy new ears for all of us in 2015: New improved ears that make us listen with our hearts, to both others and ourselves, in a more sympathetic 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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