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은 죽지 않는다, 다만 오마카세를 즐길 뿐.

by 리함

괴물은 죽지 않는다, 다만 오마카세를 즐길 뿐




- 비상계엄 1주년, 광화문 D타워의 유리벽 안과 밖


Date: 2025. 12. 10. (수) AM 01:15


Location: 서대문구 연희동 옥탑방. 낡은 창틀 사이로 황소바람이 들이친다.


Drink: 라프로익(Laphroaig) 10년. 소독약 냄새, 젖은 흙내음, 그리고 피트 향.


Music: Tom Waits - 'Tom Traubert's Blues'


Atmosphere: 방 안 가득 채운 담배 연기가 탁상조명 아래서 느리게 춤을 춘다.


타닥, 타닥.


기계식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새벽이다. 라프로익을 스트레이트 잔에 가득 따랐다. 코를 찌르는 강렬한 요오드 향. 사람들은 이걸 '병원 냄새'라고 싫어하지만, 나는 이 냄새가 좋다. 오늘처럼 썩어문드러진 위선들을 목격한 날에는, 위장까지 소독해 줄 것 같은 독주가 아니면 잠들 수 없으니까.


나는 오늘 낮, 대한민국이 자랑하는 '승리의 현장'에 있었고, 오늘 밤엔 그 승리를 비웃는 '지배자들의 식탁'에 앉아 있었다. 그 극단적인 온도 차가 지금 내 몸을 으슬으슬하게 만든다.


1. 오후 2시 40분, 광화문: 박제된 승리, 그리고 편집된 비명


"선배, 저기 좀 보세요. 드론 샷 앵글 딱 나오지 않아요?"


입사 3년 차, 내 부사수 윤서윤이 볼이 빨개진 채 소리쳤다. 그녀가 가리킨 곳은 세종대로 사거리. 1년 전 오늘, 계엄군의 탱크를 막아섰던 그 자리에 수만 명의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서 있었다. 거대한 촛불 파도타기가 시작되자, 광장은 마치 용암이 흐르는 것처럼 붉게 물들었다. 장관이었다.


하지만 14년 차 기자의 눈은 화려한 불빛보다 그 그림자에 먼저 가 닿는다.


나는 카메라 렌즈를 돌려 무대 가장 구석진 곳을 줌인(Zoom-in)했다. 그곳에는 축제에 초대받지 못한 손님들이 있었다.


'계엄 1년, 내 빚은 2억 늘었다. 자영업자 다 죽는다!' '전세 사기 특별법, 왜 1년째 계류 중인가!'


피켓을 든 50대 남성이 경찰 펜스에 매달려 절규하고 있었다. 1년 전, 그 역시 저 촛불의 일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그는 '축제 분위기를 해치는 불청객' 취급을 받으며 외곽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지잉- 지잉-.


주머니 속 휴대폰이 발작하듯 울렸다. <대한일보> 사회부장, 박 부장(불독)이었다.


"어, 도현아. 현장 분위기 어때? 야마(주제) 확실히 잡아라. 오늘은 딴소리 말고 '감동', '눈물', '성숙한 시민의식' 딱 이걸로만 가. 괜히 찬물 끼얹는 인터뷰 따지 말고. 알았어?"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그의 목소리는 뻔했다. 광고주들과 정부의 눈치를 보는 데스크의 본능.


"네, 알겠습니다. 그림 좋은 걸로 뽑겠습니다."


나는 전화를 끊고, 윤서윤이 취재해 온 수첩을 뺏어 들었다. 그녀의 수첩에는 아까 그 50대 남성의 인터뷰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사장님, 저 작년에 화염병 들었어요. 근데 지금은 빚 독촉장에 불 지르고 싶습니다...]


나는 빨간 펜을 꺼내 그 대목을 찍 그었다.


"서윤아, 이건 킬(Kill)이다." "네? 왜요? 이게 진짜 현장의 목소리잖아요!" "데스크가 싫어해. 오늘은 잔칫날이잖아. 상주 노릇 하지 말자."


서윤이가 경멸 어린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래, 나도 안다. 내가 쓰레기라는 거. 쪽팔림이 명치끝에 걸렸다. 나는 도망치듯 담배를 입에 물고 현장을 빠져나왔다.


2. 오후 7시 10분, D타워 5층 '스시 렌':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차가운 진눈깨비를 피해 내가 들어간 곳은 광화문 D타워였다. 엘리베이터가 5층에 멈추고, 육중한 나무 문이 열리자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바깥의 귀청 찢어질 듯한 함성은 완벽하게 차단되었고, 은은한 히노키(편백) 향과 재즈 피아노 선율만이 공기를 채우고 있었다.


예약된 룸의 미닫이문을 열자, 최 이사가 먼저 와 있었다.


전직 청와대 안보실 행정관. 1년 전, 계엄 포고령의 문구를 직접 다듬었던 엘리트. 윗선들이 줄줄이 구속될 때, 그는 기막힌 타이밍에 '내부 고발'을 거래 조건으로 내걸고 법망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지금은 대한민국 1위 로펌 '태평양'의 고문 명함을 달고 있다.


"어서 와, 이 기자. 밖이 많이 춥지? 여기 따뜻한 사케부터 한잔해."


그의 얼굴은 기름져 보였다. 1년 전, 청와대 벙커에서 핏발 선 눈으로 나에게 "기사 좀 막아달라"고 애원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이 기자, 여기 오도로(참치 대뱃살)가 오늘 아주 좋아. 셰프가 아침에 도쿄에서 공수해 온 거야."


그가 젓가락으로 집어 든 붉은 살점 위에는 금가루가 뿌려져 있었다. 한 점에 3만 원. 밖에서 떨고 있는 사람들이 먹는 컵라면 20개 값이다.


나는 그가 따라준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최 이사님, 솔직히 여쭤봅시다. 1년 전 오늘 밤, 죄책감 안 느끼십니까? 당신이 모시던 장관은 지금 구치소 독방에서 콩밥 드시는데, 여기서 오마카세가 넘어갑니까?"


내 도발적인 질문에도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피식 웃으며 입안의 스시를 우아하게 씹어 삼켰다.


"이 기자, 자네 14년 차 짬밥 먹고도 아직 그렇게 순진한가? 세상은 선과 악의 싸움이 아니야. '아마추어'와 '프로'의 싸움이지."


그는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창밖을 가리켰다. 통유리 너머로 촛불의 물결이 보였다.


"저 사람들? 위대하지. 혁명? 성공했어. 근데 그 혁명 이후의 '관리'는 누가 하는 줄 아나? 결국 우리야. 지금 야당 의원들이 국방 정책 만들 때 누구한테 전화하는 줄 알아? 나야. 군대 조직도 하나 제대로 모르는 그들이 우리 도움 없이 뭘 할 수 있을 것 같아?"


숨이 턱 막혔다. 그의 말이 틀리지 않아서 더 화가 났다. 시스템은 그대로다. 단지 운전석에 앉은 사람만 바뀌었을 뿐, 그 차를 굴리는 엔진과 부품들은 여전히 '그들'이다.


"이 기자, 자네 언제까지 밖에서 구경만 할 텐가?"


그가 품 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테이블 위로 밀었다. 거기엔 **'전략기획 본부장'**이라는 직함이 박혀 있었다.


"이번에 우리 로펌이 여의도 쪽에 '미디어 전략 센터'를 크게 만들어. 자네가 센터장을 맡아줘. 연봉? 물론 지금 받는 것의 3배는 기본이고, 법인카드 한도는 무제한이야."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돈으로 매수하시게요?"


"돈? 아니, '권력'을 주는 거야. 자네, 맨날 박 부장한테 기사 난도질당하는 거 지겹지 않아? 팩트니 진실이니 떠들어봤자, 데스크가 킬(Kill)하면 끝이잖아."


최 이사가 몸을 앞으로 숙이며 내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이리 와서 판을 직접 짜. 자네가 원하는 방향으로 여론을 만들고, 정치를 기획해 봐. 받아쓰는 기자(Reporter) 말고, 세상을 움직이는 설계자(Designer)가 되란 말이야. 그게 진짜 자네가 원하던 거 아닌가?"


순간, 손끝이 떨렸다. 내 아킬레스건이었다. '기레기' 소리를 들으며 무력감에 시달리던 나날들. 내가 쓴 기사가 세상을 1도 바꾸지 못한다는 패배감. 그는 정확히 내 가장 약한 욕망을 건드렸다. 펜을 쥔 자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유혹, '통제권'을 주겠다는 제안.


하지만 나는 명함 대신 담배갑을 집어 들었다.


"최 이사님. 제안은 솔깃하네요. 제가 원하던 게 맞습니다."


나는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근데, 저는 설계 도면 그리는 것보다, 흙탕물 튀기면서 뛰어다니는 게 더 적성에 맞아서요.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라이터를 켰다.


"개목걸이가 아무리 다이아몬드라도, 개는 개잖아요? 전 늑대로 살랍니다. 굶어 죽더라도."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뒤통수에 대고 최 이사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쯧쯧. 이도현, 넌 그래서 평생 삼류인 거야. 기회가 와도 줘먹지를 못하니."


3. 밤 11시, 귀갓길: 패배감이라는 이름의 무게


식당을 나와 다시 광장으로 돌아왔을 때, 행사는 끝나가고 있었다. 바닥에는 '민주주의 승리'라고 적힌 팸플릿들이 흙탕물에 젖어 짓밟히고 있었다. 환경미화원 아저씨가 묵묵히 그 '승리의 잔해'들을 빗자루로 쓸어 담고 있었다.


나는 짓밟힌 팸플릿 하나를 주워 주머니에 넣었다. 축축하고 차가웠다.


오늘 우리는 이긴 걸까, 진 걸까. 광장의 촛불은 꺼졌고, D타워의 불빛은 여전히 화려하다. 괴물은 죽지 않았다. 더 세련된 수트를 입고, 더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시스템 속으로 스며들었다.


택시를 잡으려다 포기하고, 만원 버스에 몸을 실었다. 차창에 비친 내 얼굴이 유난히 건조해 보였다. 최 이사의 말이 환청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넌 평생 삼류인 거야.'


4. 다시 현재 (AM 01:15): 기록의 이유


Tom Waits의 노래가 절정으로 치닫는다. 걸걸한 목소리가 마치 내 속을 긁어내는 것 같다.


라프로익 병이 반이나 비었다. 취기가 오르지만 정신은 더 또렷해진다. 오늘 낮, 내가 쓴 <대한일보> 기사는 내일 아침 휴지조각이 될 것이다. 거기엔 진실이 없으니까.


하지만 지금 이 수첩에 적은 글은 남을 것이다. 내가 그 다이아몬드 개목걸이를 거절했다는 사실. 그 알량한 자존심 하나가 오늘 밤 나를 지탱한다.


담배 한 대를 다시 무는 순간, 서윤이에게 카톡이 왔다.


[선배, 아까 죄송했어요. 제가 너무 철없이 굴었죠? 선배가 킬 시킨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내일 해장국 쏠게요!]


피식, 웃음이 났다. 그래, 아직 이런 후배가 있는데. 세상이 완전히 망한 건 아니겠지.


나는 답장을 쓰려다 말고, 휴대폰을 덮었다. 대신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내일은 박 부장에게 깨지더라도, 서윤이가 가져온 50대 자영업자의 인터뷰를 기어이 지면 구석에라도 실어야겠다.


그게 이 지독한 무력감을 잊는 유일한 방법일 테니까.


마지막 잔을 비운다. 쓰다. 하지만 이게 진짜 사는 맛이다.


[오늘의 B-Side Track]



이슈: 비상계엄 1주년 범국민대회 & 권력층의 생존


팩트(Fact): 광장은 붐볐으나 경제는 차가웠고, 책임자 처벌은 미흡했다.


진실(Truth): 혁명은 '이벤트'로 소비되었고, 기득권 카르텔은 '시스템' 뒤에 숨어 건재했다.


기자 한마디: 승리에 취하지 마라. 진짜 싸움은 축제가 끝난 뒤, 쓰레기를 치우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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