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ngie 앤지 Jan 27. 2022

가두리 양식 인생


“수험생활을 버티는 특별한 비법이 있을까요?”


대학에 합격하고 모교를 찾아갔을 때의 일이다. ‘선배와의 대화’라는 프로그램에 ‘선배’로 섭외된 내게 어떤 후배가 질문을 했다. 음.. 나는 잠시 동안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대부분 스케줄러에 매일 공부할 범위를 계획해서 적어두잖아요. 저는 그걸 성공하면 펜으로 줄을 찌익 그어서 다 지웠어요. 진짜 별 거 아닌데, 매일매일 그걸 지우는 재미로 살았어요.”


지금 생각하면 고달픈 고3들에게 무슨 눈치 없는 소린가 싶지만, 내 대답은 놀랍게도 사실이었다. 열아홉 살의 나는 스케줄러에 모나미 라이브 컬러 펜으로 죽죽 줄을 그으면서 스트레스를 풀었다. 그 행위가 주는 의미는 크게 두 가지였다. 눈앞에 쌓인 숙제를 해치웠다는 쾌감, 그리고 스스로 계획한 일을 잘 해냈다는 대견함. 아, 물론 다시 저 상황으로 돌아간다면 저런 눈새 같은 대답은 안 할 거지만.



그렇게 나는 어릴 때부터 나만의 틀과 데드라인을 만드는 걸 좋아했다. 취미로 무언가를 배울 때도 언제까지 뭘 하겠다는 목표를 세웠고, 심지어는 덕질을 할 때도 웹진을 제작한다든지 오프라인 모임을 주도한다든지 자꾸 일을 만들어서 사서 고생을 했다. 그렇지만 가만히 흘러가는 일은 재미가 없었다. 계획을 짜고 몰입하지 않으면 뭘 해도 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작년에는 운동하는 습관을 기르기 위해서 일명 ‘운동 수갑’, 애플 워치를 샀다. 아침에 일어나면 목표를 알려주고 하루 종일 진척도를 중간중간 일깨워주며 링 세 개를 모두 안 채우면 나를 꾸짖는 디지털 수갑… 그래도 덕분에 매일 조금이라도 굼뜬 몸뚱이를 움직이게 되었다. 홈 트레이닝 앱도 오랫동안 정기 구독하고 있는데, 유튜브에서 어떤 운동을 골라야 할지 헤매는 나를 잘 챙겨줘서 좋다. 시간에 맞춰서 나를 재촉하는 것도 좋고. 게임처럼 주어지는 퀘스트를 깨고 나면 기분도 좋았다.


“너 압박감 중독이야.”


어느 날 친구가 그랬다. 사실 맞는 말이라 할 말은 없었다. 나는 말하자면 가두리 양식형 인간이었다. 나만의 틀을 만들고 그 안에서 목표치대로 나를 키워 나가는 과정을 사랑하는 인간.



하지만 나의 이 가두리 양식법이 먹히지 않는 게 있었다.



글쓰기. 이상하게 글쓰기는 내 마음대로 안 됐다. 늘 하던 대로 시간을 정해서 꾸준히 써보려고 했지만 일이 많아서, 피곤해서, 오늘은 영감이 안 떠올라서… 별 핑계를 다 대고 미적거리는 나였다. 소위 ‘삘(feel)’을 받는 날에는 우다다 써 내려갈 때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그 삘이 오는 텀이 점점 길어졌다. 처음 글쓰기를 시작했던 나름의 이유와 의의는 점점 흐려지고, 나는 답지 않게 자꾸 구멍 난 그물망의 미꾸라지처럼 굴었다.


작년에는 투고를 하겠다는 목표를 세웠지만 장렬히 실패했다. 쓰는 글의 주제도 명확했고 의지도 가득했었는데, 몇 달 동안 홀로 빈 종이와 까만 텍스트와 씨름하다 보니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갈피조차 잡히지 않았다. 글이라는 건 애플 워치처럼 진척률을 알려주지도 않았고 홈트 앱처럼 나를 재촉하지도 않았다.


채찍질이 모자란가 봐! 최후의 수단으로 나는 주변인들에게 샘플 원고를 보냈다. 혼자서 머리를 싸매는 것보다 뭐라도 피드백을 받으면 낫겠지 싶어서였다.


“실제로 나올 책이라고 생각하고 신랄하게 비판해줘!”


그리고 며칠 뒤, 지인들에게 받은 피드백에 내 글쓰기 멘탈은 와르르 무너져버렸다. 그동안 너무 속앓이를 했던 탓일까. 딱히 나쁜 말을 들은 것도 아닌데 그랬다. 나는 글을 왜 쓰지? 진짜 작가도 아니면서. 그렇게 몇 달을 아무것도 쓰지 않고 보냈다. 정말로, 손가락이 움직이질 않았다.



2022년, 새해를 맞이하면서 나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나를 가둘 수 있는 건강한 가두리를 찾아야겠다 싶었다. 꽤 오랜 시간 고민한 끝에, 지금 이곳에서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벌써 1월의 다섯 번째 글을 쓰고 있다.


함께 달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내 글을 읽어주고 기다려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 더 나아가 글을 쓰는 시간만을 기다리게 되는 것.



나는 그렇게 새로운 가두리에서 또 한 번 성취를 향해 헤엄치려 한다.


@angiethinks_​


-


가랑비클래스 라는 에세이 쓰기 클래스 멤버들과 함께 달리고 있어요. 글쓰기 진도가 잘 안나가시는 분, 같이 글쓸 사람들이 필요한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https://instagram.com/garangbiclass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