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우연히 인터넷에서 한 일본 아이돌 그룹의 뮤직 비디오를 보게 되었다. 사이버틱한 배경에 신선한 스타일링, 세련된 사운드에 낯선 언어로 노래를 하는 그들을 보고 나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이게 뭐지? 처음 느끼는 감상에 몇 번이나 영상을 돌려보던 나는 한참 동안 웹에서 그들을 검색했고, 그렇게 J-POP이라는 새로운 문화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때부터 무작정 일본어를 독학하기 시작했다. 가사를 이해하기 위해 단어를 외우고 그들이 예능 프로그램에서 하는 말을 알아듣기 위해 문장을 계속 받아 적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나서서 나머지 공부도 했다. 한 번도 실제로 본 적 없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은 누구보다 유능한 나의 일본어 선생님이었다. 그렇게 엉겁결에 시작한 일본어는 내가 구사할 수 있는 첫 제2외국어가 되었다. (자격증만 따고 다 까먹었다는 건 비밀이지만)
고등학교 때는 한국의 한 아이돌 그룹을 열렬히 좋아했다. 전교생이 내가 그 아이돌 팬인 걸 알 정도였다. 아빠는 이제 고등학생이 되었으니 학업에 집중해야 한다고 했지만 나는 또 다른 공부에 더 열을 올렸다. 그들을 응원하는 홈페이지를 만들기 위해 포토샵을 배우고 웹디자인과 HTML 프로그램까지 독파했다. 주경야독이 아니라 주독야덕 그 자체였다.
어느 날, 그들의 콘서트를 보기 위해 나는 엄마에게만 몰래 귀띔을 하고 공연장에 갔다. 아빠에게는 물론 비밀이었다. 하지만… 집에 돌아왔을 때 아빠는 이미 내가 콘서트를 다녀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지? 완전범죄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날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기사가 났다는 거다. <아이돌 그룹 A, 데뷔 이후 첫 단독 콘서트 개최>라고.
어쨌든 몹시 화가 난 아빠는 나에게 오늘 일에 대한 반성문을 쓰라고 했다. 딱히 잘못은 없는 것 같은데… 반항기 넘치던 나는 이렇게 한 자 한 자 반성문을 써내려 갔다.
저는 오늘 10시에 일어나 논술 과외를 갔다가 독서실에 갔습니다. 독서실에서 과외 숙제와 모의고사 오답 노트를 정리하고 집으로 잠깐 돌아왔다가, 5호선을 타고 올림픽공원역에 갔습니다. A의 첫 콘서트에 가기 위해서였습니다. … 중략. 콘서트에서 본 A는 너무 멋있었습니다.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고 무대에서 반짝반짝 빛났습니다. 저는 A를 보고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나와 같은 또래의 사람들이 꿈을 향해서 열심히 달려가는 모습은 참 멋지구나! 콘서트를 보고 나니 저도 학생의 본분인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으로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 공부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어쩌구…
지금 생각해보면 반성문을 빙자한 사춘기 소녀의 소심한 투쟁문이지만 내용만큼은 정말 진심이었다. 그들의 공연을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아드레날린이 솟고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다음 해, 다행히 나는 원하는 대학에 합격했다. 아빠는 반성문 덕분인 것 같다고 웃었지만 나는 아니라고, A의 콘서트 덕분이라고 대꾸했다.
그 이후로도 나는 다양한 모니터 속 사람들을 좋아해 왔다. 가수일 때도 있었고, 배우일 때도 있었으며, 심지어는 아나운서도 있었더랬다. 취업 준비를 할 때도 나의 이 ‘덕질’은 나를 살렸다. 합격과 불합격을 반복하며 자존감이 있는 대로 떨어져 있을 때, 유일하게 정신줄을 붙잡고 살게 해 준 존재가 그들이었다. 일종의 멘탈 코치라고 해야 할까? 내 존재도 모를 사람들한테 위로를 받는다는 게 웃기지만, 그래도 그때는 그런 것들이 있기에 하루하루를 버틸 수가 있었다. 무명에 가깝던 사람들이 무대를 잘해서 소문이 나고, 오랜 시간 뒤 어렵게 첫 지상파 1위를 하고 펑펑 우는 걸 보며 ‘나도 언젠가는 이 지옥을 벗어나겠지’ 생각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나도 곧 취업에 성공했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누군가를 좋아하며 새로운 걸 배우고 에너지를 얻는 습성은 변하지 않는다. 최근 팬이 된 사람은 메탈 밴드를 하는 클래식 전공의 음악감독인데, 그의 이력이 특이한 덕에 나의 음악 스펙트럼도 덩달아 넓어졌다. 관현악곡을 듣다가 저니(Journey) 같은 80년대의 팝 록을 듣기도 하고, 오케스트라와 피아노가 함께하는 심포닉 메탈을 듣기도 한다. 이 세상에 아직도 내가 모르는 세계가 많다는 게 그저 신기할 뿐이다. 지난 몇 달 간은 밴드 공연도 가고 크로스오버 공연을 보기도 했다. 무언가를 좋아할수록 인풋이 다채로워지기에 내 ‘작가’로서의 아웃풋도 그렇게 점점 더 맛깔스러워지는 듯하다.
삶이라는 긴 여정. 그 길을 바로 내 곁에서 가까이 걸어주는 사람도 있지만 내 인생의 또 다른 동행자들은 대부분 모니터 속에 있었다. 세상만사 관심이 많고 쉽게 사랑에 빠지는 타입인 나. 하지만 생각해보면 매 순간 그게 내 삶의 원동력이 되었다.
[제가 사랑한 아이돌(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저를 설명할 수 있겠더라고요.]
윤혜은 작가님의 <아무튼, 아이돌>이라는 책에서 읽었던 문장이다. 내 인생도 그랬다. 누군가를, 무언가를 좋아한 기억은 단순히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들 몰래 초대한 내 인생의 동행자인 그들은 늘 나의 세계를 확장해주었고 나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주었다.
오늘도 그렇게 나의 몰래한 동행은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