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내가 좋아하던 야구 구단의 선착순 팬사인회가 있어서
새벽부터 일어나 몇 시간 동안 줄을 서 있어야 할 일이 있었다.
'읽어야지' 하고 사두고는 읽지 못했던 에세이 한 권을 들고 가서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읽어 내려갔다.
이 책은 읽고 싶어서 산 책이라기보다는
요즘 사람들은 어떤 책을 읽고,
어떤 이야기에 공감하고,
어떤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지 알고 싶어 조사(?)의 일환으로 산 책이었다.
책을 살 때 작가가 누구인지,
뭐 하는 사람이 쓴 책인지는 보지도 않았고
심지어는 어떤 내용의 책인지조차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베스트셀러라고 소개된 책 중에 몇 권을 집어 들었는데 이 책도 그중 한 권이었다.
책의 내용은 나의 정서와 아주 잘 맞았고 글도 내가 좋아하는 결이어서 좋았다.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내가 쓴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평소 나의 생각과 비슷한 글들도 많아서
결과적으로 요 근래 읽었던 몇 권의 책 중에 가장 좋은 책이었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문체와 좋은 내용의 책이었음에도 그 책에서 감동은 느끼지 못했다.
'아! 그래! 나도 이렇게 해야지' 하는 다짐과 공감도 없었다.
그냥 내겐 좋은 내용의 좋은 책이었다.
'왜 그럴까'에 대해 생각해 봤고
평범하지 않은 사람이 쓴 평범한 척하는 삶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라고 나는 결론 내렸다.
글 속의 방황하고 고민하던 작가의 그 시작의 모습조차 평범한 사람의 기준에서는 와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이런 학생 시절을 보냈고, 이런 사람들은 이런 취준기를 보냈고
이런 사람들은 이런 고민을 하면서 사는구나.
이런 사람들은 이런 걸로 힘들어하고, 이런 사람들은 이런 걸로 고민하고
이런 사람들은 이런 걸로 방황하는구나.
고민의 시작점도, 고민의 방향도 평범한 나와는 너무 다른 것이라
그 책을 추천한다며 달려있던 여러 유명인들의 코멘트들처럼의 감동도 공감도 나는 느낄 수가 없었다.
'개천에서 용 난다'라는 속담이 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힘들게 자랐지만 피나는 노력을 거듭하여 사법고시에 당당하게
합격하여 판검사가 되는 사람.
술주정뱅이 아버지 밑에서 매일 욕을 듣고 매질을 당하며 살았지만
자신의 부모와 환경을 원망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여 유명 정치인이 되거나
아주 성공한 경제인이 되는 사람.
그러나 이제 우리나라 속담 집에서
'개천에서 용 난다'라는 속담은 지워질 때인 거 같다.
더 이상은 개천에서 용이 나지 못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집안, 어려운 환경 속에서 나 하나만이
노력한다고 해서 신분 상승이 될 수 있는 사회가 더 이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저 속담은 차라리 '고기도 먹어 본 놈이 먹는다'로 대체되어도 될 만큼
돈이 있어야 돈을 벌고 집안이 잘 살아야 공부도 더 잘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새어머니와 이복 언니들에게 구박받지만 착하게 살던 예쁜 신데렐라가
백마 탄 왕자님을 만나 신분 상승을 이뤄내고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 같은 건
이제 동화에서나 나올법한 얘기이고 지금보다 조금 더 지난 세대에서
신데렐라 같은 동화를 읽는다면 '아니? 이게 말이 돼?'라며 어이없어할는지도 모를 일이다.
갑자기 속담과 동화 이야기를 하는 게 뜬금없다 생각되겠지만
글을 쓰는 작가라는 것 역시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어 꺼낸 이야기들이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작가가 되고 자신이 상상하고 있는 머릿속 이야기들을
글로 잘 써내는 사람들이 작가가 되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글을 못써도 유명 유튜브가 되면 작가가 된다.
글을 못써도 인플루언서가 되면 작가가 된다.
글을 못써도 유명 연예인, 정치인 같은 셀럽이 되면 작가가 된다.
작가를 꿈꾸는 거의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쓰고 또 쓰고, 고치고 또 고치고,
수십수백 번을 읽고 또 다듬고를 반복하여 철저하게 을의 입장에서 출판사들의 문을 두드려
겨우 책을 내기도 버거운 현실이지만 저들의 경우는 다르다.
출판사들이 책을 내자고 서로 경쟁하고 책은 냈다 하면 베스트셀러다.
글을 잘 쓰지 못해도 대필 작가를 하겠다는 사람들은 넘쳐난다.
유명한 사람들이라 '저 이번에 책 나왔어요' 하고 영상 하나, 글 한 줄 남기면
예약 구매의 댓글들이 넘쳐나니 나오는 순간 베스트셀러다.
사람만이 태어나면서부터 금수저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책들도 만들어지면서부터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이다.
책을 팔아야 수익이 되는 출판사들의 입장에서는 만들어서 팔릴지 안 팔릴지 모르는 책을 만드는 것보다는
수만, 수십, 수백만 팔로워가 있는 어느 정도 수요가 보장된 저들의 책을 만드는 게 부담도 없고
수익도 보장된 장사가 될 테니 당연한 선택이다.
어느 출판사 에디터의 유튜브 영상에서 이런 내용을 본 적이 있다.
출간 예정이라며 손봐야 할 원고가 들어왔는데 너무나 형편이 없어서
'이런 걸 쓰고는 책을 낸다고?'라는 생각을 했고
처음 받은 원고를 거의 다시 쓰다시피 한 수준으로 수정해서 출간된 그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고
그 책을 쓴 작가는 돈을 벌고 더 유명해지고 그 유명세로 또 책을 출간하고 하더라는.
물론 모든 유명 유튜버나 인플루언서나 연예인이 그렇다는 건 아니다.
그들 중에도 아마 엄청난 필력의 소유자도 있을 것이고 어릴 적부터 작가를 꿈꾸며
꼭 한 번은 책을 써보겠다고 생각했던 사람도 있을 것이고
진정성 넘치는 마음을 담아 글을 쓰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다만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의 이 사회는 불공평하고 불공정한 것들이 너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출발선부터가 다른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이겨내고 살아남는 것은 여간해선 쉬운 일이 아니다.
노력이나 최선이라는 낭만적인 수단들로는 어쩌면 평생 이뤄지지 않을지도 모르는 꿈들이 세상엔 너무 많다.
물론 출발선이 달라도 당당하게 이겨내 기어이 꿈을 이루고야 마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결코 쉽지 않은 도전이며 험난한 노력의 연속이란 것 또한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평범하다 못해 평범에서조차 몇 % 부족한 나에게는 이제 두 가지의 선택지가 있다.
애초부터 불가능한 싸움 따위를 택하지 않는 현실적인 현명한 사람이 되는 것과
아주 오랫동안 품어온 꿈이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열심히 하다 보면 '꿈은 이루어진다'라고
믿는 낙천적인 낭만주의자가 되는 것 중에서의 선택이다.
글을 제대로 배워본 적도 없고 흔한 작가 수업이나 글쓰기 강좌 따위도 들어본 적이 없다.
감정을 드러내기보다는 속으로 구겨 넣는데 익숙한 삶을 살며
이대로 집어넣기만 하다가는 언제 터져버릴지 모르는 나의 감정들을 분출하는데
글 쓰는 것만큼 좋은 수단이 없었고 그래서 글을 썼다.
글 속의 나는 어떤 말이든 할 수 있었고 글 속의 나는 감정적으로도 너무나 자유로웠기에
나는 그저 좋아서 글을 썼다.
어쩌면 그렇기에 나는 더 이상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 그 불공정한 시작점에서도
좌절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불공평한 이 시작점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버리고 갖지 않으면 된다.
욕심을 버리고 욕심을 갖지 않고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쓰면 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글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한 글이 아닌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쓰면 되는 것이다.
애초에 작가라는 꿈을 가진 것이 유명해지기 위함이었나?
아니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어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였나?
그것도 아니면 '난 이렇게 책도 쓰는 사람이야'라며 폼 재기 위함이었나?
생각해 보면 답과 길은 명백하게 정해진다.
혼자 보는 일기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읽히는 글을 쓰고 싶다는 꿈을 가진 이상
내 글을 읽어주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더 많아지는 건 좋은 것이고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쓰며 돈도 벌고 유명해지기까지 한다면 이 또한 금상첨화겠지만
적어도 내가 살아본 세상에서 그런 일은
'당신도 할 수 있다', '성공하기 위해 당신이 해야 할 5가지', '누구나 따라 하면 다 된다' 같은
유튜브 영상이나 책 제목처럼 그리 흔한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쓰는 것이 좋아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써볼 생각이다.
개천에서 더 이상 용은 나지 않는 시대지만 적어도 아직은 진심이 통하는 시대라 믿고 있다.
남들보다 특출 나게 글을 잘 쓰지도 못하고 특출 난 배경을 가진 것도 아니고 특출 나게 잘난 사람도 아니지만 아직 그런 사람들이 대부분인 세상에서 그런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하며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그런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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