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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그래 Nov 26. 2024

내가 좋아하는 것 100가지 써보기


얼마 전 작은 소품들을 파는 곳에 갔다가 '내가 좋아하는 것 100가지 써보기'란 미션지를 보았다.

"100가지? 100가지나 쓰라고?" 장난스러운 캐릭터가 그려진 정말 유치한 디자인의 싸구려 종이에 쓰여 있던 그 미션 한 줄이 순간 너무 당황스러웠다. 동시에 '정말 내가 좋아하는 게 100개가 되긴 하는 걸까?'라는 궁금증이 생겨 집으로 돌아와 노트에 적어보기 시작했다.


나는 생각하는 걸 좋아한다. 내 삶을 더욱 발전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데 필요한 생각이나 살아가는데 필요한 업무나 인간관계에 관한 생각처럼 생산적인 생각들도 많이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생각들은 망상이나 착각인 경우도 허다하다. 시간이 없어서 못 산 로또가 1등이 되는 건 아닐까?, 해외여행을 경품으로 내건 이벤트에 당첨돼서 연차를 써야 하면 직장엔 뭐라고 얘기를 하지?, 아까부터 계속 눈이 마주치는 저 사람이 나한테 호감을 보였다가 내가 유부녀인 걸 알고 실망하면 어떡하지? 같은.

물론 난 삶에 대한 고민과 지난날들의 후회와 반성처럼 평상시 워낙 헤비 한 주제의 생각들을 많이 하는 편이라 가능하면 주변을 가볍게 대하려고 의식적으로 애쓰기도 한다.


나에게 일 년은 사계절이 아니라 야구를 하는 계절(4,5,6,7,8,9,10)과 야구를 하지 않는 계절(11,12,1,2,3)로 구분돼 있을 만큼 야구를 좋아한다. 야구를 하는 계절엔 일주일에 한 번 가는 대중목욕탕을 야구가 없는 월요일에 가고 야구를 하는 계절엔 모든 나의 개인 약속과 스케줄은 대구에서 야구를 하지 않는 날에만 정해질 정도로 모든 일거수일투족이 야구에 최적화된다. 난 학교 다닐 때 체육을 '양'또는'가'를 받아본 적도 있을 만큼 운동이나 스포츠, 몸을 조금이라도 꼼지락거려야 하는 활동을 싫어해서 한 걸음이라도 덜 걷고, 덜 뛰고, 덜 움직이면서 살려고 노력하는데 야구가 있는 날에는 이런 나의 활동 습관들이 확 달라질 만큼의 광팬이다.


삶의 행복은 '먹는데'있다고 생각할 만큼 먹는 것을 좋아한다. 내 입맛에 딱 맞는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면 내일까지 제출해야 할 보고서도, 지금 당장 처리해야 하는 업무들도 잊힐 만큼 행복함을 느낀다. 가방이나 옷, 신발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어서 2만 원만 넘어가도 '저걸 사야 돼', '말아야 돼'를 수십 번 혹은 며칠을 고민하다 구매하지만 먹고 싶은 음식이나 맛있어 보이는 음식은 콩알만 한 게 만 원이라고 해도 고민 없이 사 먹어 버릴 정도로 먹는 것엔 진심이다.


나는 피가 낭자하고 잔인하고 무서움이 가득한 연쇄살인이나 미스터리, 스릴러, 추리, 호러, 공포물 같은 것들을 좋아한다. 잔인하고 무서울수록 좋다. TV를 거의 잘 안 보는 편이지만 굳이 챙겨 보는 프로그램이 있다면 '그것이 알고 싶다', 'PD수첩'같은 시사 프로그램이고 유튜브에서 구독하는 채널도 '김복준의 사건 의뢰', '디바 제시카의 금요 사건 파일', '신지우의 미스터리 사건 파일'처럼 연쇄살인에 대해 이야기하고 살인사건과 사이코패스, 살인자에 대해 이야기하는 채널들을 즐겨 본다. 워낙 살인사건에 관련된 것들을 많이 보다 보니 한국이나 해외에서 일어난 웬만한 사건들은 거의 꿰고 있을 정도라 범죄 수법이나 범죄 심리에 관한 한 아마 준전문가 수준은 될 거 같다. 그래서 '추리소설이나 스릴러물을 한번 써볼까' 생각도 했었는데 역시 좋아하는 것과 할 수 있는 것과는 다르다는 걸 느꼈다. 좋아하고 많이 보고, 많이 알아서 베스트셀러가 써질 거 같지만 상상력이 없는 인간이라 그런지 단 한 줄도 쓰지 못했다.


살인사건이나 범죄 같은 걸 좋아하는 사람은 왠지 사이코패스 같다거나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싶겠지만 난 지극히 건강하고 정상이며 파리 한 마리도 못 죽일 정도로 겁이 많다. 저런 의 것들을 좋아하는 취향이 된 건 좋아하지 않는 걸 제외한 나머지 중의 선택이 되었을 가능성이 큰 거 같다.

나는 20대를 거의 사랑타령만 해대며 살았다.

'진정한 사랑의 조건'이나 '영원히 변하지 않을 사랑', '아프지 않게 이별하는 방법', ' 가슴속에 묻어 둔 사랑도 사랑인가'처럼 내 세상의 전부가 사랑과 이별인 듯 산 적도 있을 만큼의 로맨티시스트였지만 지금 나는 로맨스 영화, 로맨스 소설, 로맨스 드라마 같은 것들은 절대 보지 않는다. 로맨스라면 몇 번이나 윤회를 반복해 다시 태어 나도 절대 두 번 다시 하기 싫을 만큼 질리도록 많이 해봤고 세상 그 어떤 드라마나 영화도 내가 한 사랑만큼의 스토리와 아픔, 슬픔을 담지 못하는 거 같다고나 할까?, 내가 했던 현실에서의 사랑이 소설보다 더 소설 같았다고나 할까? 로맨스장르의 것들을 보며 어떠한 환상, 가슴이 아릴듯한 슬픔, 떨림이나 행복을 느끼지 못하니 로맨스는 좋아하는 것에서 제외된다.

개그맨들이 나와서 웃겨대는 코미디도 싫다. 요즘엔 시사풍자나 사회비판에 대한 개그도 많고 수준이 높은 개그들도 많지만 개그의 대부분이 말장난인 게 싫고 최근 유독 난무하는 색드립 개그 같은 것들이 싫다. 물론 나도 굳이 챙겨보는 건 아니지만 봐야 하는 상황에 처하면 즐겁게 보고 재미나다고 깔깔대기도 한다. 웃기고 재밌는 건 사실이지만 '딱 거기서 끝'이라는 게 싫다. 보고 난 후 특별한 감상이 남는다거나 잔상이 남겨지는 것 없이 그 일순간 소비되고 마는 감정이 싫다. 연예인들이 나와서 리얼 예능이라며 찍어대는 것들은 더 싫다. 내가 인격적으로 미성숙한 인간이라서 인지 자기네들끼리 놀면서 떠드는 예능 같은 걸 보면 화가 난다. 물론 그들도 그들 나름의 고충이 있을 것이고 다들 유명 연예인이 돼서 성장하기까지 많은 어려움과 힘듦이 있었겠지만 TV에 나와 자기네들끼리 실컷 떠들고, 놀고, 먹고, 여행 다니고, 뛰어다니고 장난치면서 나처럼 평범한 소시민의 한 달 월급의 몇 배나 되는, 유명 연예인의 경우엔 월급의 몇 배가 아닌 일 년 연봉에 맞먹는 돈을 받아 가는 게 싫다.

물론 그 한 사람에 달린 입들이 한둘이 아니라 그들의 수입으로 몇 명이나 되는 사람의 생계가 달려있겠지만 어쨌든 나는 되기 힘든 상위 몇 프로가 그들에게는 쉽다는 게 내 심보가 못돼먹어서 배가 아픈 건지도 모르겠다.

오죽하면 요즘에는 공부해서 성공하란 말 대신에 연예인이나 아이돌, 유명 유튜버가 되라는 게 덕담이라고 한다. 얼마 전 아는 지인의 돌잔치에 간 적이 있었는데 아이가 돌잡이로 마이크를 잡으니 '아이고! 우리 지율이 월드 스타 되려나 보네' 이러면서 부모들이 엄청나게 좋아했다. 어릴 때부터 경제적으로 빈약했고 경제적 능력에 따라 일정 부분 정해지는 사회적 지위에서도 늘 약자의 입장에서 살아야 했고 눈앞의 생계를 걱정하며 치열하게 살아 내었던 내 삶의 부정적 영향이 나도 모르게 나의 내면과 의식 속에 심어져 있는 건지 저렇게 TV에서 자기네들끼리 놀고 있는 프로그램은 질색이다. 내 집 청소하고 정리하는 것도 힘든데 왜 연예인들의 집 정리하는 걸 봐야 하고 내 새끼 키우는 것도 스트레스인데 왜 때문에 저들의 육아를 봐야 하며 내 고민으로도 속이 시끄러운데 왜 저들의 고민까지 들으며 스트레스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는 정체불명의 각종 프로그램들도 싫다.


이런저런 이유로 싫어하는 것들을 소거법으로 제외하고 나니 위에 얘기한 것들을 좋아하는 것일 뿐 난 이상한 사람이 아니란 걸 다시 한번 얘기해 두고 싶다.


친구와 함께 수다 떨며 마시는 커피도 좋아하고 카페인이 부담스러운 날 가볍게 마실 수 있는 향이 좋은 차도 좋아한다. 삼겹살, 육회, 치킨, 와퍼 버거, 유부초밥, 떡볶이, 군만두, 생고기, 콜라, 망고, 체리, 매운 새우깡, 홈런볼, 스크류바..... 먹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100개를 채우고도 남을 거 같다.


처음 '내가 좋아하는 것 100개 써보기'라는 걸 마주했을 땐 '100개씩이나?'였는데 막상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떠올리고 나열하다 보니 '100개쯤이야?'가 된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면서 '정말 나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없고 진지함도, 특별한 생각도 없이 사는구나' 싶어 자기반성도 하게 되는 것 같다. 내가 중심이 되어 돌아가는 나라는 우주에서 나에 대한 관심보다는 타인이 좋아하는 것, 타인이 좋아하는 음식처럼 남들을 최우선으로 두고 살아가고 있었다. 두 번 주어지는 삶도 아닌데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가고 싶은 것, 내가 먹고 싶은 것 아닌 주변의 눈치를 보고 비위를 맞추며 다른 사람에 의해 결정되는 삶을 살고 있는 거 같은 생각에 정신이

확 드는 거 같았다.


혼자 살아가는 곳이 아니고 혼자서는 살 수도 없는 세상이라 남들은 무시하고 나만을 우선으로 내세워 살아서는 안 되겠지만 타인과 공존하는 삶 속에서 어느 정도 나의 공간은 갖고 살아야 할 거 같다.

아주 우연히 들른 소품점에서 우연히 보게 된 작은 종이 한 장으로도 이렇게 많은 것들을 깨닫고 느끼게 되는 것처럼 나를 알아가는 날들이 마냥 즐겁고 설레는 건 살다 보면 이렇듯 전혀 생각지 않은 곳에서도 나를 발견하게 되는 행운도 오기 때문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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