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국가에서 주는 월급을 받는 '공식 백수'이다.
3년간 온 오프라인으로 가게를 운영하며 제대로 쉬지도 못한 데다 가게를 접은 후에는 바로 직장 생활을 다시 시작하는 바람에 심신이 지치기도 했고 다니던 직장에서 마침 계약만료로 퇴사를 하게 되면서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게 됐다. 기계도 오래 사용하면 잠깐씩은 스위치를 꺼주어야 되듯이 그동안 바쁘게 살아온 나에게 잠시 휴식의 시간을 주기로 했다. 매일 바쁘게 지낼 때는 시간만 있으면 '이것도 해야지', '저것도 해야지' 하며 하고 싶은 것들을 잔뜩 생각해두기도 했는데 막상 백수가 되고 나니 하루하루가 다르게 게을러져 가는 게 느껴진다.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도 9시에서 10시, 11시...
이래서 '사람은 일을 해야 하는구나' 싶기도 하고.
일을 한다는 건 경제적인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사람을 그나마 계획적이고 부지런하게 살게 만들어주는 거 같다. 똑같은 일상의 반복이지만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씻고 출근하고 밥을 먹고 퇴근하는 등, 어찌 됐건 하루 일과가 짜인 대로 움직이다 보니 씻기 싫어도 출근을 하려면 씻어야 하고, 귀찮아서 끼니를 거르고 싶어도 일하려면 먹어야 하니 일을 한다는 건 그래도 실보다는 득이 많은 활동이란 생각이 든다.
요즘은 오후 한두 시에 일어나 멍하니 앉았다가 3시쯤엔 반려견 산책을 시키고 들어와서 유튜브며 넷플릭스, 티빙, 왓챠 같은 OTT를 들락거리며 별 재미도 없는 드라마나 보다 편의점 도시락이나 라면으로 대충 아점저 한 끼를 때우고 계속 침대에 누워서 뒹굴뒹굴거리다 자는 게 하루 일과의 전부다. 약속 같은 걸 만들지 않으니 나갈 일이 없어 머리를 며칠씩 안 감은 날도 있다. 주방에 사다 둔 귤이 너무 먹고 싶었는데 침대에서 일어나 주방까지 가는 것마저 귀찮아서 안 먹고 참은 적도 있다. 백수인 시간이 늘어날수록 내 일상도 축축 늘어져가고 있는 것 같다.
'아무리 백수라도 이리 살면 안 되겠다' 싶어 내일부터는 일찍 일어나 운동도 하고 밥도 제대로 챙겨 먹고 서점에 나가 책이라도 봐야지 생각하지만 다음날 눈뜨면 여전히 오후 1시나 2시다. 지금 이 시간에도 어디선가 열심히 일하고 있는 사람들에겐 부러운(?) 일상일 수도 있지만 그동안 '일'이라는 활동을 했었기에 나라는 사람이 제대로 살 수 있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특별히 할 일도 없고 별다르게 만나는 사람도 없이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내다 보니 이런저런 쓸데없는 생각들도 많이 하게 되고 쓸데없는 고민들도 많이 하게 된다. 국민연금이 곧 고갈이라는데 나는 받을 수 있을까? 라든지 대한민국의 출생률이 세계 최저라 앞으로 몇십 년 후에는 대한민국이 지도에서 사라진다던데라든지, 환경오염으로 인한 지구환경 파괴 같은 쓸데없는 걱정을 하며 시간을 때우기도 한다. 제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고 살면서 지구를 걱정하고 인류의 미래와 민족을 생각한다는 게 좀 우습기도 하다.
그러다 문득 '나'에 대해 생각해 봤다. 누군가 내게 "당신 친구 최나영 씨는 어떤 사람인가요?"라고 묻는다면 "제 친구 나영이는요. 학창 시절부터 똑 부러지는 아이였어요. 경제관념도 명확해서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돈거래는 절대 하지 않고요. 그러면서 은근 소심한 면도 있어서 대학 다닐 때 좋아하는 남자에게 말 한마디도 못 건네서 제가 대신 어쩌고 저쩌고..... " 그런데 만약 누군가 내게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 묻는다면........ 나는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흔히들 하는 얘기로 '니들이 나에 대해서 뭘 알아? 세상에서 나를 가장 잘 아는 건 나야!'라고 하지만 과연 나를 가장 잘 아는 게 내가 맞을까? '그렇다'라는 대답을 자신 있게 하기는 힘들 거 같다. 물론 내가 아닌 다른 누구라도 마찬가지일 거다. 그래서 나는 인구문제나 지구환경 문제 같은 것을 생각하고 고민하는 게 아니라
'나'라는 사람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했다.
나는 조금은 양면성을 가진 사람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본연의 모습과 사회적인 모습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엄마에게는 쌀쌀하고 퉁명스럽지만 회사에서는 다정하고 애교가 넘친다든지, 혼자 밥을 먹을 땐 얼굴에 양념을 묻혀가며 손으로 김치를 째 먹고 손에 묻은 양념을 옷에다 쓰윽 닦기도 하지만 밖에서 다른 이들과 밥을 먹을 땐 음식 씹는 소리도 제대로 안 내고 입을 가려가며 조신하게 먹는다든지, 집에서는 거리낌 없이 방귀도 뀌고 트럼도 하면서 밖에서는 절대 절대 안 돼!! 하고 참았다가 집에 들어와서야 마구 분출한다든지 하는 그런 것들 말이다.
나는 한마디로 단정하기 참 어려운 사람인 거 같긴 하다. 굉장히 밝고 활달하고 명랑한 거 같은데 의외로 낯을 많이 가리고 소심하다든지, 굉장히 적극적이고 자기주장이 명확한 똑 부러지는 사람 같은데 의외로 다른 사람에게 '싫어요', '안 돼요', '못해요' 같은 정확한 자기표현을 못 한다든지, 굉장히 개방적이고 열린 사람 같은데 예상외로 민소매티셔츠나 무릎 위로 올라가는 반바지를 못 입는다든지. 그래서 '나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다'라고 꼭 집어서 얘기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거 같다.
나는 표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사람이라 적을 많이 만드는 편이다. 내가 너무나 잘 파악하고 있는 단점 중에 하나라 항상 '조심해야지', '신경 써야지' 하는데도 막상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내가 주체가 아닌 내 얼굴이 '난 지금 네 얘기가 아주 짜증 나', '정말 지루해 미칠 거 같거든', '정말 좋아 죽겠어'처럼 대화를 하고 있을 때도 있다. 싫고 좋은 것의 구분, 내 사람과 그 외의 사람의 구분이 과하게 뚜렷해서 싫어하는 사람이나 내가 만든 테두리 안에 들지 않는 인간관계에서는 지나치게 차갑기도 하다.
여기까지만 얘기를 한다면 정말 나 자신을 잘 파악하고 있는 거처럼 보이지만 저런 모습에서 전혀 상상하기 힘든 모습도 존재한다. 정말 하기 싫은 일을 누군가 부탁한다면 '싫어요'라는 말을 하지 못해서 내가 당장 해야 할 일까지 미루면서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하는 경우도 있고 지금은 배가 불러서 더는 아무것도 못 먹을 것 같은데 누군가 배고프다며 밥을 먹으러 가자고 한다면 '미안, 난 밥을 먹고 와서 지금 배가 너무 불러 밥은 못 먹을 거 같아'라는 말을 하지 못해서 넘어가지도 않는 걸 꾸역꾸역 먹은 후 디저트에 커피까지 마시고는 체해서 소화제를 먹거나 배탈이 나기도 한다. '싫어요'라고 말하는 표정으로 '괜찮아요'라고 말하는 내 모습이 너무 웃길 거 같긴 하다. 말투가 예쁜 편은 아니라 나와 처음 대화를 나눠보거나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거의 99%의 확률로 완전 싹수가 없는 사람일 것 같다고 얘기하지만 5분 이상 이야기를 해보거나 나를 두 번 이상 본 사람은 첫인상과는 달리 털털하고 개그스러운 내 모습에 놀라곤 한다.
글로만 나를 대한 사람들은 왠지 내가 부정적이거나 매우 정적이거나 과하게 시니컬하다 느낄 수 있지만 그런 모습에 반해 아주 단순하고 초긍정적인 성격이라 고민이나 걱정을 오래 담아두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나는 꽤나 직설적인 편인데 왜 나에게 3요 '싫어요', '안 돼요', '못해요'는 언제나 힘든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보이는 모습과 미처 보이지 않은 모습이 공존하며 '나'라는 사람이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다른 사람이 보는 '나'와 내가 보는 '나'는 다를 것이고 다른 사람이 보고 싶어 하는 '나'와 내가 보여주고픈 '나'역시 다를 것이기에 어느 일면의 모습만으로 '어떤 사람이다'라고 결정 내리기는 힘들 거 같다. 그리고 그건 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다 해당되는 얘기이다.
이렇건 저렇건 간에 중요한 건 어떤 모습이던 내가 '나'인 건 변함없다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나를 정의 내리지 못하면 어떤가.
어쩌면 살아가는 내내 알아가고 평생을 알아가도 다 알지 못할 정도로 복잡한 존재들이 우리 인간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억지로 꾸미려 하지 말고 애써 좋은 사람인 척 가면을 쓰지 않고 살아가는 게 가장 나에게 가까운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굳이 나를 낮출 필요도, 지나치게 나를 과시하지 할 필요도 없다. 화날 땐 화내고 즐거우면 웃고 슬프면 울고 순간순간 나의 감정들에 정직하게 사는 게 가장 나다운 모습일 거라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저마다의 모습으로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바쁜 일상이지만 아주 잠깐은 '나'에 대해, 그리고 '나다움'에 대해 생각하며 지금 내가 '나'로서 잘 살아가고 있는 건지 가끔 체크해 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