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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해 Oct 21. 2022

무궁화호 탑승기

느림의 미학



7박 8일간의 서해안 걷기 일정을 마치고 몇몇 사람들과 남은 이틀을 더 보냈다. 서울 올라가는 날. 이제는 집에 가는 티켓을 끊어야 할 때. 버스와 기차 중에 묻는다면 난 언제나 버스였다. 지금 와 생각해보니 왜인지 모르겠으나 평소 기차보다 시외버스를 자주 이용해 그냥 익숙했다. 기차역보다 고속버스터미널이 집과 더 가깝기도 하고. 하지만 이 날은 특별한 마음으로 갖고 기차를 타보기로 했다. 10일간의 여정을 끝맺음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룸메이트였던 S가 오전에 무궁화호를 타고 집에 간다고 말했다. 5시간이 걸리지만 이 여정을 곱씹고 정리하기까지 충분한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 또한 사진을 정리하고 창밖 풍경을 보고 잠을 자다 보면 훌쩍 지나갈 것 같았다. 여행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다름 아닌 이동하는 시간. 창밖을 보며 멍을 때려도 깊은 사색에 잠겨도, 아무도 모르고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시간. 그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닌 시간. 그렇게 흘러가는 대로 나를 내버려 둘 수 있는 시공간.



ktx를 취소하고 무궁화호에 탑승했다. 출발지이어서인지 기차엔 텅 빈 좌석이 가득했다. 다시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었다. 오른쪽에는 커다란 가방이, 다른 쪽에는 커다란 창이 곁이 되어주었다. 느리게 기차는 출발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내가 창밖 너머의 세상과 연결되고 일정한 거리 안에서 풍경에 빠져들 수 있는 속도로. 느린 게 이렇게 좋을 수 있구나.



밥을 먹는 속도가 느리고 생각하는 속도가 느리고 책을 읽는 속도가 느리고 작업하는 속도가 느리다. 생산성의 시대에서 계속 뒤처질까 조바심이 나거나 눈치 보는 일이 늘어난다. 내 몸을 좀 더 굴리고 에너지를 끌어 모아 민첩하고 빠르게 살아갈 수 있다. 그렇게 살아간 적도 많다. 하지만 나는 나의 소중한 몸을, 내 본성을, 그리고 나만의 속도를 존중하고 싶다. 세상과 발맞춰 걷는 걸음도 좋지만 혼자 걷거나 나와 속도가 맞는 이들을 찾아 같이 걷고 싶다.




기차에서 보이는 해 질 녘 노란 황금 들판은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아니 실제로 눈이 부셨다. 값싼 가격으로 이런 황홀한 기분을 느껴도 되는지 스스로를 의심했다. 무궁화호는 곧 사라질 유물처럼 보였고, 느리다고 아무도 찾지 않는 그런 애물단지가 될 것 같았다. 아니 이미 그런지 오래인지 모른다. 빠른 것이 모든 걸 장악하는 시대 이 기차가 남아있다는 것이 기적 같은 기분도 든다. 때때로 생각할 시공간이 필요할 때 이 자리에 앉아있는 상상을 해본다.



한참을 달리자 자연은 서서히 어둠 속에 자취를 감추고 도시의 불빛들이 보였다. 저녁도 먹지 못한 채로 기차에서의 시간이 지나갔다. 기차역에서 내려 몸만 한 배낭을 짊어지고 집으로 가는 길. 등에 착 달라붙고 어깨에 힘이 실리는 묵중한 무게, 노곤한 피로가 몰려오며 온 몸에 마음껏 고생한 감각이 느껴진다. 그제야 편안한 마음으로 두 다리 두 팔 뻗고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다.




아 이번 여행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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