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추억은.
달아날 추(趨), 생각할 억(憶).
기억으로부터 달아나고 또 달아나고 남은 잔재이다.
기억으로부터 달아나려 하지만, 난 아직도 잊지 못한다.
동물원의 유리벽을 필사적으로 긁고 있던, 프레리도그의 검고 동그란 그 눈을.
나는 지금, 돌다리 두드리듯이 기억을 하나하나 더듬어 가고 있다.
내 안에 남아 있는 기억의 잔재 중 하나를 끄집어냈다.
이것은 고등학생 시절의 기억이다.
방학이라 학교에 가지 않은 나는,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슬리퍼를 질질 끌며 길을 걷고 있었다.
그때, 문뜩 좋은 글감이 머리를 스쳤다.
마치 아르키메데스가 목욕탕에 들어갔다가 우연히 깨달음을 얻고 “유레카”를 외친 상황과 같았다.
배고픔은 어느새 사라졌고 글에 대한 생각으로만 머리가 가득 찼다.
가던 발걸음을 돌려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어서 집에 돌아가 글을 쓰기 위함이었다.
좋은 글감이 떠오른 탓에 기분이 한껏 들떴다. 내 눈에 세상이 아름답게 보였다.
물웅덩이에 비친 태양이 나를 비췄고, 드넓게 펼쳐진 하늘이 내 감성을 자극했다.
거리에서 서로에게 사랑을 속삭이는 커플은 내게 사랑을 가르쳐 주었다.
그렇게 본분도 잊은 채 세상에 취해 걷다 보니, 집에 도착했다.
집에 오자마자 글 쓸 채비를 마치고 자리에 앉았다.
다음 순간,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까먹었다.
글감에 대한 내용을 까먹었다.
나는 주먹을 쥐고 몇 번이고 머리를 두들겼다. 고통으로 기억을 되찾기 위함이었다.
그 행동은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머리를 쥐어뜯어도 보았지만 그 또한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내 손에 남아있는 건 애꿎은 머리카락뿐이었다. 이후로 나는 기록하는 것에 집착하게 된 것 같다.
잊기 싫어 글을 썼다.
망각하는 게 두려워서 글을 썼다.
그날은 내가,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다,
라는 사실을 깨달은 날이기도 했다.
나는 지금 또다시, 돌다리 두드리듯이 기억을 하나하나 더듬어 가고 있다.
내 안에 남아 있는 기억의 잔재 중 또 다른 하나를 끄집어냈다.
어렸을 적 동물원에서 프레리도그를 본 기억을.
동물원에서 처음 본 프레리도그들은 아기자기하고 귀여웠다.
유리벽 너머로 프레리도그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서로의 몸을 비비고 있었다.
간혹 몇몇은 몸을 일자로 세우고 일어나서 코를 벌렁거리고 있었다.
어렸을 적의 나는, 그 모습을 설레는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
.
.
정확하게는 그런 것을 봤다는 느낌의 기억이 있다.
그런 프레리도그들을 봤다. 희미하게 그렇게 기억한다.
흐릿하게 그렇게 추억한다.
내가 어렸을 적 봤던 수십 마리의 프레리도그들은 정확히 추억하지 못한다.
내가 유일하게 추억하는 프레리도그는, 내 안에 각인된 프레리도그의 모습은,
오직 단 한 마리의 프레리도그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구석진 곳에 있던,
프레리도그 무리에서 동떨어져 있던, 단 한 마리의 프레리도그.
그 한 마리는 한 곳에 모여 태평하게 누워 있던 프레리도그들과는 달랐다.
그 프레리도그는 유리벽에 머리를 박은 채로, 유리벽을 계속 긁고 있었다.
긁고 또 긁었다.
유리벽에는 프레리도그의 발톱 자국들이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 프레리도그의 필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유리벽에는 자국만이 남아있을 뿐 유리벽은 굳건한 그 상태로 있었다.
그럼에도 프레리독은 그치지 않았다.
그 프레리도그는 쉬지 않고 손을 놀렸다.
그 프레리도그의 눈을 봤다. 검고 또 거멨다.
그 눈에 마치 홀린 듯이 빠져들었다.
프레리도그의 시선은 어디에 있었을까.
눈앞의 유리벽이었을까. 그 너머의 어딘가였을까.
그것은 알지 못한다.
하지만, 프레리도그에 대한 기억은,
그 기억은,
지금도 내가 망각하려 해도 망각할 수 없는 기억이다.
망각.
어떤 사실을 잊어버림.
망각은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기억을 잊어버리는 방어기제라고 한다.
다른 동물들에 비해 기억력이 월등히 뛰어났던 인간은,
그 기억에서 비롯된 스트레스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진화했다.
그 방법은 망각이었다.
그들은 기억하기를 포기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기억하는 걸 포기했다.
세상의 모순점을 기억하는 걸 포기했다.
그리고 나만을 기억했다. 무관심과 개인주의에서 비롯된 망각.
그게 지금 현실에 어울리는 망각의 정의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현실의 괴리를 망각한 채 현실에서 살아간다.
현실의 괴리를 깨닫게 되면, 현실로부터 괴리로부터 도망간다.
역설적이게도, 기억하기를 포기한 사람들도 과거를 되돌아본다.
사람들은 그 행위를 ‘추억’이라고 칭했다.
쫓을 추(追), 생각할 억(憶).
기억을 쫓는다.
사람은 ‘기억을 쫓는다.’ 고 말하며, ‘아, 그땐 그랬지’, 같은 허울 좋은 말들을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과거를 되돌아본다 한다.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들에게 있어서 추억의 ‘추’는,
‘쫓을 추(追)’가 아니라,
‘달아날 추(趨)’이다.
사람들은 도망친다. 현실의 괴리가 가득한 기억으로부터. 자신을 비참하게 만드는 기억으로부터.
달아나고 또 달아난다. 사람들은 기어코 그 모든 것으로부터 달아나고, 남은 것을 손에 꽉 쥔다.
자신의 손에 잡힌 존재는 행복으로 가득하다.
세상으로부터 도망치고 남은 흔적.
달아날 추(趨), 생각할 억(憶).
기억으로부터 달아나다, 그것이 추억이다.
당연하게도 그 추억 속에는 현실의 괴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의 괴리를 망각했다.
사람은 현실의 괴리를 깨닫고, 그로부터 도망쳤다.
하지만, 어린 시절 내가 보았던 프레리도그는 현실의 괴리에 끝까지 맞섰다.
프레리도그는 동물원의 유리벽 안에 갇혀있었다.
동물원의 유리벽은 프레리도그에게 있어 옳지 못한 현실이었다.
프레리도그는 과거에 드넓은 대지를 누비며 살았을 것이다.
그런 존재에게 현재의 동물원의 유리벽 안은 대지에 비해 한없이 작다.
동물원은 프레리도그를 옭아매고 있는 현실의 괴리이다. 그 괴리에 프레리도그는 맞섰다.
동물원의 유리벽에 몸을 들이박고 유리벽을 계속 긁어내는 것으로.
동물원의 유리벽이라는 현실에 살아가면, 고향인 대지의 기억은 도리어 아픔만을 줄 것이다.
잡히지 않을 존재를 향해 손을 뻗는 것보다 큰 아픔은 없기 때문이다.
망각하면 편해진다. 포기하면 편해진다. 지금의 현실을 수긍하면, 고통 속에서 살아갈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프레리도그는 뚫리지 않는 유리벽에 머리를 박으며 유리벽을 긁었다.
드넓은 대지를 내달리던 그 시절을 떠올리기 위해.
현실의 괴리를 마주했고, 과거라는 올바른 상황을 그리며 홀로 싸웠다.
프레리도그는 현실에 맞섰다. 유리벽을 들이박아 옳은 과거를 기억했다.
자신의 과거를 잊지 않기 위해 유리벽을 긁고 또 긁었다.
현실이라는 잘못된 괴리 속에서 발버둥 쳤다.
지금에 와서야 어린 시절 보았던 그 프레리도그에 대해 추억하며, 그 프레리도그를 이해하려 해 본다.
기억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프레리도그에게 있어 유리벽에 머리를 박으며 긁는 행위는,
올바른 과거를 되돌아보는 행위가 아니었을까, 하고.
그렇다면, 우리는 어느 쪽일까?
우리는 현실의 괴리를 망각하지 않고 기억할까?
우리는 무엇을 추억할까?
그에 대한 답을 생각해 보기 위해 이 글을 쓰다가 말고 기억을 더듬었다.
차츰차츰 기억을 들추다가 얼굴이 화끈해졌다. 좋지 않은 기억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가장 처음에 든 기억은 이성에게 차인 기억이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잊고 싶었던, 외면했던, 옳지 못했던 기억들이 나를 옭아맸다.
기억은 하나로 끝나지 않고, 사고를 확장해 갔다.
수많은 과거의 기억은 심장을 움켜쥐고, 그 심장에 착잡한 감정과 응어리를 남겼다.
기억의 늪에 점점 빠져들었다. 고개를 두어 번 저어 그로부터 빠져나오고, 글로 시선을 옮겼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이 글을 마무리 짓는 것. 우선 할 일을 마무리하고 차후에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다시 글에 집중했다. 글을 쓰는 순간에는 온 집중이 글에 쏠린다.
그 때면, 모든 기억에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아무튼 글을 이어간다.
내게 묻는다. 망각은 옳지 않은가?
그에 대한 확답을 내릴 수는 없었다. 그래도 어렴풋하게 한 가지 사실만은 알 수 있었다.
지금 내가 이러한 글을 썼고, 이러한 생각을 했다는 기억은,
앞으로 정해진 수순대로 흘러갈 것이라는 사실이다.
머잖아, 언제나 그렇듯이, 누구에게나 , 깨끗이 잊힐 것이었다.
나는 이 순간을 추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