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그 때를 다시 돌아보아도, 그 순간의 모든 것이 마치 신기루 같다.
학창 시절, 역사 수업의 일환으로 반 학생 모두에게 발표 과제가 주어졌다.
주제는 '항일 운동'이었다.
한 친구가 '독립 운동가'를 중점으로 발표하였다.
발표 중에, 독립 운동 과정에서 체포당한 후 정보를 실토하여 다른 독립운동가들이 체포되었음을 말하며,
그 정보를 실토한 사람을 매도하였다.
정보를 실토하지 않았더라면, 독립 운동에 차질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라고 발표하는 학생이 말하였다.
반 학생의 몇몇이 그 친구의 발표에 동조하며, 같이 매도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모두가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홀린듯이 취해있었다.
그 신기루와도 같은 상황에서 생각했다.
우리에게 그들을 논할 자격이 있을까.
우리에게 그들을 매도할 자격이 있을까.
우리에게 자격이 있을까.
그 질문들의 정답은 모르지만, 이미 답은 도출된 상태였다.
우리는 그 생각을 하기 전에, 이미 매도의 말을 뱉고 있었다.
말이라는 건 너무나 쉽고도, 너무나 어려웠다.
말이라는 건, 모든 것이 너무 쉽다.
말을 내뱉는 것도 쉽다.
그리고, 그 말로 상처주는 것도 쉽다.
말이라는 건, 모든 것이 너무 어렵다.
말을 내뱉는 것도 어렵다.
그리고, 그 말을 되돌리는 것도 어렵다.
우리는 말의 무게를 가볍게 보며, 너무 쉽게 말을 내뱉고 있었다.
그들이 고문을 버티고 버티다가 내뱉은 육중한 한마디의 무게를.
그 사실을 알아차리기엔, 그들과 우리 사이에는 너무 먼 거리감이 있었다.
나.---.당신.
모두가 그들과 우리를, 그렇게 둘로 처절히 나누고 있었다.
내 눈 앞의 현실과 그 모든 것이 신기루 같다고 느끼고 싶었다.
그들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신기루가, 온세상을 신기루로 가리고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학교 의자에 앉아있다.
당신은, 전기의자에 앉아있다.
나는, 내 발표순서를 기다린다.
당신은, 당신의 고문 순서를 기다린다.
나는, 발표가 시작되자, 나에 취해서 말을 내뱉기 시작한다.
당신은, 고문이 시작되자, 고통에 취해서 말을 내뱉기 시작한다.
나는, 내가 준비한 발표에 대한 자아도취에 빠져 고양감과 함께 몸을 파르르 떤다.
당신은, 전기고문에 피부 탄 내와 함께 몸을 파르르 떤다.
나는, 큰 소리로 강의실 안에 내 목소리가 메아리치게 외친다. 당신은 매국노다.
당신은,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고문실 안에서 형장의 이슬처럼 주문을 외운다. 나는 매국노다.
나는, 내가 나에 취해 뱉은 말의 무게를 헤아리려 하지 않는다. 나에 대한 얘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당신은, 본인이 고통에 취해 뱉은 말의 무게를 자꾸만 헤아리고 있다.
나는, 다시 자리로 돌아와 의자에 앉아 멍때리기 시작한다.
내 기억의 비눗방울들은 작은 소리에도 곧잘 터져나간다.
또 다른 발표 소리. 수업 소리. 복도를 지나가는 사람의 소리.
그 소리들과 부딪친 기억의 방울들은 그 자리에서 녹아내리며 하나씩 기억 속에서 사라져간다.
그 끝에 나는 내가 했던 말들을 모두 잊어버린다.
당신은, 전기의자에서 온몸이 묶인 채로 숨을 헐떡인다. 당신이 한 말들이 문신처럼 기억 속에 새겨진다.
문신이 실시간으로 새겨지는 상황 속에서 소리가 들려온다.
비명 소리. 그 비명을 향해 쏟아지는 고함 소리. 고함 소리와 함께 더 커지는 비명 소리.
그 소리들이 살을 찌르며 기억의 문신이 더욱더 살 깊숙이 박히도록 한다.
새겨진 기억의 문신들은 살 타는 냄새를 그득하게 피워내며 자꾸만 환상통을 불러일으킨다.
당신은 시간이 갈수록 잦아지는 환상통의 주기에 정신이 흐려지지만,
뱉어낸 모든 말과 사실을 잊어버리지 못한다.
마치 신기루에 취한 듯한 상황이며,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나는 당신이 아니다.
하지만 당신에 대해 비웃듯이 말한다.
당신은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을 칼로 찔러서는 안 된다, 당신은 내가 아니기에.
하지만 나는, 당신이 내가 아니기에 당신을 찌른다. 당신의 고통이, 내 고통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신기루 같은 세상을 우리는 살아간다. 신기루 같은 세상 속에서 존재하는 단어는 단, 둘 뿐이다.
나.---.당신.
이 두 개만이 이 세상을 가득 메우고 있다.
나.---.당신.
또 다른 나.--- .또 다른 당신.
세대.---.세대.
성별.---.성별.
나라.---.나라.
그렇게 세상은 양립하는 두 존재들로 갈라졌다. 양립하는 두 존재들의 사이에는 거리가 존재한다.
그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딱, 스페이스 바를 세 번 누르면 벌어질 거리.
딱, 빽 스페이스를 세 번 누르면 닿을 거리. 그 정도의 거리지만, 그 거리는 절대 좁혀지지 않을 거리이다.
나.---.당신.
그 사이를 갈라두는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그 존재는 ‘신기루’다.
신기루는, 위의 공기는 차고, 아래의 공기가 뜨거울 경우,
그 사이의 불안정한 공간에서 빛이 굴절하며 발생한다.
나는 차갑고.---.당신은 뜨겁다.
그런 나.---.그런 당신.
그 사이에서 신기루가 발생한다.
그 신기루는 두 존재를 단절시키는 하나의 벽이 되고, 신기루 너머로 보이는 상대의 모습을 왜곡시킨다.
신기루를 사이에 두고 바라보는 나.---.당신.
둘은 왜곡되어 뒤틀린 상대의 모습에 적대감을 가진다.
신기루의 등장으로, 둘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나는 손에 칼을 들고 당신을 찌르고 있다.
나의 상상 속에서 생각했던 당신의 모습을 신기루를 통해 보며,
신기루 너머로 보이는 왜곡되고 뒤틀린 당신을 찌르고 있다. 그것에 큰 의미는 없다.
나와는 다른 존재기 때문이다.
실상은 양립된 존재인 나.---.당신 사이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이에 존재하는 건, 손을 뻗어 손가락을 가볍게 흔들면 사라져 버릴, 아지랑이처럼 일렁일 뿐인 존재다.
하지만 우리는 손을 내밀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을, 믿고 있는 것을 그대로 믿는다.
만져볼 생각은 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을 믿으며, 아, 벽이 존재하구나.
당신은 나와 다르구나, 라며 벽의 존재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모든 것은 신기루에 불과하다.
나.---.당신.
그 사이의 거리도. 둘이 믿는 것도. 모두 바람을 불면 흩어져버릴 비눗방울에 불과한 신기루이다.
우리가 그것이 있다고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대하기에, 신기루가 그곳에 존재하고 있다.
그렇게 탄생하게 된 신기루가 서로를 왜곡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신기루를 없애는 방법은 간단하다. 손을 내밀고 휘저으면 된다.
우리가 신기루라는 벽을 뚫고 상대에게 손을 내미는 순간,
차가운 나.---.뜨거운 당신.
그 둘은 얽히고, 차가움과 뜨거움이 섞여, 누군가를 품어줄 수 있는 적당함이 될 수 있다.
신기루가 사라지고, 상대의 맨얼굴을 보게 된다면, 우리는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다.
나와 상대가 닮았다는 사실을. 상대도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나.---.당신.
둘이 신기루 없이 마주 본다면,
그제야 우리는 서로에 관한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당신.
둘 사이의 거리가 사라진, 우리를.
글을 쓰는 나.--.글을 읽고 있는 당신. 우리 사이에도 신기루가 존재할 수 있다.
존재한다면, 내 생각에는 우리 사이의 거리는 적어도 스페이스 바 세 번의 거리보다는 가까운 것 같다.
음. 아마 두 번 정도 같다.
이 거리는 누군가는 멀다 할 수도, 누군가는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뭐든지 생각하기 나름이다.
단지, 내가 자연스럽게 툭 던져 보고 싶었던 말은,
우리의 거리가 이 자리에서의 만남으로,
스페이스 바 두 번의 정도의 거리보다는 가까워질 수 있길 조심스레 바라본단 얘기였다.
분명, 이 거리가 가까워지는 방법도 가지각색일 것이다.
한 번에 일시불로 계산해도 되고, 3개월 할부로 야금야금 계산해도 되고.
계산 방식은, 각자가 원하는 방식에 맡기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