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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ibooks Feb 04. 2018

[남매의 집]

감독이 집요한 창작자일 때 일어날 수 있는 일

보고 나면 유독 생각이 많아지며 할 말이 쏟아지는 영화가 있다. 그런데 주로 생각과 말의 무게가 버겁게 느껴지는 영화는, 모든 스토리 라인과 설정이 잘 자리 잡혀 있어 이해가 술술 가거나 한 마디로 명확히 설명되는 종류의 영화는 아니다.



남매의 집

며칠 전, 어디선가 조성희 감독의 인터뷰를 부분적으로 접하게 되었다. ‘20세기 소년’, ‘신세기 에반게리온’ 등 일본 애니메이션과 만화를 좋아하며, ‘남매의 집’이라는 영화를 만들었다고 했다. ‘남매의 집’은 어디서 많이 들어본 제목인데, 내가 전에 봤던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나중에 찾아봐야지 했었다. 그러다 어제는 갑자기 카카오티비 독립영화관의 스페셜 픽 코너에서 ‘남매의 집’을 상영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어, 다시 감상하게 되었다. 언제 처음, 어떤 계기로 보게 되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내가 기억하는 그 영화가 맞았다.


‘남매의 집’을 처음 본 후, 이상하게도 감독의 이름이 기억에 남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단 어린 배우들의 연기와 치밀하고 밀도 있는 연출이 고도의 긴장감을 갖게 만들었다는 점, 상황을 잘 알 수가 없어서 다른 설정들을 자꾸만 추측하게 만든다는 점, 모르긴 몰라도 그 주인공들의 긴장과 두려움이라는 감정선에 이입하게 한다는 점에서 인상적이었다. 


이 영화는, 이미 ‘늑대아이’와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이라는 두 편의 장편 상업영화를 통해 흥행감독 반열에 든, 영화아카데미 출신 조성희 감독의 초기작이다. ‘남매의 집’에서는 한정된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을, 만화적 설정으로 인한 재미요소와 긴장된 호흡으로 이끌어가는 불안한 감정선을 섞어가며 기묘하게 풀어낸다. 이 영화에서 보여지는 이러한 장점들과 함께, 영화를 보며, 제작할 당시를 추측해 보았을 때 우려되었던 점에 대해서도 언급해 보고자 한다.




레퍼런스는 만화와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의 설정에서는 무엇보다 일본 만화나 애니메이션 등에서 보여지는 설정과 세계관을, 골조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은 아니지만 아는 사람은 알 정도로 짜임새 있게, 그리고 캐릭터들의 네이밍 등에서는 상당히 노골적으로 배어 나오도록 표현했다. 그것이 특정 만화에 대한 오마주인지 차용인지 모르겠으나. 웃음을 주는 요소이기도하고, 자신이 그 일본 애니 등의 문화에 대한 애착이 있다는 사실을 밝히는(=덕밍 아웃) 것으로도 보인다. 예를 들어 극 중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구교환 배우의 배역 명은 ‘라오우’인데, 이 캐릭터는 일본 만화 '북두신권'에 나오는 캐릭터 이름과 동일하다. 추측이지만, 배우들에게도 출연을 요청할 때에, 그런 만화 캐릭터 등의 설정이나 성격 등을 레퍼런스 삼아 연기를 부탁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모른다=두렵다

이 영화를 끌어가는 주된 모티브가 되는 것은 감정이고, 그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감정은 두려움이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우리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아이들은 아빠가 언제 돌아오는지 모르고, 관객은 그 아이들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 우리는 아빠에 대한 정보가 없다. 아빠가 어딜 갔는지, 왜 빨간펜 선생님을 기다리라고 하는지, 그 말이 암호인지 뭔지, 얼마나 돌아오지 않은 건지 모른다. 게다가 남매는 밖의 사람들이 그렇게 무서운데, 딱 들어도 당연히 거짓말인 "물만 마시고 가겠다"는 말에 문은 대체 왜 열어주었는지도 모르겠고, 현관문 문고리는 왜 안쪽에서 걸어 잠글 수도 없게 열쇠 구멍이 안으로 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러면 안된다는 법도 없고, 현실 세상에서도 부조리나 이상한 장면은 수없이 많지만, 이 영화 안에서는 그런 부조리를 세밀하게 조합하여 낯선 두려움의 공간을 설계해낸다.


게다가 집 안으로 들어온 그들은 뭔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인간의 행동양식과는 달리 행동하며, 어쩌면 무언가 중요한 비밀을 숨긴 채 어색한 연기를 하는 것 같다. 우리와 비슷한 주변의 사람들이 맞는 듯 아닌 듯 헛갈린다. 이름도 이상하고, 몰골도, 하는 행동도, 감정표현도 이상하다.

그들이 들어오기 전이나 후나 남매는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들이 거의 없으며, 그들이 들어오기 전부터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집 안에 갇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공간을 점령당한 남매는 철저한 약자가 된다. 동생은 그들이 이상하다거나 나쁜 짓을 할 수 있다는 것 정도도 모르고 있고 그게 더 무섭다. 오빠는 나도 약하고 무서운데 동생도 지켜야 한다.


결국 남매 중에서 ‘여자분’이라고 불린 동생은, 오빠인 '남자분'의 극단적 두려움으로 인해 뱉은 한 마디 말로 그 공간을 잠시 떠나게 된다. 그리고 납치할 차에 자리가 없다는 허망한 이유로 돌아온다. 이것은 개그의 요소일까? 그 사이에 동생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을지, 관객들 그리고 오빠는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 그곳에 다녀온 동생 외에는.


우리는 영화 내의 설정이나 내용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다는 점에서, 영화를 보며 낯섦, 두려움, 공허함을 느끼거나, 어떤 사실은 차라리 몰라서 다행이라며 안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안도에는 어쩌면 어린아이가 굳이 설명하지 않는 수많은 가려진 일들에 대해서도 '별 일 없을 것이다'라는 안이한 마음이 조금은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걱정되고 두려워도, 잠식되지 않고 더 치밀하게 알아내고 캐물어야 하는 집요함이 우리 모두에게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감독의 의도가 아닐지라도 말이다. 모니터 밖에서 관망하고 있는 나조차도 주인공들의 무기력함에 무너져버릴까 봐 두려워졌다.



안과 밖

제목처럼 이 영화는 '남매의 집'에서 일어나는 일이므로 집 바깥 공간이라고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동생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끌려간 이후에도, 바깥을 비추지 않는다. 카메라는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동생을 위험으로 내몰았다는 죄책감에 멍해진 오빠의 표정을 잡느라 바쁘고, 관객들은 이미 죽은 멸치를 잘게 잘게 식칼로 써는 장면을 보며, 우리가 늘 먹는 볶음멸치일 뿐인데 이 장면이 왜 이렇게 잔인하게 보이는 건지 생각하는데 온 신경을 쓰게 만든다. 


돌아온 동생을 우리는 이전까지와는 다른 느낌으로 바라보게 된다. 여태까지 나서본 적 없는 금기시 된 밖에 다녀왔다. 동생은 이제 오빠가 모르던 것을 보았고 그곳에 대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밖에 나가는 것이 금기시 되었다는 것은 하나의 설정일 뿐인데, 그 설정은 영화 내에서 목소리로만 존재하는 아빠가 제시한 금기이다. 게다가 오빠는 들어온 사람들에게 '데려가라'고 했기에, 자신이 데려가도록 허락했단 사실을 동생이 알던 모르던 간에 이제까지 유지되던 남매 사이의 결속은 사라졌다. 오빠는 보냈고 동생은 다녀왔으며, 오빠는 모르고 동생은 겪어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런 동생을 오빠는 두려워하며, 관객들도 여동생이 겪은 일을 모르므로, 아마도 계속 찜찜한 죄책감을 가진 채 두려워 할 것이다. 목소리뿐인 아빠가 그토록 당부하며 지키려고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문을 열어주어서도 안되고, 나가서도 안된다는 금기를 깬 사람은 오빠인가 동생인가.

 


감독과 배우

이미 만든 지 한참 지난 영화지만, 촬영 시점에서 걱정이 되는 사안이 있다. 방문객들에게 ‘여자분’으로 불리운 그 동생 역할의 아역배우가 아주 어려 보였는데, 극중 한 캐릭터가 5살짜리 동생을 '물오른 여자'라고 일컬으며 성적 대상화하는 장면이 나왔다는 점이다. 

나도 애니메이션을 전공했으니, 오타쿠 문화나 일본 만화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만화적 요소, 개그나 유머라고 한다 해도, 실제 살아있는 사람이자, 특히 어린 여자아이인 배우에게 이런 연기를 감내하게 했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아니 오히려, 그런 장면을 개그로 소비하고 만화적 연출 요소로 삼았다는 점이 더욱 걱정된다.


또한 오빠 역의 배우 역시, 지속적인 두려움의 연기로 인해 탈진이나 하지 않을까, 연기력을 칭하기 이전에 이 아역 배우가 성장해가면서 어떤 트라우마가 생기는 것은 아닐까, 앞으로도 연기를 하고픈 생각이 들까 걱정되었는데, 이 배우의 경우는 계속 영화 출연을 하고 있는 것을 검색을 통해 알게 되었다.


사실 만화나 애니메이션의 수많은 장점 중 하나는, 실사 영상에서 물리적으로 사용할 수 없는 장면들을 더 다채롭게 구현해낸 다는 점이다. 가끔은 한 명의 재주나 능력, 아이디어, 그림실력으로도 제작 가능하기도 하고, 수많은 사람이 매달려 제작해낸 결과물일 때도 있다.

때로는 인간 배우를 기용하여 찍는 것이 가장 수월할 때도 있다. 실사 영화에서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구체적 설정과 세계관, 특정한 분위기를 차용해내고 그것을 그럴듯하게 구현해 내는 것 또한 대단하고 멋진 일이다. 제작자인 내가 성공한 덕후의 느낌이라 기쁘고, 그런 설정을 알아보는 관객들도 기쁘고, 원작자에게도 기쁨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애니메이션과 달리 영화에서는 실제 연기를 해야 하는 배우가 있고 배우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어선 안된다. 배우의 인권에 대해서는 요즘에 많은 이슈들이 있어왔다. 일일이 언급하기엔 너무 많고, 간단히 언급하기엔 너무나 중대한 사건들이다. 영화감독과 제작자들은 다른 사람의 신체적, 감정적, 정신적 노동을 통해 작품을 완성하는 만큼, 연기자를 어떤 방식으로 대하는지 스스로 점검해보면 좋겠다. 


굳이 우리가 애니메이션과 실사영화를 포함한 미디어나 콘텐츠를 만들어 사람들 앞에 내어놓는 이유는, 타인에게 고통이나 트라우마를 안기기 위해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때로는 어떤 고통의 감정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재연하는 것이 창작자의 1차적 목표일 수 있다 해도, 그것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나 최종적 목적 자체가 되어서는 안된다. 게다가 일련의 제작 과정에서 배우나 스텝들에게 고통을 주는 시스템이 반드시 포함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영화 등 창작을 하기 위해서는 원하는 이미지를 구현해 내기 위한 집요함이 필요하고, 그를 위해 연기자의 감정을 이끌어내는 것이 필수적이겠지만, 그것을 사람에게 무감하게 적용해서는 안된다. 많은 영화감독들과 제작자들이 이런 사실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연기자들의 뛰어난 연기력이 꼭 필요한 바로 그 시점에 항상 기억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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