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아무것도 안 했는데. 왜 이런 불운이 일어났지?"라는 질문의 유효성
"신문에서 봤어.", "티브이에서 그렇게 말하던데."
이런 말들은 인터넷 시대 이전에 사람들이 자신의 주장에 확실성을 더하는 매직 문장이었다. 신문이나 티브이는 절대적 권력을 가졌고, 이들이 거짓말을 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매체들이 워낙 다양해졌고, 그중 내가 좋아하고 믿는 것이 곧 진실이 되는 세상이 되었다.
객관적인 사실과 절대적인 진리를 전제하는 플라톤의 이데아적 세계는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단일한 세계는 종말을 고하고, 이제 삶의 중심을 잡아주던 기초적인 믿음마저 쉽게 깨지는 다원적인 사회가 도래하고 있다. 절대적이라고 믿었던 성별의 경계마저도 해체되는 시대이다.
이제 개인들은 각자 자신의 믿음을 알아서 찾아 나가야 한다. 성실함의 미덕만으로는 삶을 헤쳐나가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시리어스 맨>의 심각한 남자, 래리 고프닉(마이클 스툴바그)은 어느 날 잔잔했던 일상이 조금씩 균열하는 상황에 부닥친다. 래리는 물리학 교수이자 아빠이자 남편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며 살아왔다. 적어도 자신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결혼 생활의 위기, 자녀 문제, 직업적 위기, 제자 문제 등이 한꺼번에 터진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왜 이런 문제들이 터졌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해답을 얻으려고 고군분투한다.
코엔 형제 감독의 2009년 작품인 <시리어스 맨(Serious Man)>은 '심각한(serious) 남자'가 '심각한 해답(answer)'을 찾는 이야기이다.
'시리어스 맨'을 '심각한 남자'로 할지, '진지한 남자'라고 할지 잠시 고민해 보았다. 일상에서는 '심각함'과 '진지함'을 혼용해서 쓰기도 하지만, 이 글에서는 둘의 의미를 엄격하게 구분해보려고 한다.
래리는 심각하지만 진지하지는 않은 것 같다. 래리의 심각함은 오히려 진지하게 해답을 찾는 것에 방해가 되고 있다.
목차는 다음과 같다.
1. '진지함'이란 무엇인가?
2. 래리의 질문은 유효한 것인가?
3. 해답을 찾는 것이 가능한가?
첫 장면의 에피소드는 관객을 당혹스럽게 한다. 이어지는 메인 이야기와 별 접점도 없이 뜬금없이 삽입된 느낌이다. 영화가 끝나도 첫 에피소드는 시원하게 해석되지 않는다. 그래서 영화는 더욱 난해하게 느껴진다.
영화는 동유럽 어느 곳의 이디시어로 된 설화로 시작된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코엔 형제가 적당한 것이 없어서 임의로 창작한 내용이라고 한다.
눈이 펑펑 내리는 밤에 남편은 명성이 자자했던 랍비를 우연히 만나서 그를 집에 초대한다. 남편이 집에 돌아와서 그 이야기를 하자, 아내는 랍비가 3년 전에 죽었다는 이야기를 똑똑히 들었다고 말한다. 남편은 그럴 리 없다며 자신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고 주장한다.
그때 마침 랍비는 집으로 찾아오고, 아내는 그 랍비를 악령이라고 확신하며 얼음송곳으로 찌른다. 랍비는 피를 흘리며 눈 오는 바깥으로 사라진다. 남편은 사람을 죽였다고 두려워하고, 아내는 악령을 물리쳤다며 의기양양해한다. 두 사람 중 누구의 판단이 옳은 것인가?
영화에는 두 가지의 상반된 증거가 나온다. 랍비는 배부르다며 수프를 거절했는데 아내는 유령은 먹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이 유령인 증거라고 한다. 그러나 그 반대 증거로, 얼음송곳에 찔린 그의 가슴에는 피가 흘렀다. 진실은 알 수 없는 채로 끝난다.
'진지(眞摯)함'이란 진실을 꽉 잡는 것이다. 가짜가 아닌 진짜 사실에 근거해서 살고자 하는 것이므로, 진지함은 진실을 얻기 위한 성실한 노력이다.
그러면 인간의 마음은 진실을 어떻게 획득하는가? 잠깐 화제를 돌려, 요가 철학의 기본 경전인 <요가 수뜨라>에서 힌트를 얻어보자.
<요가 수뜨라> 1장 6절에서는 우리의 마음이 작용하는 방식으로 다섯 가지를 든다. 바른 지식(pramāṇa), 착각지(viparyaya), 분별(vikalpa), 수면(nidrā), 기억(smṛti)이다. 우리가 보고 듣고 경험하여 감각과 마음을 통과하는 모든 작용은 이 다섯 가지 그룹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이들은 의식의 모든 활동을 이론적으로 나열한 것이라기보다는, '마음 작용의 정지'라는 요가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실제적인 필요에 따른 분류이다. 수행자는 요가를 통해 이 다섯 가지의 마음 작용을 넘어설 수 있게 된다. 그 상태를 '삼매(Samādhi)'라고 지칭한다.
이 중 '바른 지식(쁘라마나)'은 타당한 근거가 있는 인식, 사실, 진실을 말한다. 진지함은 바른 지식을 획득하기 위한 태도라고 할 수 있다.
1장 7절에 의하면, 바른 지식은 세 가지 원천, 즉 감관지(pratyakṣa), 추리지(anumāna), 전승지(āgama)에 의해 얻어질 수 있다.
'감관지'는 다섯 가지 감각에 근거한 직접적 지식이며, '추리지'는 추론에 의한 간접적 지식이며, '전승지'는 과거로부터 전승된 경전이나 성자의 가르침, 신의 목소리 등이다.
현대에 우리가 가장 신뢰하는 것은 감관지, 즉 감각적 증거이다. 대체로 "내가 직접 봤어.", "내가 그렇게 들었어."라고 하면 강력한 증거로 인정된다. 성서에서 의심 많은 제자로 나오는 도마도 부활한 예수를 직접 보고, 상처를 만져보고 비로소 믿게 된다.
그러나 <시리어스 맨>은 감각적 정보나 감각에 근거한 추론이 믿을만하지 않음을 계속 암시한다. 우리의 선입견에 의해 감각은 쉽게 조작되기 때문이다.
첫 에피소드에서 남편은 먼저 살아있는 랍비를 만났기 때문에 랍비가 살아있다는 선입견을 품고, 랍비가 이미 죽은 사람이라는 정보를 나중에 들었다. 반대로 아내는 랍비의 죽음에 대해 미리 들은 상태에서, 나중에 살아있는 랍비를 목격한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이 먼저 받아들인 정보에 기초해서 눈앞의 상황을 해석한다. 똑같은 상황을 목격하고도, 각자의 선입견에 따라 남편은 랍비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아내는 악령이라고 추론한다.
첫 에피소드가 황당하게 끝나고 나면, 영화의 본편은 귀와 눈이 교대로 클로즈업되며 시작한다. 아들 대니는 수업시간에 이어폰을 끼고 있다. 대니는 알아듣지 못하는 히브리어에 흥미를 못 느낀 채 아예 귀를 막고 음악을 듣고 있다. 같은 시각, 아빠 래리는 의사에게 귀와 눈을 검진받고 있다.
두 사람 모두 물리적인 귀의 기능은 정상이지만, 이들이 귀로 들리는 소리의 의미를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환청을 듣거나 신기루를 보는 것처럼 때때로 감각은 우리를 속이기도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많은 경우 귀가 있지만 듣지 못하고, 눈이 있지만 보지 못한다. <시리어스 맨>의 모든 대화는 일방통행식이다. 상대방의 말은 전혀 흡수되지 않고, 각자 자기 차례에 자기 말을 던지기에 급급하다.
감관지 외에 '바른 지식'을 획득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전승지(아가마)'이다. 진리를 직접 본 성인이나 믿을만한 사람의 말을 기록한 경전에 의해 진리를 인식하는 작용이 전승지이다. 전승지는 권위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하므로 믿음이 중요한 관건이 된다.
과거의 전승지는 주로 종교 경전에서 얻어졌다. <시리어스 맨>의 배경은 정통 유대 공동체이므로 영화에서 '전승지'는 랍비들의 말씀으로 상징된다. 현대에는 각종 이데올로기와 도그마들이 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래리는 자신의 감각적 정보와 추론만으로는 바른 지식을 얻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전승지를 체화하고 있는 랍비를 통해 신의 목소리를 듣고자 하지만 연속되는 좌절을 맛본다. 바른 지식은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래리를 통해서 '인간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알 수 있는가?'라는 화두를 던져 볼 수 있다. 과연 심각한 남자, 래리는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단지 영화를 너무 심각하게 보는 것인가?
타로 카드 등으로 점을 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질문이다. 얼마나 적확한 질문을 하는가에 따라 해답의 질도 달라진다. 래리는 과연 참된 질문을 했을까?
1967년 미국. 유대인 거주 소도시에서 래리는 물리학 교수이며 두 자녀를 둔 아버지이다. 학생들의 반응에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진행하는 자신의 물리학 수업처럼 그의 삶도 다소 일방통행식이다.
그는 어느 날 일상이 조금씩 어그러지는 것을 눈치챈다. 큰 불행이라기보다는 평범한 불운들이 몰려와 그를 괴롭힌다.
자신의 친한 친구와 아내는 외도하고 있었고, 그들은 오히려 당당하게 래리에게 이혼을 요구한다. 심지어 래리더러 집을 나가서 모텔에 묵으라고 권한다. 이렇게 당당한 외도는 처음 본다.
F 학점 받은 한국 유학생은 뇌물을 주며 협상을 시도한다. 학생의 아버지도 당당하게 래리에게 고소하겠다고 협박한다. 한국식 영어 발음과 뇌물문화를 꽤 실감 나게 묘사했다.
마약 하는 아들과 성형수술 하고 싶어 하는 딸 문제뿐만 아니라, 그의 종신 교수직도 흔들거린다.
더 사소한 불운들도 넘쳐난다. 경계를 넘어와서 남의 집 잔디를 깎는 이웃(심지어 이 아저씨는 좋은 사람이다.), 계속 말썽인 TV 안테나, 사고 치는 동생, 구독하지도 않는 레코드의 배달, 이웃집 여자에 대한 성적 환상까지.
영화는 래리의 이야기와 대니의 성인식을 둘러싼 이야기가 병렬적으로 진행된다. 아들 대니는 기도문을 암송하여 성인식을 치러야 하는 압박감에 시달리는 한편, 몰래 마약에 손을 대고, 돈을 갚지 못해 동급생을 피해 다닌다.
래리가 인지하기 이전부터 크고 작은 일들은 내외적으로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래리만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이다.
이 모든 일에 대한 래리의 첫 반응은 "내가 어쨌기에? 난 아무 짓도 안 했어."이다. 번역하면, "착한 나에게 왜 이런 불운이 일어난 거지?"이다.
래리의 이 질문은 유효한 것인가? 참된 해답을 얻을 수 있는 질문인가?
래리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 성실하지만 맹목적인 태도로 해결책을 찾으려 한다. 아내가 요구하는 이혼 서약서인 '게트'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그것을 얻으려 한다. 아무도 이 게트의 정체를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것이 코미디이다.
해답을 구하기 위해 저명한 랍비 마르샥에게 만남을 청하지만, 랍비를 만날 기회를 좀처럼 얻지 못한다. 대신 다른 두 명의 젊은 랍비를 차례로 만나지만, 수수께끼 같은 선문답만을 듣는다.
래리가 수업 시간에 거대한 칠판에 한가득 써서 증명한 물리학 공식은 아무것도 확정적이지 않다는 '불확정성의 원리'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삶도 불확정성의 원리에 적용받고 있다는 것은 모른다.
삶은 래리의 물리학 공식으로도, 동생 아서가 만들고 있는 삼라만상을 설명하는 가능성의 지도인 '멘타쿨루스'로도 풀 수 없다. 도박을 예측하는 데 쓸 수는 있지만, 삶을 예측할 수는 없다.
영화는 표면적으로 보면 래리가 삶을 제자리로 되돌리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을 따라간다.
래리는 결국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받아들이며 하나씩 처리해 간다. 아들의 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되어 버린다. 대니는 성인식을 성공적으로 해냈고, 동급생의 위협 같은 자잘한 일들은 갑자기 토네이도가 일어나면서 그냥 사라져 버린다.
래리는 이제 "그래 그까짓 게 뭐 대수라고. 살아있는 것이 기적인데."라는 마음으로 모든 일을 받아들이게 된 것 같다. 그는 학생들의 성적을 적은 노트를 한참 보다가, 한국 유학생의 F를 C로 고친다. 그리고 소심하지만 결연하게 마이너스(-)를 붙임으로써 타협을 마무리한다.
이때 코엔 형제는 다시 한번 우리의 뒤통수를 거하게 친다. '이것이 바로 코엔 스타일이다!'라고 천명하듯.
인간사의 이런저런 일들이 순조롭게 마무리되려는 시점에, 예상치 못한 토네이도가 일어나고, 래리는 주치의로부터 매우 불길한 전화를 받는다. 이제까지 상상도 못 했던 종류의 재앙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을 암시하며 영화는 가차 없이 끝난다.
래리는 랍비 마르샥을 계속 만나고 싶어 했지만 못 만나고, 대니가 의도치 않게 랍비를 만난다. 지혜의 살아있는 상징처럼 보이는 랍비가 대니에게 한 말은 단지, "착한 아이가 되어라(Be a good boy)."이다.
신비스럽게 보이는 랍비들은 모두 페이크였다. 이들은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다. '스승의 주먹(師拳)'과 같은 비밀 가르침 따위는 없다. 스승이 움켜쥐고 있다가 눈감을 때 자신의 애제자에게만 전한다는 며느리도 모르는 비법.
해답은 영화가 시작할 때 이미 제시된다. 코엔 형제는 유대계 성서학자인 라시의 격언을 가져온다.
Receive with simplicity everything that happens to you. - Rashi -
당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단순하게 받아들여라.
보통 문제를 먼저 보여주고 그다음에 해답을 제시하는 것이 자연스러운데, 왜 엔딩 크레딧이 아니라, 이야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첫머리에서 해답을 제시했을까?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래리가 만난 두 번째 랍비는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신비스러운 치아 이야기를 한다. 대니가 만난 랍비도 그가 만난 모든 아이에게 똑같이 "착한 아이가 되어라."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가까이서 보면 모든 불행은 유니크하지만, 시야를 넓게 가지면 모든 행불행은 거기서 거기다. 그래서 해답도 거기서 거기다.
우리가 해답을 눈앞에 두고도 찾지 못하는 이유는 시야가 심각하게 좁기 때문이다. 우리는 광대한 우주에 비하면 먼지의 먼지도 안 되는 존재임에도, 자기를 중심에 놓고 세상을 본다. 마치 패기만만한 중세 시대 학자들이 지구를 중심에 놓고 우주를 보던 것처럼.
우주는 끊임없이 움직이며 변화한다. 우주의 이치를 한마디로 하면 '변(變)'이다. 낮과 밤, 빛과 어둠이 교차하듯, 좋은 일과 나쁜 일도 교대로 발생한다. 창조와 파괴, 삶과 죽음은 우주가 작동하는 방식일 뿐이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은 자신이 개입하여 스스로 만들기도 하고, 복잡한 인과율에 의해 그저 생기기도 한다. 한 방울 한 방울 조건들이 쌓여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모든 원인을 우리는 도저히 알 수 없다. 어디까지가 나의 책임인지 규명하는 것은 법률적으로만 가능할 뿐이다.
죽음과 파괴와 같은 나쁜 일이 자신에게 일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특별하게 볼 이유는 없다. 우주의 입장에서 보면 만물은 제사 때 잠깐 쓰고 버리는 풀강아지와 다름없다.
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천지불인 이만물위추구)
천지는 인(仁)하지 않다. 만물을 풀강아지처럼 여긴다.
- 도덕경(道德經) 5장 -
자기를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에고는 늘 심각하다. 에고는 자신에게 불운이 일어나면 원인을 알고자 하지만, 행운이 오면 원인이 궁금하지 않다. 당연히 내가 받아야 할 것을 받았다고 여긴다.
나의 모든 행운은 남의 불운에 기초한다. 내가 일등했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성적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내가 돈벼락을 맞았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파산했다는 의미이다. 국가 경제에서 통화량을 일정하게 관리하듯이 우주의 행불행의 총합은 늘 일치한다.
"착한 나에게 왜 이런 불운이 일어났지?"라는 질문은 "못된 나에게 왜 이런 행운이 일어났지?"와 동일한 것임을 깨달을 때 래리는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선행에 대한 보답이 즉각 돌아오지 않듯, 악행에 대한 처벌도 즉각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주의 복잡미묘한 인과율을 인간은 알 수 없다. 그러면 겸허히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단순하게. 유머를 한 스푼 섞으면 더욱 좋다.
삶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은 단순함(simplicity)과 유머이다.
심각함은 자기중심적이고 근시안적인 태도에서 나온다. 진지함은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태도이다. 여기서 단순함과 유머가 나온다.
단순함과 유머를 갖춘 사람은 <다크 나이트(Dark Night)>의 조커가 "왜 그렇게 심각해(Why so serious)?"라고 물어도 당황하지 않을 수 있다.
조커는 심각함이 극에 달하여 반동 형성이 이루어진 인물이다. 그는 자신이 내팽개쳐진 풀강아지라는 것을 깨닫고,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다 파괴해 버리겠다고 결심한다. 그러나 이것은 또 하나의 자기중심적인 근시안적인 해결책일 뿐이다.
랍비는 단지 "착한 아이가 되어라(Be a good boy)."라고 말한다.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계(戒)를 지키는 삶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다. - 생명을 해치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고, 남의 것을 훔치지 않는 것. 그리고 사랑하는 것.
나머지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단순하게 받아들이면 된다.
영화의 시작과 끝을 관통하는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노래는 심각함에 대한 해독제로써 사랑이 필요함을 말한다. 첫 장면에서 데니가 듣던 노래를 랍비 마르샥이 세상에서 가장 느린 랩으로 노래한다.
Somebody to Love (by Jefferson Airplane)
When the truth is found to be lies
And all the joy within you dies
Don't you want somebody to love?
Don't you need somebody to love?
믿었던 진실이 거짓으로 드러나고
네 안의 모든 기쁨이 사라지면
너는 사랑할 사람을 원하지 않겠니?
사랑할 사람이 필요하지 않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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