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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프터썬 | 상처는 죄책감으로 대물림된다.

['내면의 아이'로부터 기억의 파편은 불쑥 떠오른다.]

by 아닛짜

어린 시절에는 서른 살 넘은 사람들은 모두 나이가 아주 많은 어른처럼 느껴졌다. 나와는 뭔가 다른 세상 사람들이며, 어떤 문제를 가지고 끙끙대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어른의 삶은 확실한 무엇이 있으리라 기대했다.


나이 들어서야 나를 키운 부모와 가르친 선생들도 그 당시에 역시 애였다는 낯선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도 자신만의 문제에 허덕이며, 불확실한 길을 한 걸음씩 내디디고 있었을 뿐이다.


<애프터썬>의 11살 소피가 바라본 아빠는 무려 130살이며 이틀 뒤면 131살이 된다. 아이에게 부모는 수백 년을 산 영험한 마법사처럼 자신의 모든 필요를 충족해 주는 존재이다.


사람들은 신나게 놀다가 지치면 시원한 나무 그늘이나 누울 수 있는 언덕을 찾는다. 마찬가지로 아이에게 부모는 커다란 나무나 편안한 언덕과 같이 와서 쉬는 곳이며, 나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해결사인 것이다. 아이가 그들을 먼저 생각하거나 배려하는 관계가 아니다.


<애프터썬(Aftersun)>은 샬롯 웰스(Charlotte Wells) 감독의 2022년도 작품으로,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다. 소피는 이혼한 아빠와 튀르키예로 휴가 여행을 온다. 영화는 이들이 여행지에서 머문 며칠 동안의 짧은 이야기이다.


제목인 '애프터썬'은 햇볕에 탄 피부에 바르는 선크림을 뜻한다. 햇볕에 타기 전에 미리 바르는 '선블록'이 아니라 사후에 바르는 크림이다. 영화의 제목에서부터 어떤 상처가 느껴진다.


햇볕만큼 이로우면서 동시에 파괴적인 것이 없다. 태양이 지구에 조금만 가까웠거나, 조금만 더 멀었다면 지구상에 어떤 생물도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적당한 햇볕은 이롭지만, 과도하게 노출되면 피부에 심각한 상처가 생긴다. 부모의 사랑은 햇볕과 비슷한 것 같다. 너무 적으면 창백해지고, 너무 많으면 타버린다.


휴양지에서 캘럼(아빠)이 소피에게 발라주는 것은 아마도 선블록인 것 같다. 그는 소피가 상처 입지 않도록 예방 크림을 열심히 발라주지만, 결국 소피도 상처를 피하지 못한다. 아빠의 상처와 소피의 상처는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장한 소피는 캠코더에 남아있는 아빠의 영상을 보며 자신의 상처에 스스로 애프터썬을 바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감독은 영화 만들기를 통해 치유 의식을 하는 것이 아닐까. 영화를 보고 나서 나도 모르게 치유 의식에 동참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목차는 다음과 같다.

1. 부모의 상처는 자식의 죄책감이 된다.
2. 상처는 '내재과거아'를 통해서 대물림된다.
3. 내재과거아를 치유하는 법




1. 부모의 상처는 자식의 죄책감이 된다.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최악의 상처 중 하나는 죄책감이다. 부모는 자식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애를 쓰지만, 자신의 치유되지 못한 상처는 의도치 않게 자식에게 죄책감으로 전이된다.


아빠는 휴가를 마치고 딸을 공항에서 배웅하며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웃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딸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는 급속도로 무너져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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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딸을 공항에서 배웅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캠코더를 찍었다. 그리고 그는 하얀 벽 너머로 사라진다. 하얀 벽과 문은 소피가 다시는 아빠를 보지 못하게 되었음을 암시한다.


소피는 당연하게 여겼던 존재가 사라졌을 때의 상실감을 아마도 평생 회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영화에서는 소피가 당시의 아빠와 같은 나이인 서른한 살이 되어서 예전의 캠코더 영상을 보는 장면이 나오지만, 내가 보기에 소피는 매년 영상을 보고 또 봤을 것 같다. 후회하고 자책하며. '내가 이것을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이렇게 했더라면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면서.


많은 부모가 두려워하는 것은 자식이 자신의 잘못된 전철을 밟는 것인 듯하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약한 모습을 자식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하지만, 그 과정에서 새어 나오는 비일관적이고 부조화한 모습은 자식들에게 일그러진 기억을 갖게 한다.


캘럼은 깊은 우울함에 빠져 있지만,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딸과의 휴가를 즐겁게 보내려고 최선을 다한다. 스스로 극복하기 위해 태극권이나 명상 등도 해보지만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딸과 아빠의 서로 다른 세계.jpg 소피는 방 안에 앉아 잡지를 보고 있고, 아빠는 욕실에서 깁스 풀려고 낑낑대다 피를 흘린다. 그들은 가까이 있으면서도 서로의 상황을 알지 못한다.


어린 딸은 아빠의 그런 사정을 전혀 모른다. 그러나 아빠의 우울감은 마치 잉크가 물에 스며들듯이 소피를 적신다. 소피는 재미있게 노는 것 같지만, 영화에서 소피는 이상하게 무료하고 우울해 보인다.


소피 : "모르겠어. 약간 우울한 거 같아. 그런 기분 있잖아. 그냥. 아주 근사한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더니 지치고 멍한데 뼈들이 제대로 안 움직이는 느낌. 몸에 힘이 없고 그냥 다 지쳐서 가라앉는 것처럼 이상한 기분 말이야."

아빠 : "우린 여기 놀러 온 거야."


아빠는 소피의 이런 말을 듣고 속으로 뜨끔했을 것이다. 소피가 자신과 똑같이 느끼고 있다는 사실에 당황하며 서둘러 유쾌한 척을 한다.


자식은 무의식적으로 부모를 모방하는 경향이 있다. 부모와 같이 되어서 사랑받고 싶은 것이다. 소피는 아빠의 태극권을 보고 이상한 움직임을 또 하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아빠의 동작을 따라 한다. 그리고 우울증까지 전염되어 버린다.

태극권따라하기.jpg 소피는 아빠의 태극권을 이상하다고 하면서도 어설프게 따라 해 본다. 그러나 기마 자세가 전혀 안 돼 있다.^^


바둑을 좋아하는 아빠를 둔 나는 어렸을 때 바둑을 배우려고 꽤 노력했다. 그러나 아빠에게 바둑을 가르쳐달라고 하거나 아빠와 바둑을 둔 기억은 한 번도 없다. 나중에 나는 바둑에 소질도 흥미도 전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ㅠㅠ


소피는 호텔 수영장의 썬베드에 아빠와 나란히 누워서 말한다.


소피 : "같은 하늘 아래 있다는 게 좋아... 노는 시간에 가끔 하늘을 올려다보거든. 그러다 태양이 보이면 우리가 같은 태양을 볼 수 있단 사실을 떠올려. 비록 같은 장소에 함께 있진 않더라도 같이 있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같은 하늘 아래 아빠랑 내가 있는 거니까."


아빠랑 같이 있으면서 마치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 이상하다. 게다가 어린아이가 할 법한 말이 아니다. 이것은 아빠가 부재한 지금, 소피의 기억 속에서 삽입된 장면 같다. 실제 일어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옆에 있는 아빠는 못 들은 것처럼 그냥 눈 감고 있는 모습으로 나오는 것이다.


우리의 뇌는 기억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창작하고 편집하는 특성이 있다. 기억은 객관적 사실 같지만 사실은 매우 주관적인 정신 활동이다. 영화의 많은 장면은 캠코더에 담긴 파편적인 영상들이 소피의 현재 감정을 아교로 해서 여러 형태로 가공된 것처럼 보인다.


소피의 회상에는 아빠의 뒷모습이 여러 번 나온다. 마지막 장면도 아빠가 알 수 없는 문을 열고 들어가는 뒷모습이다. 모두 당시의 소피는 볼 수 없었던 장면들이다.


휴가지에 막 도착해서 아빠는 호텔 침대에 소피를 재운 후 베란다에 나간다. 소리가 소거된 채 아버지의 등이 오래도록 나온다. 서른한 살의 소피는 아빠의 뒷모습을 보다 잠이 든다.


또 어떤 순간에는 앉아서 우는 아빠의 처절한 등이 나온다. 어깨와 등은 참 감정적인 신체이다. 소리 없이 말을 한다.


그리움이 깊을수록 소피의 죄책감은 커진다. 그때 나는 왜 아무것도 몰랐을까?


소피의 죄책감은 반복되는 꿈으로 나타난다. 휴가의 마지막 밤에 소피는 아빠의 품에 안겨서 즐겁게 춤을 춘다. 그러나 천진난만했던 그 기억이 현재는 악몽으로 변해있다. 꿈속에서 춤을 추는 아빠의 모습은 자신을 안아주던 다정한 모습이 아니라 고통의 절규와 같은 춤이다.


죄책감은 아빠에 대한 원망을 불러일으킨다. 왜 먼저 가서 나를 저버렸는가에 대한 '원망(怨望)', 또 한편으로는 아빠를 원하고 그리워하는 '원망(願望)'.


<애프터썬>은 묘한 영화다.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나도 어린 소피처럼 모든 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며칠 묵혔다가 리뷰를 쓰는 지금은 서른한 살이 된 소피처럼 모든 장면이 칼날 같은 고통으로 다가온다.




2. 상처는 '내재과거아'를 통해서 대물림된다.


우리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예전에 지나가 버린 '박제된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때의 어린아이는 사라지고 지금의 나와는 다른 존재인 것처럼 느낀다. 다른 성인을 대할 때도 그 사람이 언젠간 어린아이였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그러나 그 어린아이는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지금 내 안에서 살고 있다. 오히려 무럭무럭 자라고 있으며, 현재의 삶에 여러 가지 문제를 유발하고 있다.


W. 휴 미실다인의 책 <몸에 밴 어린 시절(Your Inner Child of the Past)>에서는 이런 내면의 어린아이를 '내재과거아(Inner Child of the Past)'라고 부른다.


많은 정상적인 사람들은 내재과거아로 인해 심각한 장애를 겪지 않더라도, 일상생활에서 갖가지 근심과 피로와 외로움과 내면의 공허함 등을 겪는다.


어린이는 부모를 거울로 하여 자아를 형성해 간다. 부모가 자신에게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를 기준으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간다.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어린 시절의 부모의 태도와 가정의 정서적 분위기를 계속 이어받아서 자신에게 스스로 부모 노릇을 한다.


어른으로서 우리는 대체로 분별력 있고 성숙한 태도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내재과거아는 과거의 가족 관계에서 비롯된 전혀 다른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두 방향이 워낙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왜 내가 생각하는 것과 내가 느끼는 것은 전혀 다르지?", "나는 이것을 바라지 않는데 왜 이렇게 행동하지?"와 같은 물음들을 갖게 된다.


우리는 자신이 거쳐온 어린 시절을 어른이 되어서도 벗어나지 못한다. 그때의 유치한 생각들은 벗어날 수 있겠지만, 그 시절의 감정과 상처에서 헤어 나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상처 입은 감정 덩어리가 바로 내재과거아의 핵심이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내재과거아와 자식을 동시에 돌봐야 하는 어려운 일이다.


튀르키예의 카펫 가게에서 축 늘어져서 앉아있는 캘럼의 모습에서 무기력한 내재과거아가 드러난다. 방치된 아이의 분위기가 풍긴다.


캘럼은 소피가 11살 생일이 어땠는지 묻자 엄마가 자신의 생일을 잊어버린 기억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는 고향인 에든버러에서 한 번도 소속감을 느낀 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곳은 과거일 뿐이야."


캘럼은 방치된 어린 시절을 보냈을 가능성이 있다. 캘럼의 엄마는 하도 바쁜 나머지 자녀의 욕구에 대한 적절한 관심을 보이지 못했을 수도 있고, 여러 가지 다른 사연이 있을 것이다. 미세한 정서적인 방치는 잘 발견되지 않지만, 내재과거아에게 차분히 쌓인다.


캘럼이 돈도 별로 없으면서 비싼 카펫을 사는 것은 예전에 엄마가 잊어버린 생일 선물을 스스로 사주는 행위처럼 느껴진다. 우리가 무언가를 사는 행위의 근원에는 정서적 허기짐을 채우려는 욕구가 숨어있다.

카펫.jpg 캘럼은 카펫 가게에서 축 늘어져서 앉아 있다. 카펫의 복잡하게 반복되는 문양이 그의 정신을 쉬게 해주는 것 같다.


부모의 치유하지 못한 상처는 자식에게 물든다. 물감이 물에 풀어지듯, 부모가 아무리 숨기려 해도 자신의 색이 그대로 자식에게 번져나간다. 캘럼의 카펫이 소피에게로 상속되었듯이, 그의 정서도 이전된다.


<애프터썬>은 상처가 대물림되는 역사의 한 단면을 잘라낸 것 같다. 캘럼은 부모의 상처에 물들었고, 그것은 소피에게 전달되었고, 소피의 상처는 또 그녀가 맺고 있는 관계들에 스며들 것이다.


<몸에 밴 어린 시절>에서는 내재과거아를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치는 부모의 특정한 태도들을 제시한다. 부모의 태도는 완벽주의적일 수도 있고, 강압적이거나, 적절한 통제 없이 방임하거나, 방치하거나 거부하는 등 여러 형태로 자식에게 전달된다.


저자는 우리가 자신의 내재과거아와 관련된 부모의 태도를 확인한다면, 지금 우리를 괴롭히는 일들과 과거의 예속 상태에서 풀려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충고한다.




3. 내재과거아를 치유하는 법


심리학에서는 흔히 부모를 탓하는 경우는 어렸을 때는 위험이 커서 표현할 수 없었던 적개심과 공격 성향을 지속시키는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논리에 수긍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부모가 자신에게 상처를 주고 잘못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확신은 어린 시절을 지속시켜 나가면서, 자신을 무력한 피해자로 간주하게 한다. 부모를 여전히 자신을 상처 입히거나 보호해 줄 전능한 존재로 떠받들고 있는 것이다.


부모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것, 부모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은 주도권을 부모에게 두기 때문에 심리치유에 실패하는 방법이다. 반대로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자신을 과대평가하여 스스로를 괴롭히는 방법이다. 우리는 대체로 이 두 가지 방식을 혼합하여 사용한다.


심리치유를 위해 때로는 심리학을 넘어선 우주적 관점이 유용하다.


불교 철학에서는 모든 존재는 엄정한 인과율에 의해 윤회한다고 말한다. 존재의 원인이 끝나지 않으면 삶도 끝나지 않는다.


정신이 물질에 의해 파생되어서 물질이 해체되면 정신도 사라진다는 주장은 과학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허점이 많은 논리일 뿐이다.


우주의 모든 물질은 해체되고 재조합될 뿐이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조악한 물질 에너지에 비해 더욱 강력한 정신 에너지가 그냥 물질과 함께 소멸된다는 가정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논리적으로 보아도, 우리는 한 생만 살고 사라질 수가 없다.


인과의 법칙이 극적으로 적용되는 지점이 바로 우리가 태어나는 순간이다. 불교 철학에 의하면, 사람의 육체적 목숨이 끊어지고 나면, 삶을 갈망하는 에너지는 자신이 가장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자궁을 찾아서 들어간다고 한다. 이 생에서 갈망했던 모든 것들이 응축되어 다음 생의 첫 시작이 결정되는 것이다.


우리는 가끔 부모에게 왜 나를 낳았냐고 따지기도 한다. 내가 태어나기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고 원망하지만, 사실 내가 선택한 것이라면?


내가 이러한 부모를 만난 것에는 일정한 원인이 있다는 것을 알 때, 그리고 부모와 나는 윤회의 긴 여정에서 깊은 인연으로 만난 동지라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자신의 삶을 진정으로 책임질 수 있다.


영화에는 유독 파란 하늘, 파란 바다, 맑은 허공에서 유영하는 패러글라이딩이 자주 나온다. 하늘의 텅 빈 공간을 한참 바라보면 이상하게 치유 효과가 있다. 복잡한 땅의 사연들을 무화(無化)시키기 때문인 것 같다.


이것이 용서(Forgiveness)가 아닐까? 내가 노력하고 납득해서 용서라는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기억 속에서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것. 용서야말로 가장 완전한 치유의 증거이다. 그러면 소피는 악몽에서 해방되어서 더 이상 캠코더 영상을 보지 않게 될 것이다.


많은 것을 용서할수록 우리는 자유로워진다. 자기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용서할 때 우리는 완전하게 치유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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