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공간, 경험의 조건에 제약된 인간의 우화적 표현]
나는 넷플릭스에서 <카우보이의 노래(The Ballad of Buster Scruggs)>를 우연히 발견하고 망설임 없이 재생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들은 뭔가 2% 부족하다는 느낌이 있었지만, 코엔 형제 감독의 영화라면 믿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섯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영화에서 첫 에피를 보자 명작의 스멜이 느껴졌다. 냉소적 희극을 좋아하는 내 취향을 완전히 저격했다. 마지막 여섯 번째 에피가 끝나갈 무렵 나는 이미 코엔의 3대 명작 리스트에 이 영화를 올려놨다.
내가 맘대로 뽑은 코엔의 3대 명작은 <시리어스 맨>,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카우보이의 노래>이다. 그 외에도 <인사이드 르윈>, <파고>, <바톤 핑크>, <위대한 레보스키>도 빼놓을 수 없다. 언제 이 영화들을 다 리뷰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행복한 피로감이 느껴진다.
이 영화가 각별하게 느껴지는 것은 내가 2019년에 <요가 지도자 과정>을 처음 개설했을 때와 관련된다. 교재를 만들면서 단순히 요가에 국한된 공부가 아니라 '나는 누구인가?'를 탐구하는 통합적 인문학을 지향하려는 거대한(?) 야심을 가졌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을 말로 설명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미 누군가가 잘 만들어 놓은 영화와 소설을 이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 발견한 영화가 바로 <카우보이의 노래>였다.
목차는 다음과 같다.
1.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
2. 두 가지 차원의 경험
3. 모두들 '다르고도 같은 이야기들'을 마치고 잠잠해진다.
3-1> 필멸자의 유해(The Mortal Remains)
3-2> 사신과 세 유형의 인간
'나는 누구인가(Who am I)?', 이 질문에 제대로 답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나는 어디에 있는가(Where am I)?’라는 질문으로 확장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누구(who)’를 알기 위해서는 ‘어디(where)’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내가 세상과 별개로 존재하는 독립되고 고립된 존재라는 것은 환상이다. 우리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떨어져서 한시도 존재할 수 없다. 외부 공기가 없다면 한순간의 호흡조차도 불가능하다.
요한복음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로다.”라는 말이 있다. 가지가 포도나무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듯이, 인간이 세상과 떨어져 홀로 자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조건으로 존재한다. 인간의 삶의 조건을 세 가지로 요약하면 시간, 공간, 경험이라 할 수 있다.
‘시간(time)’은 나라는 유기체가 살아 숨 쉴 수 있도록 주어진 수명(壽命, life-span)이다. ‘공간(space)’은 내가 태어나고 점유하고 활동하는 모든 곳이다. ‘경험(experience)’은 내가 태어난 공간 속에서 주어진 시간 동안 경험하고 느끼는 모든 것, 즉 일어나는 모든 사건이다.
모든 인간의 삶은 특정 시간과 공간에 태어나서 이런저런 활동을 하면서 자신의 주어진 수명을 살다가 가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 세 조건 중 무엇하나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내가 선택해서 능동적으로 경험하는 것 같지만, 그 선택을 하게 한 나의 기질도 사실은 나의 환경처럼 주어진 것이다. 주어진 시간과 공간의 좌표 평면 위에서 이루어지는 제한된 경험의 무더기가 바로 나의 삶의 무늬(文)를 그려낸다.
누구나 이 세 가지 조건의 조합에서 벗어날 수 없으므로 이것은 ‘운명(運命)’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조건적 삶에서 벗어나는 것이 진정으로 자유로워지는 것이며, '깨달음'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주어진 시공간 안에서 펼쳐진 대단히 훌륭한 경험도, 한없이 시시한 경험도 파도에 씻겨나가듯 점차 사라져 간다.
위대한 희극 배우인 찰리 채플린은 "인생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Life is a tragedy when seen in close-up, but a comedy in long-shot)."라고 말했다.
삶의 모든 경험은 관점에 따라 비극이 되고 희극이 된다. 비극은 중대함, 심각함에서 나오고, 희극은 중요하지 않음, 가벼움에서 나온다.
나를 세상의 중심에 놓을 때 중대해지고 비극이 되며, 나의 관점을 탈피했을 때 중요하지 않으며 희극이 된다.
영원불멸을 가정할 때 심각해지고 비극이 되며,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고 죽게 마련임을 받아들일 때 가벼워지고 희극이 된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인간의 경험은 모두 다르고도 같다. 가까이서 보면 다양한 희로애락의 향연이 펼쳐지지만, 시간적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서 보면 모두 같게 보인다. 멀리서 보았을 때 모든 경험을 묶는 단 하나의 공통점은 ‘무상(無常)’하다는 사실이다.
1990년 우주 탐사선 보이저 1호가 태양계를 벗어나면서 지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위치에서 지구를 촬영한 사진을 인류에게 전송했다. 칼 세이건의 기발한 아이디어에 의해 찍힌 이 사진 속 지구의 모습은 ‘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Dot)’이라 불렸다. 그리고 이 사진은 가장 철학적인 우주의 사진이 되었다.
칼 세이건은 자신의 저서에서, “지구는 광활한 우주에 떠 있는 보잘것없는 존재에 불과함을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고 싶었다.”라고 밝혔다.
태양계를 벗어난 보이저호에서 보면 지구는 먼지의 티끌처럼 보일 것이다. 우리 은하를 벗어나서 본다면 태양계도 먼지의 티끌처럼 보일 것이다. 하물며 영원할 것처럼 보이는 거대한 태양도 수명이 다하면 죽을 것인데, 태양계의 작은 변방에서 수없이 나고 죽는 모습들은 관심조차 끌지 못하는 작은 일이다.
우주 전체는 영원한 것이라고는 없는 변화의 연속이며, ‘무상’이라는 하나의 현상이다. 이렇게 우주 전체가 무상하다는 것을 말하는 이유는 허무감이나 쓸쓸함, 무의미함을 강조하거나, 우리는 작은 존재이니 서로 사랑하자는 도덕을 설파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무상의 본래 의미를 왜곡하는 것이다.
영원불멸을 희구하는 사람들에게는 무상이라는 말이 정서적 색조를 띄고 받아들여질 수 있다. 무상한 것은 무의미하다고 느껴지는 것도 영원한 것만이 의미를 가진다는 관념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무상은 단지 중립적인 '사실(事實)'이다. '사실'은 인간의 호불호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무상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 주는 경험은 바로 '죽음'이다. 왜냐하면, 의미심장하고 영원할 것 같던 어떤 경험도 공통적으로 죽음과 함께 무상해지기 때문이다. 죽음이라는 거대한 그물은 모든 경험을 지배한다.
시공간에서 펼쳐진 다양한 경험들은 수평적 차원에서 본 경험이다. 이 경험들을 수직적 차원으로 재배치하여 보면, 죽음은 모든 경험의 전제가 되는 단 하나의 절대적 경험이다. 절대군주처럼 죽음은 다른 경험들을 빛바래게 한다.
이상의 내용은 졸저 <요가 심리학 총론>에서 발췌했다.(P49~59)
모든 영화의 구성은 시간, 공간, 경험이라는 인간의 삶의 조건을 어떻게 배분하여 보여줄 것인지의 문제이다. <카우보이의 노래>는 '죽음'이라는 절대적 조건을 전면에 두고, 그 안에서의 모든 희로애락의 경험들이 얼마나 무의미한 희극적 소동으로 무화(無化)되는지를 보여준다.
영화의 시공간은 생존 자체를 위해 분투해야 하는 험난한 시기인 미국 개척시대로 설정되어 있다. 총 여섯 개의 에피소드에서 각 인물들의 경험이 펼쳐진다.
앞의 다섯 개의 에피소드에는 여러 가지 우화들이 병렬적으로 나열되어 있고, 마지막 에피소드는 앞의 이야기들을 모두 압축적으로 포괄하여 감독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던진다.
네 번째를 제외한 나머지 에피소드들은 모두 관객의 감정이 이입되려고 하는 찰나에 주인공 격인 인물이 어이없게 죽는 구조로 이루어진다. 관객은 순간적으로 주인공과 동일시되어 황당한 죽음을 체험하게 한다.
영화가 웃픈 이유는 바로 이런 죽음 때문이다. 결국 이렇게 어이없게 죽으려고 그 난리를 피웠나?
3-1> 필멸자의 유해(The Mortal Remains)
앞의 다섯 가지 에피소드는 다음 글에서 따로 리뷰하고, 이번 글에서는 여섯 번째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이야기하려고 한다.
마지막 에피소드인 <시체(The Mortal Remains)>는 무대가 아주 좁고 조밀해진다. 마치 보이저 1호가 우주에서 지구를 보듯이, 광활한 대자연 속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연을 가진 앞의 다섯 개의 이야기들을 괄호 속으로 간단하게 묶어버린다. 잘나고 못난 모든 인생은 "태어나서 이런저런 경험하고 돌아갔다."의 네 마디로 축약된다.
좁은 마차 안에는 다섯 명이 서로 마주 보고 불편하게 앉아있다. 마부는 어디로 가는지도 얘기해 주지 않고 계속 말을 채찍질하며 서두른다. 승객들은 쉬지 않고 떠든다.
'마차'는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 조건이며, '마차가 달리는 길'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조건이다. 마차는 삶의 공간을 축약하며, 길은 삶의 시간을 축약한다. 마차 여행은 바로 죽음으로의 여정이다.
마차는 도중에 절대 멈추지 않는다. 시간이 어떠한 일이 있어도 멈추지 않는 것과 같다. 모래시계를 거꾸로 엎어놓은 것처럼, 시간은 조금씩 착실하게 사라져 간다.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마부는 멈추지 않았다.”
예고 없이 도착한 음습한 호텔 문 앞은 바로 죽음의 문턱이다. 승객들은 다들 준비 없이 일어난 일에 당황하여 상황을 이해해 보려 하지만, 두려움에 가득 차 있을 뿐이다.
'마차 위에 있는 시체'는 우리 삶의 숨은 동반자이다. 죽음은 우리의 머리 위에서 늘 같이 살며 암시를 주지만 우리는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승객들도 머리 위에 있는 시체를 전혀 인지하지 못한다.
'마차의 지붕에 올려진 짐들'은 우리가 애써 쌓은 인생의 성과물이다. 그동안 했던 모든 일들(doing), 가졌던 모든 것들(having)은 내가 나임을 증명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짐들은 하나도 내려지지 않고, 호텔로 몸만 들어간다. 허무, 무상의 세계로.
3-2> 사신과 세 유형의 인간
여섯 번째 에피소드는 상징으로 꽉 차 있다. 마차의 다섯 인물도 상징적 인물들처럼 보인다. 뒷좌석의 세 명은 인간의 대표적 세 유형이며, 앞 좌석에 앉은 두 명의 인물은 미스터리하다.
세 사람은 인간을 자기 나름의 기준에 따라 분류한다. 내가 다른 인간을 어떻게 분류하는지는 바로 나를 규정한다. 만약 내가 세상을 부자와 빈자로 구분한다면, 나의 정체성이 바로 물질적 소유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가치관과 견해에 따라 세상을 경험하게 된다. 세 사람도 자신이 경험한 바를 진리처럼 떠들어댄다.
세 사람이 떠드는 내용은 세상의 대표적인 세 가지 가치관을 상징하기도 한다.
거의 원시인처럼 보이는 사냥꾼은 "사람들은 족제비나 비버와 같다."라고 말한다. 다 거기서 거기다. 사람은 한 부류다. 그래서 말이 전혀 안 통하는 원주민 여자와 생활하는 것도 문제없다. 자신도 다른 사람들과도 말이 전혀 안 통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단지 물질일 뿐이며, 숭고하고 초월적인 것은 없다. 이런 사고방식을 세련되게 포장하면 유물론, 기계론이 되는 것이다.
독실한 종교인인 중년 부인은 사람을 '죄인'이거나 '죄짓지 않은 사람'으로 구분한다. 부인은 사냥꾼과 정반대의 입장에 있는 사람이다. 그녀는 사람을 확실히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흑백론자이며, 도덕론자이다. 그러나 그녀의 근거는 성경, 남편 등 권위 있는 자에게 빌려온 가치일 뿐이다.
그녀는 안정된 척하지만 기반 없이 하늘에 형이상학적으로 떠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녀의 정서는 매우 취약하며, 애정문제, 관계문제를 들추어 내자 바로 호흡곤란을 일으킨다.
지극히 세속적인 도박꾼은 사람을 '행운이 있는 자'와 '행운이 없는 자'로 나눈다. 그는 우리는 서로를 충분히 알 수 없다고 생각하며, 삶의 우연성을 강조한다.
도박꾼은 손쉽게 자기 편의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우연론자이다. 모든 것이 우연이라면 자기 책임은 면제되며, 자기 향상을 위해 노력할 필요도 없다. 도덕도 규칙도 허울뿐인 것이며, 상황에 따라 쉽게 어길 수도 있다.
이 세 사람은 자신의 견해대로 삶을 해석한다. 여행 동반자인 이들은 같은 언어로 말하지만, 전혀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다. 비좁은 자리에서 서로 옥신각신하며, 서로의 추태와 냄새를 역겨워한다. 평생을 이런 동반자와 같이 가는 것은 고역이다.
승객들의 대화는 모든 인생의 경험들을 뭉쳐놓은 덩어리에 숟가락을 푹 꽂아서 아무 부분이나 떠낸 것이나 다름없어서, 그 내용은 전혀 중요한 것이 없다. 앞에 앉은 두 사람은 그들의 대화를 전혀 듣지 않고, 단지 죽음의 노래를 들려준다. 영업 사원처럼 생긴 이들은 '사신(死神)'이다.
마태복음에 '등불을 켜고 기다리는 처자'라는 비유가 나온다. 충분한 준비를 하고 깨어있는 처자만이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신랑을 맞이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한밤중에 느닷없이, 그러나 언젠가 반드시 오는 손님은 사신, 즉 죽음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외부 세상의 ‘반짝이는 것들’에 주의를 빼앗겨 손님을 맞이할 준비가 전혀 돼있지 않다.
세상은 거대한 농장이며, 사신들은 수확하는 일을 한다. 사신에게 사람은 '죽은 자'와 '산 자'의 두 부류만 존재한다. 다른 구분법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들은 무르익었다 생각하는 사람들을 도와준다. 영원한 어둠의 세계로 가는 것을.
사람들은 노래, 이야기, 보석 등 유치한 이야기에 매번 빠져든다. 외부 세상에 주의를 빼앗겨 방심한 이들은 인생을 낭비하다 죽는 줄도 모르고 쉽게 죽음에 잡혀간다.
우리는 당면한 너무나 중대해 보이는 경험들에 울고 웃기 바빠서 자신이 임시로 놓여 있을 뿐인 시간과 공간을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간다. 죽는 줄도 모르고 당황스럽게 맞이하는 죽음만큼 나쁜 것은 없다.
마차에서 고생하신 세 분께 맥베스의 마지막 독백을 바친다.
맥베스는 자신이 의지하던 아내가 죽었다는 보고를 받고, 또 자신을 죽일 멕더프가 제왕절개로 태어났음을 알고 자신의 죽는 운명을 결국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 시를 읊는다.
She should have died hereafter.
There would have been a time for such a word;
Tomorrow, and tomorrow, and tomorrow.
Creeps in this petty pace from day to day.
To the last syllable of recorded time.
And all our yesterdays have lighted fools.
The way to dusty death. Out, out, brief candle!
Life's but a walking shadow, a poor player,
That struts and frets his hour upon the stage.
And then is heard no more. It is a tale.
Told by an idiot, full of sound and fury,
Signifying nothing.
그녀가 이 다음에 죽었어야 했는데.
그런 소식을 언젠가 한 번은 들었어야겠지.
내일, 그리고 내일, 그리고 내일도
이 작은 걸음걸이로 날이면 날마다
기록된 시간의 마지막 순간으로 기어가는구나.
우리의 모든 지난날들은 바보들에게
한 줌 재가 되는 죽음의 길을 밝혔을 뿐.
꺼져라, 꺼져라, 덧없는 촛불이여!
인생은 한낱 걸어 다니는 그림자일 뿐.
가련한 배우, 자기 시간에 무대에서 뽐내고 애태우다
그리고 나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이것은 바보가 들려주는 아우성과 분노로 가득 찬 이야기.
그러나 의미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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