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행무상(諸行無常), 제행개고(諸行皆苦)]
어제 <퍼펙트 데이즈>를 보고 나서 내 마음은 온종일 '나뭇잎 사이에 반짝거리는 햇빛'을 거닐었다. 그리고 새벽에 일어나서 영화에 수록된 귀에 익은 올드 팝들을 들으면서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 가득 차올랐던 감성을 빼내고 싶은 욕구 때문이다.
영화의 마지막 쿠키 영상에 '코모레비(こもれび)'라는 말이 나온다. 일본어에 실제로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을 뜻하는 하나의 단어가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순간의 감정을 포착해 낸 이런 단어들을 만나면 한동안 뭔가 대단한 발견이나 한 듯 기분이 좋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모든 장면과 대사, 대부분의 인물이 나에게 의심 없이 이해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대체로 힐링 영화로 많이 소개되지만, 히라야마(야쿠쇼 코지)의 잔잔한 생활 속에는 뭔가 깊은 뿌리에서부터 나오는 근원적 불안이 있다. 그것은 나에게는 매우 친숙한 주제이다. 큰 서사와 과장된 희로애락은 오히려 표면에서만 출렁일 뿐이다. 뿌리가 깊을수록 드러나는 것은 미미하다.
비슷한 느낌으로 기억나는 영화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체리 향기>이다. <체리 향기>도 매우 잔잔한 것 같지만, 사실 하룻밤 새에 주인공의 내면에는 생사를 넘나드는 엄청난 역동이 있다.
<퍼펙트 데이즈>는 빔 벤더스 감독의 말년의 작품이다. 젊은 천재 시인은 있어도 젊은 천재 소설가는 없다는 말이 있다. 긴 호흡의 소설에는 시간을 쌓아야만 알 수 있는 경험의 깊이가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 말이 영화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작가의 세월이 투영된 어떤 영화는 정말 소설처럼 읽힌다.
이 영화에도 거장 감독의 삶에 대한 모든 경험과 그에 대한 잠정적 결론이 의도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반영되었을 것이다. 나는 그 결론을 제목에서부터 유추해 보려고 한다.
목차는 다음과 같다.
1. 왜 '퍼펙트 데이즈'일까?
1-1> '라이프'와 '데이'의 차이
1-2> '퍼펙트(완벽)'의 기준
2. 서로 다른 세상들
3. 세상 사이의 경계
4. 변화 속의 질서, 질서 속의 변화
5. 완벽한 날들, 무의미의 축제
1-1> '라이프'와 '데이'의 차이
perfect life가 아니라 perfect days인 이유는 무엇일까? '삶'이라는 뜻의 '라이프(life)'는 삶을 한 덩어리로 단일하게 보는 단어이지만, '날'을 뜻하는 '데이(day)'는 삶의 구체적 작은 조각, 비균질적 파편의 단위이다.
수많은 픽셀이 모이면 하나의 디지털 그림이 완성되듯이, 많은 '날'이 빠짐없이 모이면 '삶'이 될 것인가? 단일하게 통일된 하나의 삶이라는 것은 우리의 머릿속에서 추론되는 가정이 아닐까? 그렇다면 '라이프'는 환상이며, 오직 '데이'들만 있는 것이다.
히라야마는 "다음이 언젠데?"라며 바다에 가자고 조르는 조카 리코에게 "다음은 다음, 지금은 지금."이라고 한 음절씩 끊어서 답한다. '라이프'는 늘 다음을 계획하고 집중하지만, '데이'는 지금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리코가 자전거를 지그재그로 느릿느릿 타면서 "다음은 다음, 지금은 지금."을 즉석에서 노래하고 히라야마가 뒤따르며 같이 라임을 타는 모습은 영화 전체를 축약한 것 같다. '다음'으로 가는 스텝으로서의 '지금'이 아니라, 단지 지금에 머무는 둘의 뒷모습에 따사로운 석양이 비춘다.
1-2> '퍼펙트(완벽)'의 기준
"다음이 언젠데?"라는 물음에는 삶의 연속성이 내포되어 있다. "다음은 다음, 지금은 지금."이라는 답에는 삶의 분절된 찰나성이 숨어 있다. 우리가 속는 것은 삶의 찰나가 아니라 삶의 연속이다.
삶의 연속성은 우리에게 추상적인 '다음'에 집중하게 하며 구체적인 '지금'을 놓치게 한다. 삶이 지금까지와 같은 추세로 연속될 것이라는 믿음은 변화를 두려워하며 인위적인 안정에 집착하게 한다.
'완벽한(perfect)'이라는 수식어는 '라이프'에 어울리지 '데이'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어떤 대상이 완벽한지 불완전한지를 판단하려면 어느 정도 덩어리가 커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예쁜지 미운지를 알려면 얼굴 전체를 한 덩어리로 봐야 한다. 얼굴의 작은 솜털이나 세포 하나만 따로 놓고 보면 판단할 수 없다.
'완벽한'과 '날들'은 우리가 통념적으로 생각하는 판단 기준으로는 서로 들어맞지 않는다. 이 영화는 이렇게 서로 배척되는 '퍼펙트'와 '데이즈'를 섬세하게 조화시켜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영화에는 등장인물의 수만큼 이 과정이 다 다르게 표현된다. 그리고 그것을 '세상'이라고 말한다.
히라야마와 리코는 공중목욕탕을 나와서 상쾌한 기분으로 자전거를 타고 산책하며 대화한다.
리코 : "엄마 말이 삼촌은 우리랑 다른 세상에 산대."
히라야마 : "그럴지도 모르지. 알고 보면 이 세상은 수많은 세상으로 이뤄져 있거든. 연결된 것처럼 보여도 그렇지 않은 세상도 있지. 내가 사는 세상과 니코 엄마가 사는 세상은 많이 달라."
리코 : "나는? 나는 어떤 세상에 사는데?"
리코는 삼촌의 책 중에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11>이라는 단편집을 읽고서 말한다. "테라핀에 나오는 빅터라는 남자애 꼭 나 같아. 얘 기분 완전 알겠어."
테라핀은 어머니에게 학대당하며 갇혀 살던 소년이 어머니를 살해하는 내용이다. 리코는 어머니의 세상과 삼촌의 세상 사이 어딘가에서 방황하다 가출했을 것이다. 말 없는 히라야마가 유일하게 리코에게는 말을 많이 했던 것도 리코의 이런 상황을 이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은 가족이면서도 서로 다른 세상에 산다. 이들의 세상을 세속적 기준으로 정렬시킨다면, 가장 오른쪽에 아버지와 여동생(리코의 엄마)이 있고, 리코, 히라야마 순서로 놓일 것이다.
영화에서 종종 등장하는 부랑자 행색을 한 이상한 남자는 히라야마의 세상보다 더 왼쪽 세상에 있다. 그런데 이 남자는 계속 히라야마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것은 자신의 세상이 언젠가 이 남자의 세상과 겹쳐질 수도 있다는 불안감일 수도 있고, 아직은 자신의 세상을 질서 있게 관리하고 있다는 안도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세속적 기준의 세상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히라야마는 과거 매우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으며 충분한 교육을 받고 번듯한 직업도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와의 불화, 사회적인 부적응 등 여러 이유가 있어서 현재의 삶에 안착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세속적인 서사는 현재의 히라야마를 단지 일부분만 설명해 줄 수 있을 뿐이다.
히라야마는 주변 사람들에게 무례하거나 무관심하지는 않지만 불필요한 교류를 하지 않는다. 의식주를 건사하는데 필요한 경우이거나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들과는 친근하지만 끈적하지 않은 짧은 눈인사면 족하다. 한 달에 몇 번 쉴 때마다 들리는 단골 선술집의 마담과는 은근한 썸이 있지만 온기만 남은 난로 정도의 열정이다. 서점 주인과도 짧게 대화하지만 사적인 것이 아닌 책에 대한 논평 정도이다.
히라야마와 세상과의 관계는 출퇴근 길에 차창으로 분리된 바깥 풍경을 무심히 스쳐 지나가는 것으로 요약된다. 세상과 연결돼있지 않은 것이다.
그가 적극적으로 맺는 유일한 관계는 카세트테이프로 듣는 올드 팝, 문고판 책 등의 시공을 초월한 간접적 교류이다. 그리고 필름 사진기로 매일 찍는 나무, 아침마다 올려다보는 하늘 등의 자연, 매일 아침 캔커피를 뽑는 자판기도 있다.
그는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인가?
히라야마가 살아가는 방식은 단절이나 회피라기보다는, 단지 그가 주변의 다른 세상과 접점이 없기 때문이다. 히라야마의 세상은 사실 두 세상 사이의 경계이다. 그의 세상은 여동생과도 부랑자 남자와도 다르다. 둘은 모두 양극단의 세상에 속한다.
한 세상에 안착한 삶은 안전하지만 무겁다. 한 세상에 속한다는 것은 그 세상이 부과하는 혜택뿐 아니라, 의무와 짐을 지어야 한다. 그러나 경계를 밟고 있는 삶은 불안하지만 가볍다. 혜택과 짐을 모두 내려놓았기에 희미한 불안의 그림자가 드리운 자유를 얻는다.
히라야마와 여동생의 세상이 달라진 것은 '라이프'와 '데이'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가 더 결정적이다. 삶의 비밀은 일상의 파편 속에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다시 기존의 질서 있는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비밀을 알아버린 자에게는 또 다른 고통이 기다린다. 또 다른 의미의 '불안'과 '무의미'라는 고통.
선술집 마담의 전남편은 히라야마에게 와서 말을 건다. 그들은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불안과 어두움을 느낄 수 있었다.
두 사람은 갑자기 그림자를 겹치면 더 어두워질지를 궁금해하며, 서로의 그림자를 겹쳐본다. 그러나 딱히 더 어두워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갑자기 그림자밟기 놀이를 한다. 한바탕 놀고 나서 둘은 천진한 웃음을 터뜨린다. 그 순간에는 불안도 어두움도 없다. 이 순간이 바로 '코모레비'이다.
우리는 자신의 그림자를 잡거나 뗄 수 없듯이 각자의 불안과 무의미를 포착하거나 분리해 낼 수 없다. 적어도 존재의 깊은 우물 밑에서 나오는 것들은 그렇다.
'라이프'라는 속임수에 빠져 있는 한 우리는 얼마든지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다. 요술 방망이처럼 미래, 꿈과 희망, 완벽, 안정, 행복, 혹은 정반대의 좌절, 절망, 우울, 허무 등 무한한 레시피를 제조할 수 있다. 그러나 데이라는 파편 속에 선 사람은 화려한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멍해져서 아무것도 꾸며낼 수 없다. 단지 한 순간의 코모레비를 소중히 할 뿐이다.
히라야마는 비밀을 봤을 뿐 깨달은 사람은 아니다. 그래서 양쪽 세상 사이를 솜씨 있게 걸어야 한다. 그가 택한 방식은 변화 속에 질서를 부여하여 안정감을 얻고, 질서 속에 변화를 부여하여 의미를 찾는 것이다.
히라야마의 방식은 완벽주의자인 에니어그램 1번적이다. 나는 첫 장면에서 히라야마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이불을 개며 하루를 시작하는 것을 보며 높은 확률로 1번일 것으로 추측했다. 여러 가지 허드렛일 중 청소라는 직업을 선택한 것도 1번에 어울린다. 청소는 무질서에 질서를 부여하는 행위로, 대부분의 1번이 아주 좋아하며 심지어 취미가 청소인 1번도 많다.
히라야마는 루틴의 남자이다. 매일 같은 방식으로 움직이고 일한다. 기본적인 몸단장 루틴, 화초에 물 주기, 같은 위치에 가지런히 정렬된 소지품, 매일 아침 문 열고 나가서 하늘 한번 보고, 자판기 커피를 빼서 작은 차에 오른다.
히라야마는 자신이 특별히 제작한 청소 도구로 과도하게 완벽한 방식으로 일한다. 조카에게 이층 방을 내어주고, 아침에 분무기를 들고 삐걱대는 계단을 살금살금 올라가서 화초에 물을 주는 모습은 정말 루틴 그 자체였다.
히라야마는 지극히 정돈된 나날을 보내지만, 그날들은 똑같지 않다. 매일 똑같은 나무를 찍는 것 같지만, 햇빛의 양, 각도의 미세한 차이, 주변 상황 등에 의해 늘 다른 사진이 인화된다. 출퇴근하며 매일 그날의 느낌에 따라 엄선한 음악을 듣는다. 노래 가사는 과묵한 히라야마를 대변한다. 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는 타란티노 감독과 전혀 다른 스타일이지만, 음악을 기가 막히게 쓴다는 것이 공통점인 것 같다.
그는 길가에서 잡초나 다름없는 작은 식물을 조심조심 떠와서 화분에 심는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작은 에피소드에도 긴 여운이 있는 미소를 짓는다.
히라야마는 질서 속에 숨어 있는 변화를 포착한다. 감독은 매일의 일상을 조금씩 다른 각도와 시각에서 보여준다. 그래서 관객들은 기본적으로는 똑같은 장면들이 계속 다르게 보이는 마법을 체험한다.
마지막 장면의 웃는 듯 우는 듯 환희에 찬 듯 고통스러운 듯한 히라야마의 다양한 표정의 의미는 무엇일까? 여기서 표정의 의미를 찾는 순간 우리는 히라야마가 놓아버린 라이프라는 덩어리를 또 들이미는 것이 된다. 구름이 여러 형상으로 바뀌며 하늘을 지나가듯 희로애락이 그의 얼굴에 지나갈 뿐이다.
라이프에 사로잡힌 세상에서는 델 것같이 강렬한 희로애락을 경험한다면, 히라야마의 세상에서는 온화하고 순화된 감정이 분절적으로 흐른다.
***
야쿠쇼 코지 배우의 인터뷰를 보니, 마지막 장면이 각본에는 "백미러에 비친 히라야마의 눈에 눈물이 보인다. 하지만 결코 슬퍼 보이지는 않는다."라고 되어있었다고 한다. 이것만 가지고 2-3분에 걸친 긴 시간을 카메라 앞에서 얼굴로 존재해 낼 수 있다니 참 연기의 세계는 대단하다.
니나 시몬의 'Feeling Good'이 배경으로 흐르고 히라야마의 얼굴이 끝없이 흐른다.
<콜미 바이 유어 네임>의 마지막 장면도 떠오른다. 벽난로 앞에서 시련의 아픔을 온전히 경험하고 있던 엘리오(티모시 샬라메)의 얼굴.
엘리오의 얼굴이 봄날의 피어나는 새싹이 앞으로 성장하며 겪을 수많은 불안을 상징한다면, 히라야마의 얼굴은 여름의 폭풍을 겪고 가을에 도달한 큰 나무처럼 느껴진다. 이제 모든 것을 떨구고 겨울로 들어가야 하지만 슬프지 않은 나무.
불교 철학에서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을 말한다.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으며 변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삶의 진실은 모든 것은 매 순간 변화하며 잠시도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다. 엎어 놓은 모래시계처럼 몸도 마음도 세상도 끊임없이 변화한다. 다만 모래 한 알갱이가 떨어지는 것처럼 너무 미세하여 우리는 찰나의 변화를 알아채지 못할 뿐이다.
물방울이 한 방울 한 방울 모여 바위를 깨버리듯, 우리는 구별할 수 있을 만큼의 변화가 들이닥쳤을 때 비로소 기뻐하거나 슬퍼한다. 기쁨도 곧 슬픔으로 변화하고, 슬픔도 평온으로 변화한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삶이 변하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 "왜 삶이 변해야만 할까요?"라고 한탄하는 선술집의 마담처럼. 변화야말로 우리의 가장 큰 괴로움이므로 '제행개고(諸行皆苦)'이다.
모든 것은 찰나에 생겨나고 찰나에 사라지는 것일 뿐인데, 한 찰나가 다음 찰나로 틈 없이 이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영원하다고 착각하고 싶어한다. 영원하며 불멸한 무언가를 믿는 것은 짧은 안정감을 주지만, 금세 우리를 배신한다.
<퍼펙트 데이즈>를 보고 나서 나에게 문득 밀란 쿤데라의 마지막 유작인 <무의미의 축제>가 떠올랐다.
"오래전부터 말해 주고 싶은 게 하나 있었어요.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의 가치에 대해서죠. …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말입니다, 존재의 본질이에요.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있어요. 심지어 아무도 그걸 보려 하지 않는 곳에도, 그러니까 공포 속에도, 참혹한 전투 속에도, 최악의 불행 속에도 말이에요. 그렇게 극적인 상황에서 그걸 인정하려면, 그리고 그걸 무의미라는 이름 그대로 부르려면 대체로 용기가 필요하죠. 하지만 단지 그것을 인정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사랑해야 해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여기, 이 공원에, 우리 앞에, 무의미는 절대적으로 명백하게, 절대적으로 무구하게, 절대적으로 아름답게 존재하고 있어요. 그래요. 아름답게요."
<무의미의 축제>
'무의미'와 '축제'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결합 같지만, 우리는 무의미한 것만을 축제처럼 즐길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무의미의 긍정성을 받아들일 때 '퍼펙트 데이즈'를 즐길 수 있다.
1929년생인 밀란 쿤데라는 유작으로 <무의미의 축제>를 남기고 2023년에 삶의 시간을 마쳤고, 1945년생인 빔 벤더스는 2023년에 <퍼펙트 데이즈>를 만들었다. 거장들의 시간은 이렇게 이어지는가 보다.
#퍼펙트데이즈 #빔벤더스 #야쿠쇼코지 #코모레비 #밀란쿤데라 #무의미의축제 #제행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