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아이와 함께 차를 마시다 울었던 적이 있다. 학원이 끝날 시간에 아이를 데리러 갔는데, 집을 나서기 전 듣게 된 노래 때문에 만감이 교차했기 때문이다. 그날 들었던 노래는 곽진언의 <자랑>이라는 곡이었다. 어릴 적 상처가 있는 사람은 흔히 부모를 원망하고 세상을 탓하기 마련일 텐데, 가사에는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 되어 그대에게 위로가 되고 싶다'라는 소망을 담고 있었다. 스물네 살의 나이에 이런 가사를 쓸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따뜻한 사람이 되어서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싶어 하고 엄마에게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 성숙한 모습을 보면서 나 자신을 반성해보게 되었다.
그 나이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내게 무관심하고,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던 가족들에 대한 원망을 하곤 했었다. 그날 아이에게 이런 마음에 대해 털어놓아보았다. 가족들이 내게 관심을 갖지 않고 차갑게 대했던 건 나한테 정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그런데 이제는 엄마가 나를 기르던 때의 나이를 어느새 훌쩍 넘어 있었다. 나는 그동안 내 관점으로만 엄마를 바라보았음을 깨달았다. 내가 그 나이가 되어보자 엄마가 당시에 얼마나 힘든 상황이었는지에 대해 깨닫게 되었다. 어릴 적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던 건 내 입장에서만 엄마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특유의 강한 모습으로 자식들을 대하면서 스스로를 보호하고 상황을 이겨나가려고 하셨다는 걸, 엄마 나이가 되어서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날, 조용히 내 이야기를 들어주던 아이는 내게 "엄마는 좀 더 많은 것들을 누릴 가치가 있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저는 엄마를 좋아해요"라고 말해주었다. 그 말이 큰 힘이 되었다. 엄마를 좋아한다고 말을 듣게 되니 마음이 충만해져 왔다. 이 말을 나는 엄마에게 하지 못한 채 지금까지 지내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내게 상처를 주었다고 생각하며 원망하고 커왔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좋은 시간들을 엄마에 대한 원망이라는 감정으로 괴로워하며 지내왔다니 안타까울 뿐이다. 좋은 것만 하기에도 우리에게는 시간이 넉넉하지 않다. 아까운 시간들을 부정적인 감정을 마음속에 쌓아둔 채로 살아가고 싶지 않다. 엄마 나이가 되어 좋은 점은 나도 엄마를 한 명의 인간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